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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87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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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943년 |
개성 거부의 아들로 태어나다
왕건(王建, 877~943)은 여러모로 행운아였다. 그는 개성 일대에서 재력을 키운 아버지의 절대적 도움을 받았고, 호족 출신인 아버지의 힘으로 많은 호족세력을 거느릴 수 있었다. 그는 탄탄한 배경을 기반으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또한 일단 자기 부하로 들어오면 부드럽게 대하면서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측근 인사들을 차근히 자기의 정치세력으로 키워 나갔다.
그는 궁예를 섬기면서 무장으로 나가 승리를 거두면서도 공로를 과시하지 않았고, 최고의 관직인 시중(侍中)이 되어서도 궁예의 비위와 권위를 거스르지 않았다. 그가 길러 낸 호족 출신의 정치세력인 신숭겸, 홍유 등은 내밀한 공작을 통해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 과정을 미화시키기 위해 피를 튀긴 사실을 은폐했는지도 모른다.
918년 왕위에 오른 왕건은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했다. 이것만은 궁예가 처음 나라를 열 때 표방한 고구려 부흥 또는 북방 진출 의지를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고려를 정식 건국한 뒤 여러 세력을 규합하는 포섭정책을 폈다.
여러 길목에 도사리고 있는 도둑들이 짐이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혹시 틈을 타서 변방의 근심을 만들지 걱정했다. 그래서 사자를 나누어 보내 예물을 후하게 건네고 언사를 겸손하게 낮추어 호의를 보였다. 과연 귀화하거나 투항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진훤만이 화친의 사자를 보내오지 않았다.
- 《고려사》 〈세가〉
그러나 마지막까지 버티던 진훤도 자식들과 벌인 내분 끝에 왕건에게 귀화했다. 왕건은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 조작을 했다.
그는 밀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는 의지를 보였다. 그런 과정에서 명성이 높은 도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곧 자신의 탄생과 고려 건국이 하늘의 뜻에 예정되었다는 결정론을 조작한 것이다. 초기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도선이 일러 주었다는 풍수설과 비보설을 현실에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궁예를 몰아내고 쿠데타를 하는 과정에서 반발세력이 나타났다. 또한 궁예의 휘하에 있던 홍성 등 10여 군현이 후백제에 투항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예정론 조작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왕건이 30세에 꿈을 꾸었는데, 바다에 9층 금탑이 솟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신라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 나라의 융성을 빈 끝에 삼한을 통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왕건이 이를 연상하여 이 꿈 이야기를 은밀하게 부하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기록에 올려졌겠는가? 918년의 일이니 이때는 궁예가 쫓겨나기 직전이었다.
이 무렵 도성인 철원에 당나라 장사꾼 왕창근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철원 저잣거리에 생김새도 괴이하고 수염이 새하얀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도사의 관을 쓰고 왼손에는 주발, 오른손에는 거울을 들고 다녔다. 왕창근이 그 거울을 팔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쌀 다섯 말을 주면 팔겠다고 대답했다. 그 도사는 쌀을 받아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왕창근이 그 거울을 벽에 매달아 놓자, 햇빛이 비쳐 거울 안에 들어 있는 가느다란 글자가 드러났다.
삼수(三水) 가운데 사유(四維) 아래
상제께서 진마(辰馬)에 아들을 내려보내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치리라.
사년(巳年)에 두 용이 나타나는데,
한 용은 몸을 푸른 나무(靑木) 속에 감추고
한 용은 그림자를 검은 쇠(黑金) 동쪽에 드러내리라.
지혜로운 자는 보고 어리석은 자는 까막눈이다.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려 정벌하리라.
왕창근이 거울을 궁예에게 바쳤고, 궁예는 신하를 시켜 왕창근과 함께 거울 주인을 찾게 했지만 한 달이 되어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 동주(東州, 동쪽 고을)의 한 절에 있는 석가여래의 모습에서 빛이 났고 그 앞에 소상(塑像)이 놓여 있는데, 왼손에는 주발을 들고 오른손에는 거울을 든 모습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궁예는 매우 기뻐하며 문사들을 불러 글귀를 풀이하게 했다. 문사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렇게 풀어냈다.
삼수(三水)는 태(泰)자를 풀어놓은 것이니 태봉을 가리키고, 사유(四維)는 나(羅)자를 풀어놓은 것이니 신라를 가리킨다. 진마(辰馬)는 진한 마한이고 닭은 계림(鷄林)이고 오리는 압록강이다. 이를 다시 풀면 태봉과 신라의 시대에 상제께서 아들을 진한 마한의 땅에 내려보내 먼저 신라를 멸망시키고 이어 압록강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용은 왕을 상징하니 앞의 성은 왕씨 성을 가진 왕건이고 뒤의 용은 현재의 왕인 궁예이다. 청목은 소나무로 송악군을 말하고, 흑금은 무쇠로 철원을 말한다. 곧 뱀의 해에 송악 출신의 왕건이 몸을 숨기고 철원에 도읍한 궁예가 허깨비가 될 때에 지혜로운 자는 알아보고 어리석은 자는 못 알아보는데 구름과 비를 몰고 와서 여러 사람과 통일을 이룩한다는 뜻이다.
이 설화는 구도가 잘 짜여져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쌀 다섯 말’은 당나라에서 유행했던 오두미교(五斗米敎)를 나타낸다. 오두미교는 쌀 다섯 말을 바치고 들어오면 신선이 되는 복을 짓는다고 떠들었다. 오두미교도들은 황소의 난에 편승하여 변혁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고대에는 거울을 지혜의 상징물, 통치자의 상징물로 여겼다. 거울의 주인인 도사를 부처의 제자로 설정한 까닭은 궁예가 미륵을 자처하고 있던 터라, 불교 이미지를 결부시켰다.
그리고 당나라 상인을 메신저로 내세워 여러 세력이 왕건을 추대한다는 복선을 깔았다. 왕건의 조상은 상인세력으로 중국 상인들과 교류했다. 그 매개자를 당나라 상인 그리고 왕씨로 꾸민 것은 심상치 않다. 뱀의 해는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이 죽고 왕건이 좌천하던 해인 정사년(897)을 뜻한다. 이해에 왕건의 부하들이 많이 이탈하여 세력이 한풀 꺾인 적이 있다. 또 ‘구름과 비’는 《주역》 ‘건괘 구오(九五)’의 풀이에 나오는 글귀인 “운종룡(雲從龍) 풍종호(風從虎)”에서 빌려 온 것이다. 구오는 왕의 자리를 상징한다. 구름과 비는 임금을 상징하는 용의 조화요, 바람은 용맹을 나타내는 무장(武將)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불교 · 도교 · 유교의 내용이 두루 깔려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당시에 풍미하던 도참비기를 잘 이용했다. 흔히 비기의 풀이는 파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도참설은 천지 이치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결정론이 중심을 이룬다. 여기에 오행설을 가미했다.
이 설화는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운명론 또는 결정론이 깔려 있고, 당시에 유행하던 민간사상이 집약되어 있었지만 앞 시기의 건국설화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든지 알에서 깨어났다는 따위의 황당한 설정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엮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역사 추진의 주체를 인간으로 둔 점도 드러내고 있다.
문사들은 이 일을 궁예에게는 거짓으로 뒤집어서 보고했다고 한다. 왕건을 추대하는 세력들은 이와 같이 치밀하게 상징조작에 나섰다.
종교와 사상을 초월한 인재 등용
왕건은 나라를 빼앗은 지 1년쯤 지난 919년에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다. 이때 최치원은 경주 금오산에서 글을 읽으며 조용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왕건이 일어나 송악에 도읍을 정했다는 말을 듣고 이런 구절이 있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계림은 누런 나뭇잎이요
鷄林黃葉
곡령은 푸른 소나무로다
鵠嶺靑松
말할 것도 없이 계림은 신라이고, 곡령은 왕건의 집이 있던 뒤쪽의 마루이다. 누런 나뭇잎은 떨어지는 잎으로 쇠락을 말하고, 푸른 소나무는 한창 푸르러 강성함을 뜻한다. 신라 왕이 이 말을 듣고 꺼려하자 최치원은 가야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이것도 도선을 이용한 것처럼 최치원의 행적에 결부시켜서 짜맞춘 것이 아닐까?
왕건은 철원에서 팔관회(八關會)를 대대적으로 벌여 단합대회를 했다.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뒤에는 3개월에 걸쳐 송악 안에 법왕사 · 자운사 · 왕륜사 · 내제석사 · 사나사 · 천선원 · 신흥사 · 문수사 · 원통사 · 지장사 절을 지었다. 또 자신의 옛집을 보시하여 광명사를 짓게 했으며 신중원 · 흥국사 등을 창건했다.
이들 사찰은 모든 종파를 망라하고 선원과 무속까지 포괄한 안배인 것으로 보인다. 즉 호국불교를 제창한 것이다. 이렇게 불법과 도참설을 빌려 인심을 통합하고 이미지를 조작했지만, 신라는 투항하지 않았고 후백제의 도발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왕건의 통일의지와 노력은 참으로 가상했다. 왕건은 불교세력의 통합과 여러 사상의 융화와 호족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마침내 통일을 이룩했다. 궁예와 진훤보다 의식은 물론이고 인물을 포섭하는 행동반경이 훨씬 넓었다.
왕건은 건국 초기에는 당나라 유학을 다녀오거나 신라의 명망가인 최언위 · 최은함 · 최승로 등을 측근에 두어 정책 결정에 참여시켰다. 이들은 불승이 아니라 유학자였다. 한편 최치원도 고려를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들은 대체로 호족이거나 호족과 연결된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호족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는 역할을 했다.
전국에 27명의 부인을 두다
왕건은 호족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두 가지 정책을 폈다. 그는 유력한 인사들에게 왕가 성을 내려 의사(擬似) 일가를 만들었다. 당시에 본관을 만드는 풍조가 일었는데,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왕건은 명주(오늘날의 강릉) 장군 순식에게 왕렴(王廉)이란 성명을 내렸고, 발해의 왕자 대광현이 망명해 오자 왕계(王繼)란 성명을 내렸다. 이러면서 혈통이 다른 왕족이 급속히 늘었다.
다음은 혼맥을 통해 묶었다. 왕건은 종친의 딸들을 유력한 세력의 집안으로 시집보냈다. 대광현도 종친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맏사위로 삼기도 했다. 경순왕의 조카딸은 왕건의 부인이 되었다.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왕건은 임금이 되기 전에 두 왕비를 두었다. 한 사람은 개성 부근의 호족인 천궁의 딸 유씨로 그녀가 첫 아내이다. 그리고 그가 장수로 나주에 출정할 때 오가 성을 가진 평민의 딸을 통해 아들을 얻었다. 그는 오씨 처녀와 잠자리를 하면서도 자식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들(뒤의 혜종)이 태어나자 어쩔 수 없이 아내로 맞이했다. 그의 아내로 호족이 아닌 경우는 오씨가 유일하다.
그는 지방을 쉴 새 없이 순회하면서 호족의 누이나 딸을 아내로 들였다. 그리하여 왕건은 27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녀들의 출신 지역은 전국에 고루 나누어져 있었다. 부인들의 호칭은 그 지역 이름을 따서 붙였지만 모두 부인이라 호칭하게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다. 앞에 두 왕비를 두었다고 하나 유씨는 조강지처요, 오씨는 왕위를 이을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 구분해 불렀던 것이다.
이렇듯 왕건은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 통일 고려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호족세력과 불교세력을 통합하여 지원을 얻었고 새 이미지를 조작해 대중을 포섭했다.
민족성을 내세운 통일왕국 고려
왕건은 민족사에 세 가지 업적을 남겼다.
하나는 첫 통일국가를 실현한 것이다. 옛 조선 이후 우리 민족은 통일국가를 이룬 적이 없었다. 한 민족이 같은 문화와 풍습과 언어를 쓰면서도 지역을 분할해 각기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후기신라는 부분적인 통일을 했다. 하지만 고려는 적어도 우리 민족의 완전한 통일국가를 세웠다.
둘째로 그는 대륙정신의 구현자였다. 고려라는 나라이름이 상징하듯, 고구려의 옛 땅 회복을 열망했고, 그런 의지를 발해 유민과 함께 실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강력한 신흥국가 거란족에 막혀 발해까지 포용하는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대동강에서 청천강 그리고 압록강으로 통치권을 차츰 넓혀 신라의 반도기질을 완전히 없앴고, 오늘날의 국경을 대부분 확보했다. 하지만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 중(韓中) 국경문제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셋째는 문화적 사대주의를 배격한 것이다. 그는 나라와 풍속이 다른 당의 제도를 모방하지 말라고 훈계했다. 즉 고려의 민족자주사상을 고취한 것으로 그 정신이 뒷날 묘청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정책에는 문제점도 있었다. 그는 도선(道詵)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은 탓인지 풍수지리설을 지나치게 믿었고, 불교세력에 힘을 얻은 탓인지 지나치게 불사를 장려했다.
후백제에게 많은 시달림을 받은 것을 마음에 두고 차령산맥 이남은 지세와 산형이 배역(背逆)하다고 하여 이곳 출신의 등용을 억제하는 지방차별의 꼬투리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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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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