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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임경업

林慶業

신앙의 대상이 된 장군의 눈물

요약 테이블
출생 1594년
사망 1646년

이 작은 나라에 대장부로 태어나다

우리 민간신앙을 살펴보면 최영과 관우, 그리고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이 등장한다. 최영은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기에 조선이 건국된 뒤 개성 사람들이 그 혼백을 신당에 모시고 제를 지냈고, 관우는 중국 장수이지만 임진왜란 뒤 원군을 보내 준 명나라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관제묘 등을 세워 숭배를 권장했다.

그런데 임경업은 어떻게 여기에 끼게 되었을까? 우선 그의 생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경업은 충주 탄금대가 있는 달천강 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윗대에 판서를 지내기는 했지만, 그가 태어날 때에는 영 보잘것없었다. 그는 달천강 주위에서 어릴 때부터 활쏘기 · 말타기로 나날을 보냈고 서당에 다니며 글을 익혔다.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 장군 신립이 배수진을 치고 왜군을 막다가 전사한 곳이다. 신립에 관한 전설은 너무나 많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2년 뒤에 임경업이 태어났으니, 그도 비극의 장군 신립에 관한 전설을 들었을 것이었다.

주변 분위기 탓인지 그는 늘 ‘대장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뿐만 아니라 늘 “내가 천지의 기운을 받아 태어나서 축물(畜物, 짐승)이 되지 않고 사람이 되었으며, 여자가 되지 않고 남자가 되었는데 아깝도다. 이 작은 나라에 태어나 자잘한 일에나 얽매여 일생을 보내게 되었으니······”(송시열 《송자대전》 〈임장군경업전〉)라고 말했다. 이토록 그는 기개가 있고 포부가 컸던 것이다.

임경업 초상화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듣고 모두 원통해했다고 실록의 사관은 기록하고 있다. 비록 53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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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청년이 되어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합격해 관계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낮은 벼슬을 거쳐 1624년(인조 2) 명장 정충신(鄭忠信)의 지휘 아래에 들게 되었다. 이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정충신은 전부(前部) 대장이 되어 질마재(오늘날의 영천고개)에서 이괄의 군사와 맞붙었다. 이때 임경업은 선봉에 나서서 이괄의 반란군을 무찔렀다.

난이 평정되자, 임경업은 그 공을 인정받아 아랫장수로서는 첫 서열에 올라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그 뒤 그는 승진을 거듭해서 낙안군수에까지 올랐다.

혁혁한 공을 세우다

광해군 때와는 달리, 당시 나라 안은 온통 배금열(排金熱, 당시 국호는 후금, 뒤에 청으로 고침)로 가득 차 있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은의(事大恩義) 때문에 명나라와 적대관계에 있던 후금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보인 것이다.

1627년 후금군이 한꺼번에 침입해 왔다. 임경업은 좌영장이 되어 강화도로 달려갔지만 이미 화의가 성립된 뒤였다. 그는 분통을 터뜨리며 “나에게 정병 4만을 준다면 오랑캐들을 무찌르고 압록강 물에 칼을 씻고 돌아올 것이다”라고 외쳤다.

그는 정승으로 있던 김육의 눈에 들어 북쪽 방어사를 맡아 산성을 수축하고 청천강 일대의 방비시설을 치밀하게 갖추는 등 맹활약을 보였다. 명나라가 후금에 투항한 명나라 장수 공유덕 등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했는데, 임경업이 그 업무를 맡아 출전해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자 명나라에서 그에게 총병관이라는 직책을 주었고, 그의 이름이 명나라에까지 퍼져 명나라에 대한 그의 충성심도 더욱 강해졌다. 이런 공으로 그는 국경도시인 의주부윤이 되었다. 의주부윤으로 있는 동안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온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를 해 주었고, 포로로 잡은 명나라 군사를 남몰래 풀어 주기도 했다. 이런 일이 발각되어 파직되기도 했지만 곧 복직되었다.

백마산성

평안북도 의주군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성이다. 이 산성은 특히 1636년의 병자호란 때에 임경업이 이곳을 근거로 하여 싸운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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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이제 그가 벼르고 벼르던 용맹을 떨칠 기회가 온 것이다. 의주에서 적을 막을 계책을 세운 임경업이 군사를 점검해 보니 모두 달아나서 800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충성스런 명장도 이런 형편에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성 주위에 세워 두고 임전태세를 취했다. 적군은 이를 보고 의주성을 돌아 서울로 진격한 탓에 꼬박 10일을 허비했다. 그런데도 조정은 끝내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 청군은 서해의 가도에 있는 명군을 치기 위해 조선 군사의 동원을 강요해 임경업이 조정의 지시에 따라 출전하게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국법에는 남의 성지를 빼앗으면 그곳 재물을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다”는 소문을 청군 쪽에 퍼뜨렸다.

이 말을 들은 청의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선봉에 나섰기 때문에 우리 군사는 뒷전만 따라다녔다. 또 미리 명군의 장수와 내통해 명군의 피해를 줄이게 했다.

그 뒤 그는 무장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평안병사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청나라에서 명나라 땅 금주를 공략하면서 조선에 원병을 요구해 왔다. 이번에도 임경업이 그 소임을 맡았다. 청군은 육로로 들어가고 조선군은 바다로 가기로 했는데, 임경업은 바닷바람을 핑계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배를 일부러 느리게 가도록 해서 약속 날짜를 어겼다.

마침내 바다에서 명군과 싸움을 벌일 때에는 화살촉을 빼고 화살을 쏘게 했고 포에는 흙포탄을 넣어 발사하게 했다. 명군 쪽에서도 조선군에게 화살을 쏠 때에는 일부러 미치지 못할 거리로만 쏘았다. 이 전투는 명군과 조선군 양쪽이 내통해 치른 것이다.

임경업은 헤엄을 잘 치는 수군 두 명을 배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것처럼 가장해 명군에게 헤엄쳐 가서 이쪽 사정을 알리도록 했다. 하지만 속임수는 오래 가지 못했다. 두 나라 사이에 비밀스럽게 알려 준 글이 발각되어 그는 마침내 청나라에 잡혀가게 되었다.

이때 그를 아끼던 정승 심기원은 그에게 남몰래 은전 700냥과 승복, 그리고 머리 깎을 칼을 보내 주었다.

임경업은 청군의 강요로 조선 군사들에게 압송되어 갔다. 그는 수레가 금교역에 이르자 재빨리 몸을 날려 산골짜기로 도망쳐 머리를 깎고 승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회암사로 들어가 승려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포로가 되고 역신이 되고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문책 때문에 그를 온갖 방법으로 잡으려고 했지만, 그는 이 절 저 절로 숨어 다니며 몸을 피했다. 그가 이리저리 떠돌며 염탐해 본 끝에 조정에서 자신을 기어코 잡아들이려는 것을 알게 되어 철저하게 변장을 하고 중국으로 망명할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마포나루로 나와 배 한 척을 세내어 여러 사람과 함께 올라탔다.

1643년 5월, 배가 한강을 벗어나 바다로 나오자 그는 칼을 빼어 들고 외쳤다.

“나는 임경업 병사다. 내가 중국으로 들어갈 작정이니 내 말을 들어라. 만약 거역하면 이 칼로 찔러 죽이리라.”

뱃사람들은 그 기세에 눌려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인조실록》 47권, 24년 6월조) 그가 탄 배는 연평도에 이르렀다. 그곳에 내릴 손님을 내려놓고 배는 황해를 건너 중국에 닿았다. 그 사이 청나라의 문책에 못 이겨 조정에서 그의 부인 이씨를 잡아 보냈는데, 그녀는 선양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칼로 자결했다.

임경업은 중국 땅 해풍도에 닿았지만 곧바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청나라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임경업은 자신의 신분을 알렸다. 이것이 명의 조정에 알려져 그는 북경까지 정중하게 안내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명나라에 마지막 충성을 바칠 길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1644년 명나라는 청나라에 북경이 함락된 뒤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그는 이제 더 버틸 기력도 없었고 기댈 언덕도 없었다.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 온 것이다.

이때 명나라 장수 마등홍이 임경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임경업을 바쳐 공을 세우려 했다. 이 계책에 말려든 임경업은 북경 감옥에 갇히는 포로 신세가 되었다.

그는 청나라에서 내미는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꿋꿋이 버텼다. 그가 이런 고초를 당하고 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일대 옥사가 벌어졌다. 곧 그에게 은전과 승복을 준 심기원이 역적 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것이다각주1) .

심기원을 문초하던 중 임경업을 도망시킨 사실이 발각되었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임경업을 송환해 달라고 요구했다. 청나라는 자기들 손으로 처치하지 않고 조선이 직접 그를 처단할 기회를 얻으려 한다고 생각해 사은사 이경석 편으로 그를 보내 주었다. 그러면서 임경업의 죄상을 낱낱이 적어 보냈다.

임경업은 서울의 감옥에 갇혀 피와 살이 튀는 심한 문초를 받았다. 그는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심기원과 역모를 꾀한 사실이 없다고 항변했다. 친국(親鞫, 임금이 중죄인을 직접 신문함)을 해 본 인조는 그에게 별 혐의가 없다고 여겨 무거운 벌을 내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친청파 김자점 일파는 친명파인 그에게 모진 매를 가하고 죽음의 형벌을 내렸다.

그의 죽음을 들은 인조는 무척 애석하게 여겼지만 헛일이었다. 그는 죽으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조정에서는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나를 죽이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인조실록》 47권, 24년 7월조).

배청열기 속에서 기림을 받다

그의 죽음을 듣고 백성들이 모두 원통해했다고 실록의 사관은 기록하고 있다. 비록 53세의 나이였지만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그가 죽고 난 뒤 김자점도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조정에서는 겉으로는 청나라에 복종하는 체했지만 속으로는 배청열기가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결국 청나라를 치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고, 그 이념조작을 위해 임경업의 행적이 주목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임경업의 무용담을 담은 소설이 유행했다. 북벌론의 주창자이자, 철저한 존명배청론자인 송시열도 《임장군경업전》을 써서 선비들에게 읽혔다. 임경업이 한 시대의 영웅으로 부각된 것이다. 숙종 연간에는 충주 등에 충렬사를 지어 그를 모셨다. 일반 서민들도 신당에 그의 신위를 모시고 복을 구했다.

특히 연평도의 어부들은 고기잡이를 나가면서 어김없이 그를 모신 신당에서 고사를 지내고 뱃길에 나섰다.

조정의 명에 따라 후금과 몰래 통한 강홍립은 역신으로 몰려 죽은 뒤에도 핍박을 받았는데, 조정의 명을 거역하면서까지 명나라와 내통한 임경업은 오히려 기림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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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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