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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이헌길

李獻吉

정약용을 살린 천연두 전문의

실학의 시각으로 천연두를 보다

예전엔 천연두가 한번 돌면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살아남아도 곰보 같은 자국이 남았다. 나라에서도 천연두는 염병과 함께 격리하는 것 외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몰래 이것을 다스리는 공부를 거듭한 끝에 많은 사람을 살린 인물이 있었다. 조선 영조 때의 이헌길(李獻吉)이다.

이헌길은 경기도 광주에서 살았다. 그의 조상은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이다. 덕천군 가문에는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李景奭) 같은 인물이 있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과격파 소론으로 기울어져서 그가 태어날 때쯤에는 형편없이 몰락해 있었다. 변변한 벼슬자리도 없었고 토지도 많지 않았기에 생활이 어려웠다.

그는 어릴 때 글을 익히면서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한 고을에 사는 실학자 이길환(李吉煥)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길환은 실학의 권위자인 이익이나 이가환과 한 집안이었다. 이런 스승에게서 글을 배웠으므로 그의 학문이 실질적인 경향을 띤 것은 당연했다. 특히 그는 두진(痘疹, 천연두)의 처방을 공부했다. 이 분야에 스승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혼자 옛 책을 읽고 연구를 거듭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이 일을 떠벌리지 않았기에 주위 사람들은 그의 실력을 알 턱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여러 의서와 경험으로 얻은 지식을 모아 《마진기방(痲疹奇方)》이라는 책 한 권을 엮었다. 이 책의 내용은 병 증세와 처방을 아울러 적은 것으로, 그가 직접 보고 겪은 일들을 위주로 엮었다. 곧 임상을 통해 터득한 지식을 민간에서 손쉬운 방법으로 고칠 수 있도록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세상에 공포하지는 않았다. 10년에서 30년 주기로 도는 천연두가 갈수록 점점 혹독해지는 것을 보고 어느 땐가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로 책을 간행할 경비도 마련할 수 없었다.

한편, 그의 인물과 성격을 두고 정약용은 “담대하여 예의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모습은 파리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주부코였다. 항상 웃으며 남들과 농담을 잘했다”(《여유당전서》 〈이헌길전〉)고 썼다. 그는 꼼꼼한 성격은 못 되었고, 재산을 모을 위인도 아니었던 것이다.

구름같이 모여든 천연두 환자들

1775년(영조 51) 봄, 그가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했는데, 마침 천연두가 유행해 사람들이 마구 죽어 나갔다. 그는 이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마침 아버지상을 당해 상복을 입고 있었다. 부친상을 당하면 전쟁터에서도 돌아와 3년 상례를 받드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교외로 나섰을 때 사람들이 시체를 짚이나 가마니 따위에 싸서 지고 가는 모습이 줄줄이 보였다. 잠시 헤아려 보니 100명도 넘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고치는 방술을 알면서도 예법에 얽매여 그냥 돌아간다면 어질지 못한 짓이다.”

그는 다시 서울의 친척 집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치료하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그가 일러 준 방법을 쓰자 곧 죽어 가던 사람들이 차도를 보였고 막 병든 사람은 곧 나았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가 열흘도 못 되어 그가 머물던 집 앞과 골목은 사람들로 넘쳤다. 얼마나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면, 지체 높은 자들은 겨우 수많은 사람들은 뚫고 그를 만날 수 있었지만 지체 낮은 자들은 그가 머무는 방 뜰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더러는 하루 종일 기다린 끝에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밀려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줄을 세우고 순서대로 사람들을 만나 몇 마디 병의 증세를 듣고서 처방을 일러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처방을 일러 주느라 잠 한숨을 못 잤다. 그의 처방대로 치료하면 대개 나았다.

어느 날 그가 다른 집으로 거처를 옮기려고 문을 나서자,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 그를 둘러쌌다. 그리고 그가 있는 곳에 먼저 자리를 잡으려고 아우성쳤다. 그가 가는 곳마다 누런 먼지가 하늘을 가려 사람들이 이 모습만 보고도 이헌길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루는 서울의 못된 젊은이들이 그를 후미진 곳으로 끌고 가서 열쇠를 채우고 가두어 버렸다. 이에 서울 사람들은 그의 행방을 찾느라고 떠들썩했다. 사람들이 그가 있는 곳을 알아내 문을 부수고 그를 구해 냈다. 이때 사납게 생긴 자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그에게 다가와 두들겨 패려 하자 사람들이 이를 막았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부드러운 말로 급하게 처방을 일러 주었다. 그로서는 밀려드는 사람들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밤잠을 못 자는 것은 물론, 처방을 일러 주는 일은 한정 없이 이어졌다. 그러자 그가 새 방법을 짜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처방을 입으로 모두 불러 사람들에게 베껴 가게 한 것이다. 여러 사람이 베껴 갔고 시골에 있는 사람들도 앞을 다투어 알아갔다. 그렇게 일러 준 처방대로 치료하자 사람들이 거의 효험을 보았다. 어느 날 한 아낙네가 와서 남편의 병세를 말하며 애원하자, 그가 말했다.

“남편의 병은 너무 위급하오. 마지막 써 볼 약이 있긴 하지만 그대는 해낼 수 없을 것이오.”

아낙네가 애원했지만, 그는 그 처방만은 알려 주지 않았다. 남편은 이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 아낙은 고통이나 덜어 주자는 심정으로 독약과 술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독약을 술에 타서 마루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먹여 편안히 죽게 하려고 했다. 아낙은 차마 못할 짓이어서 슬픔이 끓어올라 문밖으로 나가 울다가 들어왔다. 그런데 어느새 술잔이 비어 있었다. 남편이 목이 타서 그 술을 마셔 버린 것이다. 아낙은 이헌길에게 달려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남편이 독을 탄 술을 마셨다고 말했다.

“기이하도다. 내가 마지막 처방으로 주려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그대가 해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소. 이제 남편은 살았소. 하늘의 가르침이오, 어서 가 보시오.”

아낙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남편은 깨어나 있었다.

이것은 일화일 뿐이지만, 그가 벌인 일의 정황을 알려 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이렇게 살려 낸 많은 사람들 중에 다산 정약용이 있었다. 정약용의 나이 13세 때였다. 정약용은 뒷날 이헌길이 살린 수많은 아이들 중에 자신도 있었다고 썼다.

나도 그가 살려냈다

정약용은 12년 후에 또다시 크게 천연두가 번질 것이라는 이헌길의 예언을 염두에 두었다. 정약용은 과연 그의 말대로 1787년(정조 11)에 천연두가 크게 번진 사실을 썼다. 만약 그때 정약용이 죽었더라면 오늘날 우리 역사에서 위대한 사상가 하나를 잃게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입으로 일러 준 처방이 민간에 널리 나돌았다. 오늘날에도 《마진기방》이라는 책이 남아 있는데, 이본(異本)이 많고 내용이 같지 않은 것은 아마도 여러 사람이 베낀 탓일 것이다.

을미 홍진방

이 책은 저술 시기가 확실하지 않은 이헌길의 필사본으로 여러 책을 참고하거나 편집한, 마진에 관한 의서이다. 인쇄본으로 전해지지 않고 필사본으로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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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약용은 귀양살이를 떠나기 전인 1798년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로 하여금 내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려 준다면 반드시 집에서는 무기를 수리하게 하고 고을에서는 성을 쌓게 할 것이다. 전쟁이 어찌 사람을 다 죽이리오. 마진이 사람을 죽임이 비록 가혹할지라도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면, 내가 이 책을 만드는 것이 몽수(蒙叟, 이헌길의 자)의 공임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마과회통》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사람을 살리는 방술을 제시하는데도 있었지만, 이헌길의 뜻에 따라 은혜를 갚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정약용은 《마과회통》에서, 이헌길이 지은 《을미신전(乙未新詮)》을 곳곳에 인용하며 참고했다.

여기서 인용한 《을미신전》과 《마진기방》은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을미신전》은 이헌길이 직접 쓴 것이지만, 《마진기방》은 전하는 말을 이야기로 옮겼기 때문이다. 다산은 《마과회통》에서 이 분야의 관계 저술을 모두 포함하면서 그중에서 이헌길의 설을 가장 많이 인용해 따르고 있다. 그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몽수에 따르면, 술이 천연두의 열을 발산하는 데 더러 특별한 효험이 있다. 그러나 더운 여름에는 살갗(땀구멍)이 열리고 속열이 많아 열을 발산하는 공은 적고 열을 돕는 해가 많으니 아주 삼가서 술을 쓸 일이다.

천연두와 열과 술, 기후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이헌길은 시대가 갈수록 천연두가 가혹해지면서 “한갓 옛 처방에만 매달려 당시의 운기(運氣)를 살피지 못하면 반드시 사람을 죽일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는 내 처방으로는 천연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뜻에 따라 정약용이 새로 처방책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대개 자기의 처방만이 영원히 옳다고 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는 새로운 처방이 나와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그의 이 말은 지금의 처지에서 봐도 들어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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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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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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