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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김부식

金富軾

《삼국사기》를 지어 올린 두 가지 뜻

요약 테이블
출생 1075년
사망 1151년

명문가의 자제로 불우한 이들의 벗이 되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우리 역사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를 두고 좋게 평가하지만은 않는다. 그는 정치가, 문인 또는 유학자, 역사학자 등 여러 역할을 했다. 여러 분야에서 공적을 쌓았던 것이다.

김부식은 고려가 건국해 여러 가지 문물이 정비된 지 1백여 년 뒤에 태어나서 활약한 명신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위영은 왕건에게 충성을 바친 공로로 경주의 주장(州長)이 되어 경주를 다스렸다. 토호 출신인 셈이다. 아버지 김근이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벼슬할 때에도 그의 집안의 근거는 경주에 있었다. 이런 출신 배경은 그가 주도해 이룩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관련되어 말썽의 한 꼬투리가 되었다.

김부식의 네 형제는 모두 과거에 합격해 중앙정계로 진출해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조정에서는 과부로 아들들을 잘 키운 그의 어머니에게 정기로 곡식을 내려주는 은총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이를 거절해 더욱 명망을 얻었다.

남다른 재주와 처세술로 인종의 신임을 두터이 받은 김부식은 20년 동안 한림원 등 문한(文翰)의 관직에 종사해 학문의 깊이를 더했고 때로는 이런 지위를 이용해 자기 세력을 키우는 발판으로 삼기도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유교의 이념을 임금에게 강조했고 제자들에게도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실천적으로 익히라고 가르쳤다. 이런 의식 때문에 그는 한족이 세운 송나라를 받들고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를 배척했다. 그리고 국구(國舅)인 이자겸의 전횡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뒤이어 호부상서(戶部尙書)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등의 요직을 맡았다. 이에 힘입어 유교파가 고려의 조정을 장악했으며 이후 송나라 성리학이 성행했다.

김부식의 공로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묘청의 난을 평정한 것이다. 묘청은 서경(지금의 평양) 출신으로 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개경 출신의 세력을 꺾기 위해 서경 천도를 추진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도참설(圖讖說)을 이용했다. 대동강에 기름떡을 넣어 기름이 물 위에 뜨게 해 상서로운 징조라는 말을 퍼뜨렸다. 그리고 서경 가까운 임원역에 대화궁을 짓고 고려 왕을 황제라 일컬으며 연호를 독자적으로 쓰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창하고 금나라를 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사대와 모화(慕華)에 철저했던 김부식 등의 반대로 묘청의 주장은 묵살되었다. 그러자 묘청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김부식은 원수가 되어 14개월에 걸쳐 이 반란을 평정했다. 이 난에 대해 민족사가인 신채호는 개경파와 서경파, 불가와 유가, 자주파와 사대파의 싸움으로 일컬으며, 이때부터 자주세력이 몰락했다고 했다.

김부식은 이 난을 평정해 자기 세력을 굳혔고 왕의 신임도 더욱 두터워져서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이어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주국(上柱國)이 되어 《삼국사기》 저술을 맡았다. 그는 송나라 사신 서긍에게 그의 박람강기(博覽强記, 책을 많이 읽어 널리 알면서 기억력도 뛰어남)를 인정받았다. 서긍이 뒷날 송나라로 돌아가 고려의 실정을 그림과 글로 설명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지었는데 여기에 김부식의 가족 내력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로운 삶을 누리다가 말년에 무신들에게 시달린 끝에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삼국시대사를 지은 까닭

고려시대에 이룩된 역사서로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그중에서도 《삼국사기》는 정사로 전해지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자 유일한 것이다. 그런데도 칭찬과 비판이 엇갈린다. 다시 말해 상당한 가치가 있으면서도 사대적인 기술로 말미암아 여러 비평이 뒤따르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까닭에서다.

《삼국사기》

이 책은 문장이 유려하고 역사기술이 정연하며 역사서로서 체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대적인 역사기술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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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50년쯤에 고구려는 만주 일대와 대동강 이북을 중심으로, 뒤따라 백제는 한강과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신라는 좁은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건국했다. 이들은 부족국가의 형태에서 벗어나 각기 왕조체제를 갖추고 한 치의 땅이라도 빼앗기 위해 하루도 쉴 날 없이 싸웠다. 또한 안으로는 중국에서 들여온 불교를 숭상하고 유교를 받아들여 정치의 바탕으로 삼으며 고유의 신앙과 의식을 토대로 해 국민생활을 지배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말기에 동맹관계를 맺어 신라를 위협했고, 이에 신라는 존립의 위기를 느꼈다. 이후 신라는 멀리 바다 건너의 당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쳤다. 백제는 바다 건너의 일본군을 끌어들여 맞섰으나 힘에서 밀렸다. 고구려는 스스로의 힘을 바탕으로 맞서 싸웠으나 내란으로 국력이 약화돼 멸망했다.

이런 시대상을 기록한 정사류로 《구삼국사(舊三國史)》,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기(新羅古記)》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것은 오직 정사류의 《삼국사기》와 야사류의 《삼국유사》뿐이다.

《삼국사기》는 1145년(고려 인종 23) 왕명에 의해 김부식이 젊은 벼슬아치 8명의 도움을 받아 여러 사서를 참고해 만들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지어 올리는 글’에서 새로운 삼국시대사를 저술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모를 뿐만 아니라 삼국은 오래된 왕조의 역년인데도 그것을 자세히 기록한 역사서가 없다.
둘째, 《고기》 등이 있다 해도 문장이 거칠고 사적이 빠졌으며 내용에서 선악시비를 가릴 수 없다.

이 두 가지가 《삼국사기》를 짓게 된 기본 이유였다.

《삼국사기》의 두 얼굴

《삼국사기》는 기술에 있어서 자주적이면서도 사대적인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신라본기(新羅本紀)〉 12권,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10권, 〈백제본기(百濟本紀)〉 6권을 중심으로 해 〈연표(年表)〉, 〈지(志)〉, 〈열전(列傳)〉 등의 50권으로 엮인 이 책은 편년체(編年體)로 기술하면서 기전체(紀傳體)를 혼합했다. 〈본기〉는 왕들의 재위 기간 중에 일어난 사실을 연월일순으로 기재한 것이고, 〈연표〉는 세 나라의 연대를 중국 연대와 대조한 것이다. 〈지〉는 역대 제도의 연혁과 변천 과정, 그리고 제도사나 문화사가 되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제사(祭祀), 악(樂), 거기(車騎), 지리(地理), 직관(職官) 등을 모았으며, 〈열전〉은 현상(賢相), 명장(名將), 충신(忠臣), 학자(學者), 화랑(花郞), 효자(孝子) 등의 인물 전기를 모은 것이다.

그러면 두 측면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첫째, 자주적인 측면은 독자적인 역사를 기술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세 나라를 중국에서 떼어내 완전한 국가의 역사를 기술하고 제후에게 적용되는 세가(世家)를 버리고 본기로 항목을 잡아 각 왕조의 사실을 기록했다. 그리고 중국민족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운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의 활약을 비중 있게 기록하고, 비록 당의 세력을 끌어들여 삼국을 평정했으나 뒤에 당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김유신과 문무왕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다. 이것은 오늘날 중국에서 고구려를 중국소수민족의 역사 또는 중국변강사라고 왜곡하는 따위의 역사 인식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다.

둘째, 사대적인 측면은 중국 중심으로 기술했다는 점이다. 중국의 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그대로 인용해, 비록 본기라는 항목을 잡았으면서도 본디 짐(朕, 천자가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라고 기재했던 것을 과인(寡人, 제후의 호칭)이라 쓰고, 태자(太子)라 했던 것을 세자(世子)로 낮춘 것이다. 중국에 맞서 싸운 것은 일단 중국식의 유교 질서에 반대된 것으로 보았고, 비록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의 활약을 기록하면서도 민족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았다. 또 삼국 이전의 역사를 외면해 한국사의 시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신라의 후예이기 때문인지 신라를 중심으로 기록해 고구려가 북방에서 활약하고 백제가 해상에서 일본과 연계해 활약한 것, 그리고 발해의 역사를 부각시키지 않았다. 또 설총 · 강수 등의 유학자들은 항목을 만들어 높이 올리면서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신라시대의 고승들은 모조리 빼버렸다. 이것은 모두 유교 사대사관에서 나온 것으로, 이로부터 시작된 사대사관은 고려 말과 조선조에 걸쳐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자기 나라의 역사를 애써 낮추는 중화 중심의 역사를 만드는 단초가 되었다.

전해지는 말로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쓴 뒤, 다른 여러 역사서적을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삼국사기》만을 후세에 남겨두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앞에서 말한 《고기》 등 삼국시대에 관한 역사 서적이 모두 없어졌다. 이 때문에 문일평, 신채호 등의 역사가는 사대사관에 철저했던 김부식을 역사의 반역자라고 호되게 비판을 가했고, 이런 견해는 오늘날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가장 오래된 정사

《삼국사기》는 문장이 유려하고 역사기술이 정연하며 체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에 비해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이 이보다 늦은 고려 충렬왕 때 엮은 것으로, 역사서의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훨씬 자주적인 기술을 시도했고, 민속 · 종교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많은 비중을 두고 엮었다. 다만 신비한 이야기 따위를 싣는 기술방식으로 인해 야사류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우리는 삼국시대를 기록한 이 두 저술의 장점과 단점을 종합하고 둘 사이의 빠진 부분을 합해서 살펴 삼국시대의 역사상황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다. 비록 비판을 받아온 《삼국사기》이지만 이 저술이 없었다면, 우리는 삼국과 후기 신라의 줄거리를 잡을 수 없어 역사가 없는 민족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오늘날 동남아 국가는 거의 몇백 년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으며 북방민족인 돌궐족, 거란족, 몽골족의 역사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이 때문에 《삼국유사》와 함께 《삼국사기》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분석해야 마땅하다. 다만 김부식의 사대사관에 대한 비판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큰 공적을 세웠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편중된 의식으로 포폄(褒貶)의 대상이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고집이 센 유학자였으면서도 불교를 이단으로 몰지는 않았다. 그는 시인으로 명망을 얻어 종주의 위치를 누렸음에도 묘청의 난을 빙자해서 맞수였던 정지상 등을 아무런 혐의 없이 죽였다는 악명은 쉽게 지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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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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