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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념론의 존재론과 인식론
정신과 자연의 주관적 결합
자연과 물자체
칸트, 물자체를 통한 합리론과 경험론의 기계적 결합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자연관을 비판한다. “경험적 의미에서 자연은 필연적 규칙 즉 법칙에 따른 실재적 현상의 연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연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 법칙이 있다. 이에 대해 경험적 법칙은 경험을 매개로 해서만 성립하고 발견된다.”각주1) 데카르트와 버클리의 관점 모두를 비판한다. 먼저 데카르트의 합리론은 “우리 바깥의 공간 속에 있는 대상의 존재를 의심하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만 설명하는 이론”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오직 하나의 경험적 주장 즉 ‘나는 존재한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 입장은 물자체나 직관의 조건에 관해서는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 이외에 어떤 존재도 직접 경험을 통해서 증명할 수 없다는 점만 빙자하기에 문제다. 내적 경험도 외적 경험을 전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방기하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도 비판한다. “현상 이외의 순수 사고의 대상 즉 가상체를 상정할 수는 없다. 가상체는 지적될 수 있는 아무런 적극적 의미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가 주장하는 모나드는 물체의 구성 부분까지 포함하는 실체고, 각각의 표상력을 갖춘 단일한 주체였다. 모나드에는 들어갈 창이 없다는 점에서 각각 독립적이다. 하지만 칸트가 보기에 현상적 실체는 ‘관계의 합성’이다. 사물이란 오직 직접적 현상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물질에서 아는 것은 단지 관계뿐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사물의 직접 관계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가상체에 불과하다. 가상체를 객관이라고 부를 수 없다.
예를 들어 달(Dahl)의 〈베르겐 부근 뤼스호르네 산〉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은 개별적 · 독립적 사물이 아니라 전체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 광대하게 펼쳐지는 산과 하늘이 보인다. 전면의 산마루에는 방목하는 양들이 보인다. 하늘에는 곧 비가 내리려는지 먹구름이 몰려온다. 산과 하늘은 별개의 사물이 아니다. 형식적으로 언제나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일상 관계를 맺는다. 하늘의 먹구름이 비로 내려 산의 나무에 수분을 공급한다. 또한 이를 통해 양을 비롯한 온갖 동물이 영양분을 제공받는다. 이렇듯 현상적 실체는 사물의 다양한 관계가 합성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직접적 관계를 부정하기에 객관을 설명하는 도구일 수 없다. 한갓 개념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가상체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버클리의 경험론은 외부 공간에 있는 대상을 “허위적이고 불가능하다고 설명하는 이론”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버클리는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의 상을 물질의 성질로 보는 견해를 부정하며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경험과 지각 자체이지 사물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한 의미에서 만물과 함께 공간 자체를 불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따라서 공간 중의 사물도 순수한 공상이라고 선언한다.
칸트가 보기에 버클리는 물질을 가상체로 보는 라이프니츠에 비해 진전된 입장이지만, 지각만을 실체로 인정함으로써 자연의 독자 법칙이나 필연성을 사실상 부정하기 때문에 문제다. 자연이라는 말은 필연적 규칙 즉 법칙에 따른 실재 현상과 연결되는데도 버클리처럼 사물의 실재 현상을 도외시할 때 자연의 필연성과 법칙성을 부정하게 된다. “자연계에 우연은 없다는 명제는 선천적인 자연법칙이다. 마찬가지로 자연에서 필연성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요, 제약된 것 따라서 이해할 수 있는 필연성이다.”
인식 대상이기는 하지만 인식에서 독립되어 있는 사물로서의 물자체가 존재한다. 물자체는 자신의 법칙과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물자체가 지니는 법칙이 그대로 우리에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인식과정에서 지각되고 사유되는 것은 물자체의 현상일 뿐이다. “사물은 우리 바깥에 존재하며 감각 대상으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며 단지 사물의 현상만 알 뿐이다.” 인식을 통해 사물의 외적 관계로서의 현상을 볼 수 있다. 현상만 알 수 있을 뿐 법칙 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다. 자연과 사물의 실재 관계인 현상을 인정함으로써 법칙과 필연성이 존재함을 이해하는 정도가 인식 가능한 영역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버클리의 발상법을 수용한다. 사물과 현상에서 직접 인식에 이르는 로크의 경험론이나 디드로의 기계적 유물론과 명확히 분리되기 위해서도 사물에서 유래하지 않는 인식 도구를 증명해야만 했다. 버클리는 이를 인식 주체의 경험적 지각을 통해 설명한다. 하지만 칸트는 경험조차도 사물을 이해하는 도구를 제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시간은 경험이 직접적으로 각 현존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위치의 직접적 규정은 불가능하다.” 자연의 관계와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위치 개념의 이해가 필요한데, 이는 경험에서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절대적 시간은 그로 인해서 현상이 연결될 수 있는 지각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 현상에 시간 중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은 오성의 규칙이고, 이 규칙을 통해서만 현상의 현존은 시간관계에 따른 종합적 통일을 획득할 수 있다.
물자체의 설정이나 시공간 개념을 오성의 내적 규칙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칸트가 합리론 중심으로 경험론을 기계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발상이다. 물자체가 의식 외부에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경험론 요소를 갖지만, 물자체는 알 수 없고 인식은 오직 현상에만 관계한다는 주장은 합리론의 주관성을 포함한다. 또한 외부 사물을 인정하면서도 시간과 공간 개념을 오성 내부 요소로 규정함으로써 경험론의 객관성과 합리론의 주관성을 접합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그런데 주관성을 중심에 둔 결합 과정이라는 점에서 관념론적 특성을, 그 결합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점에서는 기계론적 한계를 보여준다. 기계적 성격을 띠는 결합 과정의 한계를 나중에 독일 관념론 내에서 피히테와 셸링, 특히 헤겔이 변증법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칸트는 물자체 개념을 통해 자연에 목적론 원리를 결합시킨다. “자연의 유기적 산물은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목적이면서 서로 관계를 맺는 수단이기도 하다. 유기적 산물에는 아무것도 쓸데없는 것이 없고, 무목적인 것이 없으며, 또 맹목적인 자연의 기계성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없다.”각주2) 자연은 자체의 기계성 원리와 목적론 원리를 모두 가지고 있다. 자연물이 갖는 자연적 힘이 곧 신의 힘과 같다는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하지만 라이프니츠가 주장하는 목적인의 일방적 작용과는 다르다. 신학과 자연과학을 뒤섞어놓으면 두 학문 모두 내적으로 존립하지 못하며, 서로에게 논증을 떠넘김으로써 각 영역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는 자연의 기계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연의 기계성 없이는 사물의 자연본성에 대한 어떠한 통찰도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광물계는 순전히 기계적 작용의 산물이다. 하지만 유기물은 기계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자신의 보존을 비롯한 자연의 목적성이 핵심적으로 결합한다. 결합 양상은 사물을 자연 목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서 “기계성 원리의 목적론적 원리 아래로의 필연적인 종속”이 불가피하다.
셸링, 동일성을 통한 정신과 자연의 주관적 결합
셸링은 대상과 표상의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칸트의 문제의식을 수용한다. “외적 사물의 실재성은 오직 표상에 의해서만 오성에 알려진다.”각주3) 물질적 대상이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는 않는다. 물질의 성질은 물질 자체가 가지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감각과 연관되는 데서만 타당하다. 칸트가 지적했듯이 물질의 성질이 현상하는 데 전제가 되는 시간과 공간 개념은 물질에 속하지 않고 오성 능력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실재적 현상 인정은 칸트와 마찬가지다. 사물은 가상체가 아니고, 오성 능력인 시공간 개념이나 인과 개념도 사물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연속 · 원인 · 결과 등이 표상 안에서 비로소 사물로 전가될 수 있는 것이라면, 사물 없이 그런 개념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그런 개념 없이 사물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대상과 표상이 우리 안에서 뗄 수 없게 통합되어 있고, 사물에 관한 지식의 실재성은 오직 이러한 통합 안에 놓여 있다.
셸링은 기계적 유물론과 창조론 모두를 비판한다. 기계적 유물론은 인과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유기적 자연의 영역으로 들어서자마자, 원인과 결과의 모든 기계적 연결은 설명력을 잃는다. 유기적 산물은 모두 자신에 대해 존립하는 것이므로, 그것의 현존은 다른 어떤 현존에도 의존적이지 않다.” 만약 유물론에 의존한다면 유기체의 원인을 비유기체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유기체는 자기 자신을 산출하며 자신으로부터 생긴다. 각각의 식물은 같은 종류에 속하는 개체의 산물이다. 이처럼 각 유기체는 오직 자신의 유(類)만을 무한히 산출하고 재산출할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기체는 진화가 아니라 자신에게로 무한히 되돌아갈 뿐이다. “유기체는 이미 유기화되어 있지 않고서는 자신을 유기화할 수 없다.” 다분히 진화를 통해 무기체에서 유기체로 전환한다고 설명한 디드로의 유물론을 반박하는 주장이다.
창조론 발상도 조심스럽게 비판한다. “자연 사물을 외부의 현실적인 것으로, 창조자의 작품으로 고찰하자마자, 사물 자체 안에는 어떠한 합목적성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합목적성은 인과 개념을 전제로 하는데, 이는 신이 아닌 인간의 오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에 대해 창조론처럼 신의 목적을 설정하면 오히려 신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창조자는 창조자이기를 멈추게 되며, 단순히 예술가가 되고 말 것이다. 기껏해야 자연의 건축사가 되고 말 것이다.” 신은 단지 자연의 사물을 하나하나 만들고 배치하는 기능적 존재로 전락한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창조론을 조심스럽게 반박한다.
하지만 자연을 이해하는 데 칸트를 단순히 구체화시킨 것은 아니다. 물자체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주관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칸트에게 물자체는 자연의 목적을 설명하는 주요 개념임과 동시에 오성 능력인 시간과 공간 개념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의식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셸링이 보기에 “자연 전체의 절대적 합목적성은 임의적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필연적으로 사유해야만 하는 이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 안에서 개체가 전체의 합목적성과 유리되었음을 발견하면 전체와 연관이 파괴되었다고 믿으며, 합목적성으로 바뀌기까지 안정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깨는 듯한 개별 현상이 발생하면 인간은 의문을 품고 이를 균형 아래에서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와 같이 자연 어디에서든 목적과 수단의 결합은 반성적 이성의 필연적 작용이다. 그러므로 물자체는 의식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셸링은 이를 “정신을 자연과 연결시키는 끈”이라고 정당화하면서 특유의 동일철학을 주장한다. “자연은 가시적 정신이며, 정신은 비가시적 자연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정신과 자연의 절대적 동일성 안에서만 어떻게 자연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자연은 정신과 별개의 물자체에 의한 목적성을 갖지 않는다. 자연은 필연적 · 근원적으로 정신 법칙을 표현한다. 스스로 정신 법칙을 실현하고, 나아가 자연이 그 법칙을 실현하는 한에서만 자연은 자연이 되며 또 자연이라고 불릴 수 있다. 즉 물자체는 정신과 자연이 절대적으로 같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식 행위와 독립된 물자체는 성립할 수 없다. “물자체는 영원한 인식 행위에서의 이념일 뿐이다.”
칸트에 비해 자연학에서 주관적 · 사변적 성격을 대폭 강화한다. 물론 셸링이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칸트가 아니라 경험적 자연학이다. 경험적 자연학은 자연에서의 궁극적 운동 원천으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오직 이차적 운동만을 다룰 뿐이다. 자연의 표면이나 외면적 상태만을 탐구한다. 비록 근원적 운동에 관심을 가져도 기계론적으로 다룰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의 물자체는 경험적 자연학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외면적 · 이차적 운동에서 벗어나 자연의 목적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개별 사물을 넘어서는, 전체 자연의 절대 법칙으로서 자연의 실재성 규정은 바람직하다. 셸링은 이를 ‘칸트적인 내재적 실재론’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칸트는 자연과 정신 관계를 능동적으로 설정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자연의 실재성은 총괄 개념을 넘어서, “모든 존재하는 것을 정립 가능하게 만드는 절대적 자아 안에 정립되어야만 한다.”각주4) 즉 내재적 실재론을 넘어서 사변적 실재론으로까지 고양되어야 한다.
셸링은 사변적 실재론에서 인간의 자유 개념을 끌어낸다. 칸트의 문제는 “물자체에 관해 유일하게 가능한 단 하나의 적극적 개념인 자유를 사물에 전가하려는 생각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각주5) 에 있다. 정신 법칙을 표현하는 자연으로, 정신과 자연의 관계를 설정할 때 진정한 자유 개념은 성립할 수 있다. “오직 자유의 값을 치른 자만이 모든 것을 자유와 동등한 관계에 위치시키고 또 자유를 전체 우주에 확장시키려는 요구를 감지할 수 있다.” 정신 법칙으로서 물자체를 이해할 때 관념론은 더 높은 수준의 실재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칸트 비판철학의 특징인 부정성 너머로 자신을 고양시킬 수 있다.
프리드리히(Friedrich)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셸링의 사변적 자연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인 듯하다. 한 남자가 산 정산에서 안개가 자욱한 풍경을 내려다본다.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안개 바다가 역동적이긴 하지만 한 발을 대딛고 내려다보는 사람이 무게 중심을 차지한다. 프리드리히는 풍경화를 통해 자연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분위기를 담아내고자 했다. 산 정상의 방랑자가 드넓게 펼쳐진 자연을 감탄하며 바라보는 느낌보다는 인간과 자연이 내적 교감을 나누는 듯하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전체를 관장하는 인상을 준다. 마치 셸링이 강조하는 정신 법칙이 관통하는 자연 속에서, 관계의 주체이자 절대정신의 상징인 인간이 전체를 지휘하는 듯하다.
헤겔, 물자체 비판과 자기 보존으로서의 자연의 목적
헤겔은 칸트와 셸링 자연학의 핵심 개념인 물자체를 비판한다. 물자체 개념의 설정은 주관성 · 추상성으로 인해 사실상 객체의 회피에 다름 아니다. “객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논리적 규정에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논리적 규정은 또한 자신이 기피했던 객체에 매여 있으며, 끝없는 걸림돌인 물자체는 저 규정 너머에 저편의 것으로 남아 있다.”각주6) 인식 대상으로서 객체를 명확히 설정하고 의식과 맺는 관계를 적극적 · 구체적으로 탐구하기보다는, 물자체라는 추상 개념을 통해 주관으로 치달아버렸다는 지적이다.
그러다보니 감정이나 경험의 역할은 지극히 왜소해진다. “사유하는 자기의식이 정립하거나 규정하지 못하는 어떤 것, 즉 사유에 낯설고 외적인 물자체를 감정이나 직관의 경험 영역 바깥에 계속 남겨두었다.” 칸트처럼 물자체가 시공간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인식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 경험이 인식을 위해서 할 일은 별로 없다. 그 결과 오성 능력이면서 사유 대상과 관계하는 시간과 공간 개념은 의미 없는 형식적 규정으로 전락한다. 심지어 사물과 분리된 사유 규정이 초월성을 향하면서 규정 자체를 논하는 것이 아무런 결실도 맺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진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추상적이기 때문에 구체적 상호 관계를 고찰 대상으로 삼지 못하고, 그 결과 사유 규정의 본성에 대한 인식을 조금도 진척시키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있어 물자체와 같이 개별성을 부정하고 곧바로 전체 원리로 나아가는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무기체와 유기체는 단번에 전체로 묶여질 수 없다. “양쪽 모두가 자유로운 독자 존재로서 관찰 대상이 되는 가운데 서로가 본질적 관계 아래 있다고 봐야만 한다.”각주7) 무기체와 유기체는 각각 독자 존재로서 구별 정립되어야 한다. 이를 전제로 양자의 본질적 관계를 탐구해야 한다. 이 관계도 전체라는 말로 얼버무릴 수 없다. “이 양자는 상호 무관한 독자적 면이 두드러져서 서로의 관계란 부분적이다.” 유기적 개체와 무기적 자연 조건은 모두 자기만으로 있는 절대 존재가 아니다.
예를 들어 공기 · 물 · 흙 · 기후 등의 무기체는 스스로 독자적 존재이면서 유기체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 요인이다. 각각의 유기체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한편으로는 무기적 요소와 대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기체의 자기 보존에 기여하도록 한다. 이렇게 독자적 존재 사이에 구체적 관계를 설정하고 고찰할 때 변증법적 접근이 가능해진다.
헤겔은 목적론을 부정하지 않지만, 자연의 합목적성을 정신 법칙이나 자유 이념처럼 주관성의 실현으로 보는 피히테와는 견해가 다르다. 무기체 자체로는 목적 개념을 설정하기 어렵다. 이에 비해 “유기체란 실은 목적 자체가 사물의 형태를 띤 것”이다. 무기적 자연이 유기체와 필연적 관계를 맺으면서 목적 개념이 연관된다. 유기체가 무기적 요소와 맺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스스로의 보존이 곧 목적 개념을 형성한다. 목적 개념은 추상 원리가 아니라 현실적 존재로서 있다. 그러므로 자기 보존이라는 목적 개념은 “유기체의 외적 관계를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고 유기체의 본질을 이루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헤겔은 합리론을 중심으로 경험론을 수용하되, 칸트처럼 물자체를 통해 초월적 자연학으로 치닫는 것은 비판한다. 또한 피히테처럼 정신 법칙이 곧바로 자연을 실현하는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이들처럼 합리론과 경험론을 기계적 혹은 주관적으로 접합시키는 방식으로는 사물과 인간의 관계, 대상과 인식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기계적 접합을 대신할 정신의 도구로 변증법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인식론 영역에서 더 구체적으로 검토하겠다.
절대적 자아로서의 인간
칸트, 초월적 · 무제약적 · 보편적 자아의 형성
칸트는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유를 꼽는다. “자유 개념은 실재성이 실천이성의 명증적 법칙에 의해 증명되는 한에 있어서, 순수이성의 체계 전체 건물의 마룻돌을 이룬다.”각주8) 자유는 경험과는 무관하게 혹은 경험 이전에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외부 대상과의 관계라든지 무언가를 사유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따로 입증할 필요가 없는 절대적 전제다. “영혼 불멸성의 가능성도 자유가 현실적으로 있다는 사실에 의거해 증명된다.” 그만큼 자유 개념은 칸트철학 체계의 핵심 요소이자, 칸트 이후 독일 관념론의 결정적 요소다.
자유 개념을 근거로 인간의 자아는 드높은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 계몽도 자유에 근거한다. “계몽을 위해서는 자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 중에서도 가장 해가 없는 자유 즉 모든 국면에서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다.”각주9) 개인이 정신적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몽의 유일한 길은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자유를 통해 주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자아는 드높은 단계로 접어든다. 자아는 경험적 자아에서 초월적 자아, 제약된 현상적 자아에서 무제약적 절대적 자아, 개체적 자아에서 보편적 자아로 나아갈 수 있다. 독일 관념론의 가장 큰 특징인 절대적 자아 모색은 인간이 선험적으로 갖는 자유에 의존한다.
만약 자아가 경험과 제약된 현상, 개체의 필요에 머문다면 인간은 자신과 공동체 보존에 해악을 미칠 수도 있다. 퓌슬리(Fuseli)의 〈맥베스 부인〉은 자아가 고양되지 못하고 추락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극단적 결말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의 한 장면을 담았다. 비극의 시작은 맥베스 부인의 개인적 욕망이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자신과 남편의 출세 욕망으로 가득했다. 양심의 가책으로 칼 들기를 주저하는 남편에게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면서 다리 적시기를 싫어하는 고양이 같다.”고 질책하며 잠든 왕을 살해하도록 시킨다. 이후 눈앞에 나타난 왕의 유령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힌다. 여기에 망명자들이 군대를 모아 진격하자 전쟁터로 나간 맥베스는 죽고, 부인은 자살을 선택한다.
그림은 왕의 유령을 보고 정신이 나간 맥베스 부인의 모습을 묘사했다. 눈은 동공이 열릴 정도로 공포가 가득하고 몸은 광인처럼 허우적거린다. 뒤에는 의사와 하녀가 놀라고 있다. 부인이 든 촛불은 “꺼져라, 꺼져라, 잠시 동안의 촛불이여! 인생은 비틀거리는 허황된 그림자, 가련한 배우에 지나지 않는구나.”라는 극중 맥베스 대사를 상징하는 듯하다. 자아가 자유의지를 지니지 못하고, 현상적 욕망과 개인의 필요에 매몰될 때 이성은 자취를 감추고 자신과 타인에게 불행을 안겨준다.
자유를 통해 보편적 자아를 얻는 인간은 이 세계에서 절대자의 지위를 갖는다. 자유를 지녔기 때문에 스스로 목적을 지향할 수 있다. “스스로 목적을 규정해야만 하는 법칙이 자신에 의해서 무조건적이고 자연조건에서 독립적인 것으로, 자체로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성질을 갖는다. 이런 종류의 존재자가 바로 인간이다.”각주10) 인간은 지상에서 창조의 최종 목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이야말로 목적을 이해할 수 있고, 합목적적으로 형성된 사물의 집합으로부터 이성에 의해 목적의 체계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유에 의해 스스로 목적을 지녔기 때문에, 절대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인간은 “이 최고 목적에 반하여 그가 자연의 어떤 영향에 복속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 다양한 피조물의 사용 권리는 물론이고 자신의 목적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하는 의무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보다 우월하다. “인간을 동물보다 훨씬 우월하게 하는 이성의 마지막 진보는, 인간이 본래 자연의 목적이고, 이 점에서 지상의 어떤 동물도 자신과 견줄 수 없다는 점을 인간 스스로 파악했다는 데 있다.”각주11) 그래서 칸트는 인간이 처음 양에게 ‘네가 입고 있는 가죽은 자연이 너를 위해 준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준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양의 가죽을 벗겨 내어 자기 몸에 걸쳤을 때,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보다 우위에 있다는 천부의 특권을 깨닫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인간도 처음에는 모든 동물처럼 본능에 따랐지만, 점차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가 지닌 자유와 목적성을 깨닫게 되면서 자연에 배타적 권리를 가진 존재로 스스로를 정립했다는 것이다.
피히테, 대립물의 변증법적 통일을 통한 절대적 자아의 완성
경험과 초월, 제약된 현상과 무제약적 절대, 개체와 보편 등의 대립항을 통한 칸트의 자아 설명은 변증법과 관련해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대립물을 통해 현실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정립과 반정립으로 이루어지는 변증법적으로 접근하는 데 전제를 마련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립물 사이의 관계와 대립을 통해 이후의 변화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점에서는 기계적 구분이라는 결정적 문제점을 지녔다. 이로 인해 합리론과 경험론의 결합도 기계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피히테는 칸트가 놓친 바로 이 부분에서 독창적 시도를 한다. 합리론이 그러하듯이, 누구나 반박 없이 인정할 만한 하나의 명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철학의 제1원칙에 해당하는 명제를 “자아는 존재한다.”각주12) 로 제시한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단순한 명제는 ‘A=A’라는 동일률이어야 한다. ‘A는 A이다’라는 명제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 동일률만큼 분명한 것은 없기 때문에 동일률에 의해 정립된 것이 바로 그 사물의 실재성이며 본질이다. 자아는 자기 스스로에 의해 정립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일률을 표현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유는 존재의 본질이 전혀 아니며, 단지 존재의 한 특수한 규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제1원칙이 될 수 없다. 피히테는 자아는 존재한다는 동일률을 정립의 명제로 삼는다.
이어 제2원칙이자 반정립 명제를 “비아는 자아가 아니다.”로 제시한다. 여기에서 비아가 자아에 단적으로 대립된다. ‘A는 -A가 아니다’라는 점에서 모순율을 의미한다. 자아가 정립이라면 반정립은 자아에 대립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칸트처럼 대립 요소를 단순 나열하는 것은 양자 사이에 실질 관계가 소멸해버리는 문제가 생긴다. 정립과 반정립은 내적 관계여야 한다. 정립 행위의 의식이 반정립 행위의 의식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반정립은 사실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반정립은 정립과 내적 연관을 맺음으로써 비로소 반정립이 된다.
제3원칙은 정립과 반정립의 대립과 통일로서 “자아는 자아 안에서 가분적 자아에 대해 가분적 비아를 대립시킨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자아와 비아 즉 정립과 반정립이 서로 내적으로 침투하면서 “자아는 자아가 아니며, 오히려 자아는 비아가 되고 비아는 자아가 된다.” 자아와 비아는 형식적 대면이 아니라 내적 침투를 동반하는 역동적 관계다. 이로 인해 서로의 상태에 변화가 나타난다. 변화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자아와 비아 각각은 나뉠 수 있는 가분적 상태여야 한다. 나눌 수 없는 완결적 상태라면 상호 침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분적 자아에 가분적 비아가 대립한다. 그리하여 두 대립된 것이 서로 제한하게 되는데, 말 그대로 제한이지 부정이 아니다.
만약 각각의 실재성을 부정에 의해 전부 지양해버린다면 통일은 불가능하다. 오직 부분적으로만 지양한다. 대립된 자아와 비아를 분할 가능성 개념에 의해 통합함으로써 절대적 자아는 비로소 완성된다. “자아는 존재한다.”는 제1원칙에서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자아는 단적으로 자아이며 그 이상 더 설명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아와 비아의 대립과 통일을 통해 이제 의식 안에 모든 종합적 실재성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종합적 개념은 대립된 것의 통합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새로운 정립이 가능한지를 규명한다는 점에서 제3원칙은 인과관계를 설정해주는 충족이유율에 해당한다.
대립은 반드시 통일로 나아간다. “종합 없이는 반정립이 불가능하고 반정립 없이는 종합이 불가능하듯이, 그 둘은 또 정립 즉 단적인 정립 없이는 불가능하다.” 통일로서 새로운 정립이 있기 때문에 대립도 가능하다. 피히테는 칸트의 비판철학이 절대적 자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규명하기보다는 단적이고 임의적으로 최상의 개념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논리적 한계를 지닌다고 지적한다. 절대적 자아는 대립항의 비교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대립과 통일의 산물이다. 인간은 제약적 현상과 무제약적 절대, 자연 필연성과 자유, 유한과 무한이라는, 두 영역의 갈등 속에서 대립과 통합을 동시에 경험하는 존재다. 자아는 비아와 끊임없이 대립하면서 절대적 통일성과 완성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절대적 자아에 도달함으로써 인간은 절대적 주체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 존재와 어떤 공통점도 없다. 절대적 주체로서 인간이 자연을 통제해야만 한다. “인간의 능력을 무력하게 무(無)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하는 자연적 폭력, 즉 황폐화시키는 허리케인 · 지진 · 화산은 물질의 마지막 발악”각주13) 이기 때문에 절대적 주체로서의 인간은 이성을 통해 자연의 폭력에 맞서야 한다. 이성의 숱한 각인을 담고 있는 성과를 지켜내야만 한다.
셸링, 존재 원리와 사유 원리의 일치로서의 절대적 자아
셸링은 피히테가 주장하는 무제약적 · 절대적 자아를 가장 중요한 명제로 받아들이되, 일정한 보완을 시도한다. 그는 절대적 자아 안에서 모든 존재를 정립하고자 했다. 정신 법칙이 핵심 위상을 차지한다. 자연은 정신 법칙을 표현하고 실현한다. 정신은 파악 도구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산출하고 실현한다. “자아는 사유하며, 자아는 존재한다.”각주14)
셸링에게 자아의 존재만큼이나 정신 즉 자아의 사유는 중요한 문제였다. 둘은 별개가 아니고, 선후로 나눌 수도 없다. “모든 실재성의 궁극적 근거는 존재에 의해서만 사유 가능하며, 존재하는 한에서만 사유되는 것이다. 존재의 원리와 사유의 원리는 일치한다.” 데카르트에게 사유가 선행하고 존재 규정이 뒤따른다면, 셸링에게 사유와 존재는 같은 원리의 다른 표현이다. 데카르트처럼 “나는 생각한다.”라는 규정이 선행할 때 존재는 절대적 자아가 아닌, 경험적 자아에 머문다. 회의론적 사유 과정에서 객체와 연관되기 때문에 경험적 자아의 성격을 갖는다. 반대로 사유가 분리된 단순한 존재는 정신 법칙이 실현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무제약자이기 어렵다. 절대적 자아는 사유와 존재의 일치 속에서 정립된다.
만약 사유를 동반하지 않는 존재라면 절대적 자유를 규명할 수 없다. “인간의 본질은 오직 절대적 자유에만 존립할 뿐이다.” 자유는 객관 사물이나 사태가 아닌 한, 철저히 정신적 특성이다. 자유의지로서의 사유가 멈춘 곳에서 인간의 본질은 찾을 수 없다. 퓌슬리의 〈악몽〉에 등장하는 여인은 자유와 사유가 멈춘 곳에서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보여준다. 한 여인이 수렁처럼 깊은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이에 악령이 여인의 몸을 올라타고 있다. 커튼 뒤로 새로운 악령이 고개를 디밀고 있어서 쉽게 끝날 악몽이 아님을 암시한다. 단지 잠을 잘 때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셸링의 논리에 따르면 깨어 있을 때도 이성의 박약으로 정신적 미성년 상태에 있으면 사유의 주체가 아닌 현상과 정념의 지배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 상태에서 인간 본질의 구현은 불가능해진다.
사유 원리와 존재 원리가 일치하고, 인간 본질이 정립될 때 개인의 내적 통일과 주체로서의 정립은 물론이고 자연과의 관계, 역사의 진전도 성취될 수 있다. 무제약적 자아야말로 “이념과 실제, 사유와 연장, 이론과 실천, 자연과 자유, 이 모든 이원적 대립을 하나로 통합해 줄 마지막 원리”이기 때문이다. 먼저 인간의 내적 통일과 주체로서의 정립은 육체에 의존할 수 없다. 정신은 육체의 작용과 별개다. “신경 · 두뇌 등의 촉발과 외부 사물의 표상 사이에 아무리 많은 중간항을 집어넣어도 오직 자신을 현혹할 뿐이다.”각주15) 로크나 디드로가 주장하는, 대상과 육체에 의존하는 감각을 지속적으로 축적한다고 해서 인식을 보장하지 않는다. 물체에서 영혼으로의 이동은 연속이 아니라 비약으로 일어날 수 있다. 눈을 비롯한 감각은 단지 “이성적 존재의 손 안에 있는 도구일 뿐”이다.
다음으로 정신 법칙이 자연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전망을 연다. 또한 “모든 이념은 역사 안에서 실현되기 이전에 먼저 지식 영역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각주16) 는 주장처럼 역사의 실현도 정신 법칙에 의존한다. “도덕의 진보는 곧 자아의 한계 확장”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무제약적 · 절대적 자아를 통해 역사의 진전을 추동한다. 셸링은 이를 예정 조화의 원리로 설명한다. “객체의 인과성과 실재성, 모든 실재성의 총괄 개념은 자아 덕분에 가진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정 조화의 원리를 갖게 되는데, 이 원리는 내재적 · 절대적 자아 안에서만 규정될 수 있다.” 절대적 자아에 의해 경험적 자아의 실재성과 인과성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예정 조화에 의해 도덕성과 행복의 필연적 조화를 이해할 수 있다. 절대적 자아의 실재성과 인과성을 근거로 예정 조화 원리의 실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셸링의 관념론은 객관적 관념론으로 나아간다.
헤겔, 사유와 행위를 통해 도달하는 개별자로서의 절대자
헤겔은 한편으로는 셸링의 문제의식을 적극 수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넘어선다. 먼저 사유 원리와 존재 원리의 일치, 절대자 개념을 수용한다. “자기의식은 존재와 자기의 단순한 통일을 견지하고 있으니, 통일은 곧 유(類)로 나타난다. 의식은 행위에 부수되어 있는 온갖 대립과 제약을 떨쳐버리고 자기를 기점으로 새로운 출발을 한다. 더욱이 타자가 아닌 자신을 향해 간다.”각주17) 의식과 존재는 분리될 수 없고, 이 통일이 인간이라는 부류의 본질을 형성한다. 자신을 주체와 중심으로 세우는 절대자의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칸트에서 피히테와 셸링까지 이어지는, 절대자를 자아 개념에 담아내는 경향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특히 칸트처럼 절대적 자아를 전제된 실체로 파악하는 관점은 명확히 거부한다. 절대자는 철학의 출발점이 아니라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도달하는 결과이고 목적지여야 했다. 단순한 자아에서 비아와의 대립을 거쳐 통일된 절대적 자아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전개 과정을 강조한 피히테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던 것 같다.
나아가서는 칸트에서 피히테를 거쳐 셸링에 이르기까지 공통 경향 즉 보편적 자아를 강조하는 경향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자아는 단박에 보편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성을 획득한 개인은 특정한 개별자로 존재한다.” 절대자는 밤에 모든 사물이 검게 보이듯이 그렇게 동일하여 구별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현실에서 구체적 개별자로 존재한다. 개별자로 존재할 때 대립과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추상적 물자체 개념에 반대하던 논리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절대자가 출발점이 아닌 목적지고, 보편자가 아닌 개별자라는 통찰은 현실의 실질적 주체를 정립하려는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또한 정신 법칙에 의한 역사 실현이라는 셸링의 문제의식도 적극 수용하는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절대자는 개별자로서 역사와 마주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자에게 사유만큼 행위도 중요하다.
“개인이 현실인 이상 그가 작용을 가하는 소재도, 행위 목적도 행위 자체에 얽혀들어 있다.” 절대적 자아를 정립하는 과정도, 절대정신을 역사 속에 실현하는 과정도 개별자의 행위가 결합될 때 가능하다. 행위 과정에서 다양한 요소가 대립하고 갈등하지만 궁극적으로 인식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행위 속에 우연의 요소가 끼어들면서 의욕과 실행, 목적과 수단, 내면과 현실 사이의 대립이 빚어지지만, 이와 더불어 행위의 통일성이나 필연성도 개재해 있다.” 의식은 처음부터 필연과 마주하지는 않는다. 우연적 요소를 포함한 다양한 대립을 통해 통일성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니게 된 개념이나 확신이야말로 우연적 경험을 극복하는 절대자의 의식이다. 사유와 존재가 일치하듯이 사유와 행위가 일치하면서 절대자에 이른다.
행위와 결합된 사유라는 점에서, 이를 통해 현실 변화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헤겔의 절대자는 오디세우스의 여정과 닮아 있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온갖 지혜를 지닌 정신적 영웅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의 지혜는 미리 만들어져 있거나 저절로 실현된 것이 아니다. 트로이 전쟁 10년,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 10년, 모두 2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수많은 유혹과 위협, 도전과 위험을 선택과 의지로 극복해 나아갔다. 예기치 않는 사건과 맞닥뜨리며 행위와 사유를 통해 지혜를 얻었다.
티슈바인의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는 긴 여정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초라한 걸인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부인 페넬로페와 마주한 장면을 담고 있다. 부인 역시 20년 동안 재산과 권좌를 노리는 구혼자들을 피하기 위해 시아버지의 수의가 완성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며, 낮에는 베를 짜고 밤에는 베를 풀며 시간을 버는 등 다양한 지혜를 구사하며 남편을 기다린 터였다. 헤겔이 보기에 정신의 성숙은 오디세우스가 그러했듯이 연속되는 우연한 사건 속에서 개인의 사유와 행위가 결합되고, 점차 내적 통일의 과정을 거쳐 성취하는 것이다.
개별 사물이나 사태와 관계하는 개별자, 행위를 통한 사유와 변화를 강조한다고 해서 경험론이나 유물론적 인간 개념은 전혀 아니다. 기본적으로 관념론 틀 내에서의 문제의식이다. 일차적으로 정신을 물질 작용으로 이해하는 유물론과 분명히 선을 긋는다. “정신은 두개골로 표상되는 사물이 아니다.” 인간은 동물과도 엄격하게 구분된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충동 · 욕구 · 기호가 있지만, 의지는 없으므로 충동에 얽매어 있다. “인간은 충동을 넘어 충동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각주18) 충동을 넘어설 수 있는 의지의 근거가 사유에서 온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다움은 사유로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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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정신과 자연의 주관적 결합 – 사유와 매혹 2, 박홍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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