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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론적 도덕원리 비판과 도덕의 상대성
쇼펜하우어, 법칙과 명령으로서의 윤리 비판과 동정심
쇼펜하우어의 윤리관은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관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윤리에 있어서 제시나 의무론은 기대될 수 없으며, 보편적 도덕 원리나 모든 덕을 생기게 하는 만능 처방은 없다.”각주1) 의무로서 무조건 지켜야 하는 당위와 윤리는 그 자체로서 모순이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자유의지를 꼽으면서 의지가 따라야 할 법칙적 의무를 지시하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기 때문이다. 마치 ‘목제의 철’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로는 할 수 있으나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모순에 불과하다.
의무론적 윤리관의 부정은 곧바로 절대적 윤리관 비판으로 이어진다. “선은 본래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선은 무엇을 요구하는 의지에 대한 관계 속에서만 그 본질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선’이란 하나의 모순이다.” 선은 구체적 행위와 삶에서 분리될 수 없다. 선은 의지의 작용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의 의미는 개인의 의지를 당장 직접 만족시키는 선과 미래에 간접적으로 만족시키는 선 즉 쾌적한 것과 유용한 것이다. 이와 반대의 개념을 악이라고 말한다. 의지가 개별 인간에 속하기 때문에 좋은 음식, 좋은 길, 좋은 날씨는 서로에게 다르다. 어느 한 사람에게 좋아도 남에게는 반대일 수가 있다. 의지에게 완전한 충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의지에게는 최고의 미도, 절대적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잠정적 선이 있을 뿐이다.
칸트처럼 윤리에 객관이나 절대와 같은 규정을 도입하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칸트는 순수한 도덕법칙이 있다는 가정을 통해 선결 문제요구의 오류에 빠진다. 오류는 도덕법칙이 ‘절대적 필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첨가할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 나는 윤리학에 법칙 · 지침 · 당위의 개념을 도입할 어떤 근원도 인정하지 않는다.”각주2) 법칙 수립이라든지 명령 형식으로 윤리를 강요할 수는 없다. 명령에 복종하는 칸트의 도덕을 지독한 노예의 도덕으로 규정한다. 윤리는 미래에 나타날 행위 일반의 제약이 아니라 일어난 행위를 설명하고 해석하여 이해에 이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도덕은 이론이 아닌 경험에서 출발한다.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행위의 바탕에서 경험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이기주의다. 인간 행위의 근본 동인은 현존재와 행복을 갈망하는 이기주의다. 따라서 이기주의는 비록 유일한 것은 아니어도 도덕적 동인이 싸워 이겨야 하는 최초의, 가장 중요한 세력이다. 이러한 이기적 갈망을 이성이 규정한 몇몇 도덕 법칙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이기적 욕망을 도덕의 핵심 영역으로 설정하는 쇼펜하우어의 문제의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근대 철학은 물론이고 중세 철학도 이기적 욕망을 도덕이 상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여겼다. 블레이크의 〈쾌락의 원형〉은 이기적 욕망에 지배당하는 인간을 묘사한다. 벌거벗은 남성과 여성의 육체가 회오리바람 속에 뒤섞여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태풍의 소용돌이는 채찍이 되어 휘갈긴다. 인간은 고통받으며 현세에서 누린 애욕의 대가를 치루고 있다. 오른 쪽에 서 있는 존재는 색욕자의 지옥을 관장한다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얼굴을 한 미노스가 아닐까 싶다. 지옥의 분위기를 묘사하려는 의도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어둡고 칙칙한 색으로 가득하다. 서양 철학에서 전통적 윤리관은 이성적 명령이나 신학적 제약이 어떤 때는 독립적으로, 혹은 뒤섞이면서 위력을 발휘했는데, 공통적으로 〈쾌락의 원형〉이 주는 메시지처럼 이기적 욕망의 제어를 과제로 삼았다.
하지만 이기적 욕망을 제어하는 방법에서는 서로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신학적 윤리관은 지옥의 고통을 매개로 종교적 믿음과 복종을 강제했다. 근대 철학은 이성, 특히 칸트는 정언명령에 기초한 보편 윤리를 제시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궤변이나 선언 이상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기주의가 실제적이듯이 대응도 지극히 실제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과제는 복잡하고 사변적인 윤리 이론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사심 없는 인간애의 행위 그래서 고결한 마음과 관용으로까지 갈 수 있는 행위를 찾는 일이어야 한다. 실제적으로 존재하면서 이기주의적 갈망을 제어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동력으로 동정심을 제안한다.
동정심은 이기주의를 넘어서 인간애를 발휘할 수 있는 경험적 근거로 가장 명확하기 때문이다. 동정심은 “의식에 고유한 것이며, 전제 · 개념 · 종교 · 독단 · 신화 · 교육과 양육에 기인하지 않고,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것”이다. 즉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놓여 있기에 윤리의 근본 현상으로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동정심은 처음에는 누구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수동적 마음 상태로 나타난다. 다음으로는 상대를 돕는, 좀 더 적극적 동기로 나아간다. 그래서 동정심에서 출발하는 “누구도 해치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를 도와라.”라는 명제를 윤리학의 최고 원리로 제시한다.
동정심이 도덕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기 때문에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대상은 도덕 영역에 속한다. 동물도 도덕 영역에 포함된다. “동물에 대한 동정심은 선한 성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서, 동물에게 잔혹한 이는 선한 인간일 수 없다. 이 동정심은 인간에 대해 행해지는 덕과 동일한 원천에서 나온다.” 동물을 무책임하고 형편없이 다루는 현실, 나아가서는 동물의 권리를 부정한 기존의 윤리관을 비판한다. 동물 학대는 이성을 중심으로 인간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조야하고 야만적인 사고 때문에 생긴다.
인간 본질이 이성이 아닌 의지에 있고, 개별 의지에 의해 자아가 형성된다면 동물도 근본적으로는 인간과 같다. 동물도 스스로를 외부 세계로부터 구분할 수 있고, 자신에 대한 의식과 자아도 지닌다. 어떤 동물에게나 내재하는 무한한 이기주의만 보더라도 동물이 의지를 지닌 존재고 얼마나 자아를 잘 의식하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동물 보호는 인간이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적 결론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한다.
니체, 사회적 강제로서의 윤리와 생존 본능의 해방
니체는 기본적으로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관 비판과 윤리의 상대성을 향해 명확한 발걸음을 내딛은 쇼펜하우어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인다. “이 정신은 일찍이 ‘그대는 해야 한다’를 자신의 가장 신성한 것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이제 이 정신은 자유를 되찾기 위해 가장 신성하다고 여겨지던 것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찾아야 한다.”각주3) 당위를 윤리의 원리로 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의무나 의무의 신성함과 같은 도덕 개념의 세계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사건의 발단과 똑같이 피로 물들여졌다. 억압과 강제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무론적 윤리관에서는 피와 고문의 냄새가 완전히 씻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칸트의 정언명령에는 잔인한 피의 냄새가 난다고 비판한다. 당위적 법칙에서 벗어나 자의의 세계로 나아갈 때 진정한 윤리의 가능성은 열린다.
보편 법칙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도덕의 본질적 성격은 상대성과 개별성이다. “어떤 민족에게는 선으로 간주되는 많은 것이, 다른 민족에게는 웃음거리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서로 다른 전통과 역사를 가진 민족마다 각기 다른 윤리 기준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민족 집단만이 아니라 개인에 따라서도 선과 악의 기준은 다르다. “‘이것이 나의 선이며 악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 자다.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위한 선이며, 모든 사람을 위한 악’이라고 말하는 저 두더지와 난쟁이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선과 악은 오직 개인의 판단으로 한정될 때 의미를 갖는다. ‘모든’이라는 보편적 접근이 아니라 ‘나’라는 개별 주체에서 출발해야 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윤리관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쇼펜하우어가 개별성 위에서 윤리학의 토대를 제안하되 여전히 이기주의에 대응함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이를 동정심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면, 니체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먼저 개별성을 더욱 강조한다. 개별성에 기초할 때 보편적 이익조차 증가한다. “될 수 있는 대로 개인적 고려를 해야만 보편 이익 역시 최대가 된다는 것, 따라서 엄격한 개인적 행위야말로 도덕성의 본 개념에 상응한다는 것”각주4) 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개인성의 희생을 요구하는 도덕률에서 벗어나 자신을 완전한 개인으로 만들어야 하고, 모든 행위에 있어 개인의 최고 안녕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타인을 위한 저 동정적 감동이나 행위보다도 더 진보하게 해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처럼 동정심을 통해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제시함으로써 다시 기존 윤리학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욕구를 더욱 확고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개별 주체가 분명하게 ‘그렇다’와 ‘아니다’를 표명하는 데서 윤리는 출발해야 한다.
니체는 아예 이기주의 문제를 윤리 영역에서 떼어낸다. “인간이 윤리와 비윤리, 선과 악에 대하여 구분을 지어온 근본 대립은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의 대립이 아니라 인습과 규율의 속박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이기주의 극복을 윤리적 동인으로 본 쇼펜하우어와 달리 니체는 윤리를 사회적 규율이나 관례에 순종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사회는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에게 ‘선하다’는 칭호를 준다. 반대로 인습에 역행할 때 사회는 악이라 규정한다. 그러므로 윤리와 비윤리, 선과 악의 구분은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습과 규율에 속박되어 있느냐 아니면 해방되어 있느냐에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이기적 행위가 아니어도 사회 규율과 다르면 ‘비도덕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윤리란 사회 규율을 강제하려고 만들어 놓은 장치에 불과하다. “인간은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자마자 곧 자신의 윤리를 실시하거나 들여오기 위해 강제력을 행사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윤리는 확증된 처세술이기 때문이다.” 법을 강제력에, 윤리를 내적 양심에 연결시키는 기존의 윤리관과 확연히 다르다. 윤리는 처세술로서의 강제력에 기초한다. 선이나 덕은 강자가 재물과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자 강제력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강제력과 억압에 기초한 의무론적 윤리는 개인의 생생한 삶과 의지를 죽인다. 하나밖에 없는 현실인 삶을 부정하는 기존의 도덕 개념은 허구일 뿐이다.
윤리의 다른 이름인 인습이 왜 생겨났는지가 잊힐수록 존중받고 신성시된다. 인습이 처음 생길 때는 특정 세력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인습이 생긴 이유를 기억하고 있는 동안은 그만큼 절대적 권위를 갖기 힘들다. 인습의 기원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면 점점 특수한 이해관계를 초월한 보편적 규범으로 여기게 된다. 처음에는 강제력에 기초하지만 윤리가 습관이 되면서 점차 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윤리를 지키면서 쾌감을 느끼게 되면 강제력은 점차 불필요해진다. 강제력 대신에 자발적 양심이 자리를 차지한다. 윤리에서 쾌감을 느끼게 되면서 사람들은 “아무런 사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 처한다. 왜 그러한 윤리가 생겨났는지, 정말 인간에게 필요한지 의문을 가지거나 사고하는 것이 사라지고 맹목적 복종만 남는다.
이기적인 것과 도덕을 서로 다른 영역으로 구분할 때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해를 미친 행위까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거나 최소한 도덕과 무관한 행위로 포장될 위험이 있다는 반론이 뒤따를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동정심을 매개로 개별성을 양보하는 타협을 선택했다면, 니체는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모든 ‘사악한’ 행위는 생존 본능,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개인의 쾌감 의도와 불쾌 회피가 동기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동기가 주어진 것이면 악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생존을 위한 본능적 의지와 행위에 해당한다면 선악의 잣대를 댈 수 없다. 동물이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죽이는 행위를 놓고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생존을 위해 타인과 싸우는 행위를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나쁜 짓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지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때 비윤리적 행위로 규정받는다는 관점이야말로 진짜 악행이다. “수의성(隨意性)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증오 · 복수심 · 책략 그리고 공상의 전반적 손상 따위를 불러일으킨다.” 수의성이란 자기 뜻대로 하는 성질을 말한다. 전통적 윤리관은 자기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고,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본성을 갖고 있는 게 인간이기 때문에 윤리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본다.
“타인의 괴로움에 직접적 · 본능적으로 관여하는 즉 동정심은 도덕적 가치를 갖는 행동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그릇된 견해가 여기에 속한다고 니체는 지적한다. 수의성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저지른 행위인데도 복수심이나 책략에 의한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윤리의 잣대를 들이민다. 비윤리 행위에 대한 통념이 자유의지라는 잘못된 판단에 기초한 비난이기 때문에 생존본능에 기초한 ‘사악한’ 행위는 무죄다.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권력자 · 지배자의 행위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맥락이다.
국가를 세우기 위한 권력자들의 행위를 생존 본능 차원에서 논의하는 니체의 논리는 자칫 잘못하면 스스로 국가의 폭력성을 정당화시켜주는 모순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근대국가의 폭력성과 침략성을 비판하지만 말이다. “강한 것에 대해서, 강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요구하며 그것이 압박욕 · 제압욕 · 지배욕 · 적대욕 · 저항욕 · 승리욕이 아니기를 요구하는 것은, 실로 약한 것에 대해서 그것이 강한 것으로 나타나기를 요구하는 것과 똑같이 불합리하다.”각주5) 국가의 건설과 유지와 연관된 권력자들의 지배와 억압 욕구가 생존 본능의 하나로 정당화될 가능성을 지닌다. 그의 비유에 의하면 어린 양들이 맹수를 싫어하는 태도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맹수가 어린 양을 채 가는 것을 비난할 만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권력을 향한 의지를 선으로 규정하고, 강자에 대비되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동정심은 부적절함을 넘어 악에 가깝다고 단언한다. “선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권력의 감정을, 권력에로의 의지를, 권력 그 자체를 드높여 주는 모든 것이다.··· 악덕보다 더 해로운 것이 무엇인가? 모든 발육이 부진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 대한 실제적 동정이다.”각주6) 권력을 향한 본능적 충동과 이를 뒷받침하는 강한 힘은 선에 해당한다. 반대로 악이란 약함에서 생겨난 모든 것이고, 약한 자와 발육이 부진한 자들이 도태되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인간애의 첫 번째 명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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