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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와 미술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인식과 가장 친근한 예술 영역으로 음악을 꼽는다. 색채와 형태가 수단인 미술은 소리와 리듬을 가지고 창작하는 음악과 달리 구조주의 철학 방법을 표현하기에 한계가 많다고 지적한다. “미술과 음악 사이에는 진정한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술은 자연 속에서 재료를 찾는다. 색깔은 사용되기 전에 이미 주어졌으며, 색깔을 지칭하는 어휘, 색깔의 가장 예민한 차이까지 지시하는 파생적 성질이 이를 증명한다.”각주1) 이미 채색된 존재나 물체가 있기 때문에 색깔이 존재한다. 음악은 음표를 비롯한 제한된 기호를 통해 다양한 멜로디와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성질이 비슷하다. 하지만 미술은 자연의 형태와 색깔에 의존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독립적 코드 법칙을 따르며 작업하기가 어렵다.

비구상화는 자연 형태와 무관하기 때문에 감성적 경험에서 독립한 코드 법칙에 따라 음악처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여전히 기본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술이 언어라고 불려야 한다면, 모든 언어처럼 특수한 코드로 구성되어야 하며, 코드의 항은 적은 수의 구성단위 조합으로 생겨나고, 이 항들이 좀 더 일반적 코드의 층위에서 언어의 속성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추상 과정을 통해 형태나 색깔이 자연적 토대를 일정하게 떠날 수 있고, 분리된 체계의 요소로서 취급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는 인정한다. 하지만 정도의 문제에서 걸림돌이 생긴다. 언어나 음악처럼 적은 수의 구성단위를 지닌 기호를 통해 특정한 코드를 만들어내야 하고, 나아가서는 일반화된 규칙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술의 메시지는 기호화된 코드가 아니라 미적 지각과 지적 지각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언어나 음악과 상당히 다르다. 설사 비구상화가 어느 정도 단순한 기호를 만들어내더라도 일반적 코드로 작용할 수 없고, 일반적 의미를 얻을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몬드리안의 〈빅토리 부기우기〉는 미술이 구조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몬드리안은 몇 가지 단순한 선과 면 그리고 색으로 나름의 기호화된 표현 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구조주의 문제의식과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회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몬드리안에서 찾으려 했다. 게다가 이 작품은 회화에 음악적 요소를 도입하려 했다는 점에서, 음악과 미술의 넘어설 수 없는 차이를 강조한 레비스트로스의 주장과 연관해서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

몬드리안은 말년에 뉴욕 화단의 초청으로 뉴욕을 방문하고, 재즈에 심취하게 된다. 친구들과 할렘에서 흑인의 재즈연주를 즐겨 들었으며 많은 음반을 구입했다. 제목에 사용된 ‘부기우기’라는 표현은 재즈의 어떤 면에 주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부기우기는 블루스 피아노 연주에서 왼손으로 한 마디 8박자를 잡아주면서 오른손으로는 자유롭게 연주하는 스타일을 지칭한다. 그만큼 재즈의 즉흥성과 자유분방한 표현에 매력을 느꼈다.

〈빅토리 부기우기〉

몬드리안, 1942년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림을 보면 그 영향이 금방 눈에 띤다. 기존의 몬드리안 그림과 비교할 때 몇몇 변화가 두드러진다. 먼저 선과 면을 통한 수직과 수평 표현만을 고집하던 그는 이에 적합한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캔버스를 고수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마름모 모양의 캔버스를 사용한 점도 재즈의 영향에 속한다. 또한 면과 색의 경계를 검은색 띠로 구분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면과 면, 색과 색이 직접 만난다. 더 나아가서 다양한 색으로 구성된 가늘고 긴 색 띠를 작은 사각형으로 분할하고, 한 면 안에 작은 색면을 겹쳐 삽입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경향보다 훨씬 자유롭고 과감하게 즉흥적 요소를 도입했다. 짧게 끊어지는 악기의 경쾌한 음과 무한한 자유 변주가 특징인 재즈의 특성을 반영했다.

비교적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을 넘어서 몇 가지로 유형화된 선 · 면 · 색으로 더 자유로운 표현을 찾아내고 재즈의 특성을 어느 정도 회화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 철학과 미술이 접점을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의 재즈 연주와 이 그림을 연결시켜 생각하면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한계를 실감할 수 있다. 재즈 음악의 생동감과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의 느낌을 담아내기에는 회화적 수단의 제한이 뚜렷해 보인다.

미술에서 시선에 대한 응시의 승리

라캉은 그림이 재현 영역이 아니라 그 이상의 다른 목적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물과의 관계가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재편의 여러 형태로 배열될 때, 무언인가가 빠져나가고, 사라지고, 단계별로 전달되며,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응시다. ··· 나는 모방이 결코 적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각주2) 그림은 사물의 재현이라는, 모방을 통한 적응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미술작품에는 항상 응시가 나타난다. 시선에 의해 재현된 것처럼 보이는 인물화나 풍경화에서조차 응시의 구조를 통해 화가의 욕망을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화가는 보는 자이며 동시에 보이는 자다.

예를 들어 성화는 그림 속에 나타난 신의 응시를 통해 인간의 절대적 믿음이라는 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관객은 단순히 그림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만이 아니라 그림이 보여주는 신의 응시 아래서 어떤 감정을 느낀다. 심지어 화가의 자화상도 마찬가지다. 자화상에서 화가는 단순히 관객에서 보이는 재현의 결과물에 그치지 않는다. 그림 안에서 관객을 바라보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시선을 넘어 응시를 경험한다. 이를 통해 공감이나 전율을 느낀다. 우리의 시각은 보기만 하는 시선이 아니라 응시라는 보여짐이 함께하는 중첩적인 것이다. 응시 구조에 길들여지는 효과가 나타난다. 그러한 의미에서 독립적 주체에 의해 보는 시선만 있고 보이는 응시를 간과한 데카르트식 사유는 눈먼 사유다.

라캉은 시선과 응시의 관계, 시선에 대한 응시의 승리를 고대 화가인 제욱시스(Zeuxis)와 파라시오스(Parrhasios) 이야기를 통해 설명한다. 두 화가는 누가 더 실물처럼 그릴 수 있는지를 내기했다. 새들이 날아와 제욱시스가 그린 포도를 쪼아 먹으려 들었기에 처음에는 우위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득의에 찬 제욱시스는 ‘자, 이제 베일을 걷고 당신의 그림을 볼까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파라시오스의 그림은 바로 그 베일이었다. “이것은 시선에 대한 응시의 승리다. ··· 일반적으로 응시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의 관계에는 유혹이 따른다. 주체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제시되고 우리가 그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각주3) 우리는 흔히 자신이 보는 시선이 확실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 혹은 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과 실제로 보이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림에서는 응시가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응시는 시선과 달리 단선적 방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주체는 변장 · 위장 · 위협이라는 모방에 의해 그림 속에 삽입될 수 있다. 모방이 모방 뒤에 숨겨져 있는 사물 자체와 구분되는 한, 모방은 무엇인가를 드러낸다.” 모방의 효과는 위장을 통해 드러난다. 마치 전쟁에서 사용하는 위장술처럼 응시의 구조를 숨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피카소, 1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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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새로운 모방과 해석 속에서도 응시가 어떻게 여전히 존속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구조주의 존재론과 인식론’에서 푸코의 글을 통해 벨라스케스가 어떻게 〈시녀들〉에 나타나는, 서로 교차되면서 겹치는 시선의 망을 통해 숨겨진 질서를 만들어냈는지를 보았다. 피카소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입체주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내놓았다. 전체적으로 창문의 빛을 광원으로 하는 명암법이 자취를 감췄다. 그림 안에서 색의 차이는 거의 사라졌고, 시선을 잡아끌던 형태는 단순화됐다. 벨라스케스가 감추어둔 장치,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비가시성의 영역에서 국왕 부부가 진정한 중심이던 전체의 질서는 사라진 듯이 보인다. 단순화 과정을 통해 공주와 시녀, 광대의 시선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숨겨진 응시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새로운 응시가 나타난다. 벨라스케스에서 피카소로 응시의 주체가 바뀌고, 그에 따라 새로운 화가의 욕망으로 바뀌었을 뿐 응시는 여전히 존재한다. “화가는 자신의 그림 앞에 서게 될 사람에게 적어도 그림의 한 부분에서 ‘보고 싶니? 그럼 이걸 보렴!’이라고 요약될 수 있을 무언가를 제공한다.” 그러면 피카소는 굳이 다른 화가의 그림을 매개로 하면서까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가의 욕망과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시각의 영역이 욕망의 영역에 연관될 때 비로소 욕망의 기능 속에서 응시가 갖게 되는 특권이 이해될 수 있다.”각주4) 피카소는 자신이 개척한 입체주의 미술의 가능성과 효과를 단순화의 순차적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듯하다. 단순화의 양상이 등장인물에 따라 서로 다른 수준과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림 중앙의 공주와 시녀는 아직 본래의 모방된 형태가 일정하게 남아 있다. 왼편의 화가는 불규칙한 선으로 더 단순화된다. 그러다가 오른편의 광대들로 오면 몇몇 도형화된 이미지가 대신한다. 이제 국왕 부부를 통한 질서의 중심은 의미가 없어지고, 입체주의 시도를 보여주려는 화가의 욕망이 응시 구조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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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 집필자 소개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동서양 미술작품을 매개로 철학적·사회적 영역으로 ..펼쳐보기

출처

사유와 매혹 2
사유와 매혹 2 | 저자박홍순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로 서양 철학 전체를 조망하는 새로운 개념의 철학사이다. 미술작품을 단순한 참고 도판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 작품을 분석해 철학의 흐름과 어떻게 맞물려 변..펼쳐보기

전체목차
2. 현대 철학과 미술 생철학 공리주의 · 실증주의 · 실용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 실존주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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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구조주의 미학사유와 매혹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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