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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묘청

妙淸

민족자주정신의 표상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1135년

김부식과 팽팽한 라이벌이었던 정지상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일대사건〉이란 글에서 묘청(妙淸, ?~1135)의 대위국(大爲國) 건설은 사대파인 김부식 등과 자주파인 묘청 등의 싸움에서 비롯되었고, 묘청이야말로 웅대한 민족적 스케일을 지닌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묘청은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일까?

역적으로 몰려 죽은 탓에 그의 출신과 성장배경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서경(평양) 출신으로 불명(佛名, 불법에 귀의한 남녀 신자에게 붙이는 이름)이 정심(淨心)이라는 것과 풍수설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같은 서경 출신인 정지상(鄭知常)의 소개로 중앙에 줄을 댔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정지상은 과거에 합격해 중앙에서 벼슬살이를 한 인물인데 시인으로도 명망이 높았다. 당시 장래가 유망한 중앙관료이자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개경 문벌가 출신의 김부식과는 여러모로 팽팽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정지상은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서경의 묘청을 ‘성인’으로, 또 같은 곳 출신인 백수한(白壽翰)을 그 다음가는 성인으로 높이 받들었다. 이들은 서경 천도를 모의하고 중앙의 대신과 임금의 측근들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마침내 임금의 측근과 대신들은 연명(두 사람 이상의 이름을 한 곳에 죽 잇따라 쓰는 것)으로 임금에게 건의했다.

“묘청은 성인이며 백수한도 그 다음가는 사람이오니 국가의 일을 낱낱이 이들에게 물어 행하시고 그들의 소청은 어떤 것이든 받아들여야만 정사도 잘되고 국가도 보존됩니다.”(《고려사절요》)

묘청의 계획이 무르익어 가면서 조정의 요소요소에 그의 지원 세력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임금 인종도 귀가 솔깃해졌다.

권력의 실세, 개경 문벌가

고려가 건국된 지 100여 년이 지나자 개경에 뿌리를 박은 특권층이 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리며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런 특권 문벌들 가운데 이자겸(李資謙)이 있었는데, 그는 예종의 장인으로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도 탐욕스럽게 재산을 긁어모았다. 또한 예종이 죽자 외손자 인종을 왕위에 앉혀 놓고 자기 딸들을 셋째와 넷째 왕비로 들어앉혔다.

인종은 14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차츰 나이가 들면서 이자겸 세력에 염증을 느껴 어떻게든 이들을 제거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임금의 명을 받고 이자겸을 제거하려던 근신들이 오히려 죽음을 당하고, 거꾸로 인종이 이자겸의 집에 감금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인종은 마음속으로 칼을 갈다가 마침내 1127년 이자겸의 심복인 탁준경(拓俊京)을 이용해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고, 그가 수탈한 토지를 모두 거두어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하지만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많은 궁궐들이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고 왕권도 땅에 떨어졌다.

한편 만주 땅에서 일어난 여진족이 중국 북쪽을 차지하고 있던 요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운 뒤에 중국 남쪽의 송나라까지 압박하고 있었다. 금은 고려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맺자던 요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군신의 관계를 강요해 왔다. 이 문제를 두고 벌어진 토론에서 이자겸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고, 이자겸의 발호(권세나 세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함부로 날뜀)를 경계하던 개경의 기성 세력들 또한 이 문제만은 동조하고 나섰다. 개경의 관료 세력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똘똘 뭉쳐서 사대의 굴욕을 감수하려 들었던 것이다.

서경 천도는 부패 척결의 첫걸음

이럴 때에 묘청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건의가 있었고, 서경 천도의 필연성이 제기되었다.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한 뒤 바로 서경에 행차했다. 이때 묘청의 건의로 15조목의 ‘유신정령(維新政令)’을 발표했는데 지방수령의 부정을 고칠 것, 의복 및 수레제도의 간소화, 필요하지 않은 관리 축소와 급하지 않은 공사 중지, 법이 정한 공물과 조세 이외의 수탈 금지, 곡식을 억지로 꾸어 주고 이자를 받는 짓이나 썩은 쌀을 백성에게 주어 찧어 먹게 하지 말 것과 같은 내용(《고려사절요》)이 들어 있었다. 곧 기득권 세력의 지나친 사치와 특권 관료의 부정을 없애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것이었다.

인종은 서경에서 이 개혁책을 발표하고 계속 그곳에 머물며 묘청의 건의에 귀 기울였고 정지상의 강론도 들었다. 김부식 등은 금나라에 대한 사대의 예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묘청 일파와 맞섰다. 갈수록 두 세력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인종은 서경파의 계획대로 평양 부근 임원역(林原驛)에 새 궁궐을 짓게 했다. 묘청은 “그 궁궐에 임금이 계시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으며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항복해 오고 36국이 복종케 된다”고 말했다. 그 궁궐이 대화궁(大花宮, 花는 꽃이란 같은 뜻을 지닌 華로도 씀)이다. 묘청은 대화궁에 여덟 종류의 수호신을 모시게 했는데, 그 첫 자리가 ‘백두산에 있는 신’이었다. 곧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발상지이니 가장 높게 받들자는 뜻이었고, 고려 건국 당시 품었던 고구려 옛 영토의 회복 의지를 다시 나타낸 것이었다. 나머지는 금강산 · 경주 남산 · 한양 남산 · 속리산 · 지리산 · 송악산 등의 신들이었다. 또 개경의 신을 서경의 신보다 아랫자리에 놓아 상징적으로 서경의 위상을 높였다. 36국은 온 천하를 의미하며 8성당(八聖堂)은 우리 국토의 수호신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천하관과 호국관을 드러낸 것이었다.

대화궁지

인종은 서경파의 건의에 따라 평양 부근 임원역에 대화궁을 짓고 정기적으로 행차해 정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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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이 대화궁에서 임시로 정무를 볼 때 서경 세력은 임금에게 두 가지 일을 과감하게 단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첫째는 ‘칭제건원(稱帝建元)’이요, 둘째는 ‘금 정벌’이었다. 칭제건원은 임금을 황제라 일컫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이다. 고려는 건국 초기와 달리, 후기에 들어 강요에 의해 요에 복속되는 모습을 보였다. 새 왕조 금에게도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중국 남쪽으로 옮겨 간 송의 세력과 손잡고 금을 정벌하면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해 민족 자주의 국가기반을 견고하고 튼튼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경 세력은 이런 건의와 함께 서경 천도를 단행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위기를 느낀 김부식 등의 사대파는 서경파의 주장을 집요하게 반박했고 묘청을 죽이라고 요구했다. 임금은 대화궁을 짓고 난 뒤에도 재앙이 계속 따르고, 묘청 등이 주장하는 기이한 행적에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서경 천도를 미루었다. 나중에는 정기적으로 이루어진 대화궁 행차를 중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절박한 처지에 빠진 묘청이 일대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동지의 칼날에 스러지다

1135년 1월, 묘청은 서경지방의 군대를 동원해 개경에서 파견된 관리와 양반을 모조리 잡아가두고 개성과의 통로를 차단했다. 그는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지휘 아래의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하여 국가체계를 갖추고 지방수령을 새로 임명했다. 모든 것이 황제의 나라라는 것을 나타냈지만 그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인종을 황제로 받들었지만, 이것은 나름의 전략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군대를 몰아쳐 새 나라의 깃발을 들자, 황해도 이북 지방이 그의 손안에 떨어졌다. 이 소식이 개경에 전해지자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전체가 들끓었다. 인종은 어쩔 수 없이 김부식을 서쪽을 평정하라는 뜻을 지닌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로 임명해 토벌에 나서게 했다. 군사 통수권을 쥔 김부식은 왕의 당부도 저버린 채 진상도 캐 보지 않고 개경에 있던 정지상과 백수한부터 처단했다각주1) .

김부식은 서경을 포위하고 공격에 앞서 회유책을 썼다. 이윽고 묘청과 함께 거사를 했던 조광(趙匡)이 겁을 먹고 묘청의 목을 베어다 바쳤다. 묘청의 목을 가져간 사자가 감옥에 갇히자, 조광은 그 일을 후회하고 다시 맞섰지만 헛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위국은 1년을 조금 넘게 버틴 끝에 종말을 맞이했다. 우물거리던 인종의 꿈도 이와 더불어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서경의 백성들은 중앙군에 끈질기게 맞섰는데, 이에 대해 “서경 양반관료들의 정변이 지배계급 안의 정권 쟁탈전으로 끝나지 않고 봉건 지배계급을 반대하는 투쟁으로 발전하게 된 중요한 원인은 서경과 그 부근의 민중들이 이 정변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는 데에 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제 묘청과 서경 세력을 제거해 버린 개경의 사대파들에게는 걸릴 것이 없었다. 그들은 더욱 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리고 사치를 일삼았다. 특히 문신들은 이자겸 못지않게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날뛰었다. 이들은 철저하게 사대적인 태도를 취해서 민족 자주의식을 깔아뭉갰고 오로지 자신들의 현실 안존에만 급급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곧이어 무신정권이 등장했고,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묘청이 개혁과 천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풍수설에 의존했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또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 강력한 신흥국가인 금나라를 정벌할 수 있었을지 의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고구려와 고려의 건국정신을 이어받아 나태와 안일 속에 무기력을 드러낸 기득권층에 경종을 울리며 민족의 자주의식을 높이려 했던 것은 결코 나무랄 일이 아니다.

더욱이 훗날 고려와 조선이 외침에 항복하거나 사대를 표방해 자기비하를 일삼았던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 볼 때, 그의 자주정신은 하나의 표상이 되고도 남는다.

개성 만월대

개성시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시대의 궁궐터. 여러 차례에 걸친 전란으로 소실되었으나 궁전의 유적은 아직 남아 있다. 근래에 발굴 조사를 하고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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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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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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