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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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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2년 |
신교육 운동을 벌이는 선비
성균관대학교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매년 심산학술상(心山學術賞)을 수상하고 있는데, 해마다 수상 대상자에 대해 학문적 업적뿐 아니라 행동과 지조를 엄격히 심사한다. 이러한 기준이야말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의 삶을 단적으로 표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상식 자리에서 갖는 학술발표의 주제가 ‘근대민족운동’과 ‘실천적 유학사상’ 등이니 이런 분위기를 알 만할 것이다.
심산사상연구회에서 정리한 글에서 “심산은 민족주의자로 자명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것과 일제에 대하여 철저한 비타협 불복종은 말할 필요도 없고 해방 후에는 민족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독자적인 노선을 천명했고, 그 뒤 계속 분단에 대한 통한과 통일에의 염원을 잠시도 잊지 못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장우단탄(長吁短歎)을 그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그의 민족주의는 유학의 대의명분론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요, 또 근대시민적 내셔널리즘과는 다소 체질을 달리할지 모르지만 그 정신은 우리나라 역사의 변혁과 창조 속에 중요한 줄기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가 민족을 위해 침략 항쟁에 나서고,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통합운동을 벌이고, 민주실현을 위해 반독재에 나선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그의 생애는 대개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시기는 그가 태어나서 중국으로 망명하기 직전인 1918년까지에 해당된다. 그가 조선시대 유학자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종손으로 태어난 것은 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비집 종손의 범절을 익혔다. 그는 같은 마을에 사는 유림 이승희에게 사사하고, 이웃 고을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출입했는데, 그의 스승들도 범상한 유림이 아니었다. 특히 이승희는 을사조약 뒤 매국오적(賣國五賊)의 청참소(請斬疏)를 올리면서 청년이 된 김창숙을 동참시켰다.
그 뒤 김창숙은 결사운동에 참여하여 구습타파에 나섰으며, 친일단체 일진회를 극렬하게 공격하는 성토문을 발표했다. 한편 국책보상을 위해 단연(斷煙)동맹회의 성주 대표가 되었으며, 신교육을 위해 고향에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했다. 일제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고 친일파는 그를 눈엣가시로 보았으며, 종중과 전통유림들은 신교육운동을 펼치는 그를 사시(斜視)로 보았다.
끝내 나라가 완전히 넘어지자 그는 자포자기의 나날을 보냈다. 양광(佯狂, 거짓 미친 척하는 짓)의 행동을 보이며 술과 도박과 낚시에 빠져 폐인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타이름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아 가학(家學)과 유학공부에 열중했다. 약 10년에 걸친 이때의 공부로 그는 상당한 선비의 교양을 갖추게 되었으며, 유학사상의 진수를 익혔다.
필요한 것은 독립운동
둘째 시기는 중국에 망명했다가 일제에 잡혀 국내로 송환된 때까지에 해당된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그는 상경해서 유림이 민족대표에 빠지고 또 이어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의 장서(長書)를 보내려는 운동이 있음을 알았다. 그 운동은 경상도의 곽종석 계열과 충청도의 김복한(金福漢)계열이 따로 추진하고 있었다.
그는 두 계열이 통합하여 장서운동을 벌이는 데 앞장섰다. 그리하여 137명의 연명을 받았는데, 3백 년 동안 갈라져 왔던 영남과 기호의 학파 그리고 남인과 노론의 당파를 타파한 것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를 성공시킨 그는 직접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갔고, 그곳에서 파리로 가는 대표단 편에 부탁해 우리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에게 전달하게 했다.
그 뒤 국내에서 이 사건이 발각되어 곽종석, 김복한 등 많은 유림들이 체포되는 1차 유림단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광주로 가서 호법정부의 총통인 손문의 협조를 끌어내는가 하면, 상해에서는 중한동지회를 만들어 두 나라의 민족혁명 노선을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가 분열을 거듭하자 그는 활동무대를 북경으로 옮겼다. 북경에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 이회영(李會榮)이 자리잡고 있었고, 동료 신채호도 있었다.
김창숙은 신채호가 간행하는 잡지 《천고》의 편집 일을 보았다. 그 무렵 미국에서 온 박용만(朴容萬)과 북경에 거주하던 김달하(金達河)가 일본의 고급밀정이라는 지목을 받게 되어 의열단과 다물단(多勿團) 단원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에 김창숙이 연루되었고, 또 그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신채호와 독립운동의 성격이나 노선이 일치했다. 그는 신채호와 같이 이승만을 탄핵했으며, 정부 형태보다 운동단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회영, 신채호가 무정부주의운동에 빠지고, 뒷날 동지인 여운형, 홍명희가 사회주의에 관심을 기울이는데도 그는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김창숙은 또 만주땅에 우리 동포를 이주시키고 내몽골에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고 국내에 잠입하여 자금을 모집했다. 그가 돌아간 뒤 영남 일대에 검거선풍이 불었다.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는 사건도 주동자 또는 협조자가 김창숙임을 일제가 알아냈다. 일제는 손을 뻗어 상해 영국 조계(租界)에서 그를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했다. 이것이 2차 유림단사건이다.
앉은뱅이의 항일의지
셋째 시기는 국내의 감옥생활과 8·15를 맞이할 때까지에 해당된다. 그는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앉은뱅이가 되었는데 이로 해서 ‘벽옹(躄翁)’이라는 새로운 호를 얻게 되었다. 14년형을 언도받은 그는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일시 형집행정지도 받았으나 기나긴 수형생활을 해야 했다. 김창숙은 감옥에 있으면서 감방의 규칙을 거부하는 것으로 불복종의 신념을 지켰다. 어느 날 전옥(典獄)에게 절하지 않고 멀거니 쳐다보았다고 잡범감방으로 쫓겨나는 처벌을 받자 이런 시를 남겼다.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으라니
어찌 차마 말하랴.
분통의 눈물이 창자를 찢는구나.
대전형무소에서 동지인 안창호, 여운형과 함께 감옥생활을 하게 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는 꿋꿋하게 7년을 버티다가 끝내는 병세 악화로 형정지 조치를 입어 풀려났다. 그 뒤 그는 창씨개명 강요에 끝까지 버티었고 일제의 패망이 짙을 무렵 비밀조직인 건국동맹의 남조선책으로 추대되었다. 이로 해서 1945년 8월 고향 성주에서 다시 잡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해방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통일을 염원하는 딸깍발이
마지막 시기는 해방 뒤 통일운동과 반독재투쟁을 벌일 때까지에 해당된다. 해방 이후 현실대처를 놓고 좌우익은 물론 우익 내부에서도 심한 분열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는 잠깐 건국동맹에 가담했다가 탈퇴했다.
그는 민주의원의 한 사람이었으나 미군정 당국에 맞서 반탁활동을 벌였고, 계속해 남쪽의 단독선거 실시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남북협상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성명서를 7인 거두 곧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와 김창숙의 이름으로 발표하여 그 확고한 노선을 천명했다.
그는 정치수완이라든가 술수 따위를 몰랐기에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성균관의 재건과 성균관대학 설립에 몰두했다. 또 유도회를 조직하여 이른바 일본을 받들던 ‘황도유림(皇道儒林)’을 성균관에서 내몰았다.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때로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때로는 공개장을 보내어 규탄했다. 그런 탓으로 몇 차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특히 1951년 피란 수도 부산에서 발표된 ‘경고 대통령하야문(警告大統領下野文)’은 피란 수도 부산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의 통일염원과 반독재의 참뜻은 다음의 시구에 잘 드러나 있다.
북의 김일성, 남의 이승만, 죽을 적에 통일의 평화를 기약하리. 묻노니 제국의 앞잡이여, 붉은 사냥개여, 백성을 속이고 나라를 엎어서 무엇하려 하느뇨.
그의 선비기질 또는 지사의 풍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글이다.
김창숙은 불구의 몸으로 서울에서 객지생활을 하면서도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해 친지의 집이나 여관, 병원을 전전했다. 그는 만년에 쥐꼬리만한 연금으로 살았는데 한번은 자유당 국회의원이 생활비를 건네주자 더러운 돈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한다. 꼿꼿한 딸깍발이 선비기질을 남김없이 보인 삶이었다.
김창숙은 중앙의료원에서 의식이 가물거릴 적에 “통일이 안 되어서······, 유림이 잘해 나가야······”라는 끝을 맺지 못한 말을 남겼다. 바로 그의 마지막 염원은 통일에 있었던 것이요, 그 통일이 이룩되는 길은 남북의 ‘김’과 ‘이’가 죽어야 한다지 않았는가?
그에게도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성리학의 공담(空談)을 경계하면서도 삼강오륜과 도의를 최우선 가치로 본다든지, 구습타파를 외치면서도 어머니의 복상을 뒤늦게야 입었다든지, 마지막 현실타개의 기대를 유림에게 걸었다든지 하여 봉건가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또 그의 민족주의를 유교의 도덕률과 연결시켜서 근대적 내셔널리즘과는 상충되는 내용을 보였다. 그러나 반식민 반독재 투쟁과정에서 보인 그의 꿋꿋한 정신과 기개는 분명 미래의 변혁과 사회창조에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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