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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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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01년 |
명재상 유성룡의 친형, 뒤늦게 벼슬길에 오르다
유운룡(柳雲龍, 1539~1601)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한 유성룡의 형으로 안동 땅 하회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의 촌로들은 곧잘 “형이 더 훌륭했지”라고 말했을 만큼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유탁과 아버지 유중영은 모두 여러 곳의 수령을 지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여러 번 거처를 옮겨다녔다. 그리고 16세 때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 곁을 떠나 퇴계 이황에게 가서 학문을 익혔다. 이 무렵 이황은 모든 벼슬을 버리고 은둔의 선비로 자처하며 고향에서 제자 기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뒤이어 동생 유성룡도 이황에게 와서 학문을 익혔다.
그는 25세에 첫 과거시험인 향시(鄕試)에 합격한 이래 다시 서울에서 보는 회시(會試)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31세 때 다시 향시에 합격하자, 이황은 너무 과거에 연연한다며 나무랐다. 이때부터 다시 과거를 보지 않았고 벼슬의 뜻을 버렸다. 이와 달리 세 살 아래인 동생 유성룡은 젊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에서 젊은 벼슬아치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이황이 죽고 난 뒤 34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권고에 못 이겨 전함사 별좌(典艦司別坐)라는, 배 만드는 일을 감독하는 한직을 받았다. 이나마도 고관 자손에게 주는 음직(蔭職) 덕분이었다. 그 뒤 한동안 한직을 돌다가 진보현감을 잠시 맡기도 했으며, 1584년 46세 때에 인동현감이 되었다. 동생 유성룡은 판서의 직위에 올라 있을 때였다.
인동현감으로 부임하여 맨 먼저 한 일은 향권(鄕權)을 쥐고 흔드는 양반 토호들을 다스린 것이다. 토호들은 수령의 지방행정에 협조를 한다는 구실로 조세 · 부역 따위에 간섭을 일삼고 그 속에서 특권을 누리며 잇속을 챙기기 일쑤였다. 그는 법대로 일을 시행하면서 토호들의 간섭을 일체 막았다. 당시의 지방 상황은 만일 수령이 토호들의 비위를 거스르면 쫓겨나기 십상이었다. 몇몇 토호들은 그를 두고 온갖 모략중상을 일삼았지만 끝까지 버티며 이들의 횡포를 막아 냈다.
다음에는 토지나 호구에 따라 부과하는 조세 및 곡물 · 부역과 환곡의 출납을 문서로 분명하게 정리했다. 당시에는 이런 조세의 명세를 적당히 적거나 알아보지 못하게 적어 이를 다시 부과하는 따위의 부정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경위표(經緯表)각주1) 를 만든 것이다. 이 경위표 작성에 대해 토호들이 반대하거나 불편하게 여긴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래도 그는 이 일을 꾸준히 밀고 나가 많은 성과를 거두고 그 공평함을 인정받았다.
상급기관인 감사는 다른 고을에도 이 방법을 시행하기 위해 유운룡에게 일을 맡겼다. 그러나 이 일을 추진하던 중 애석하게도 감사가 갈린 탓에 중단되고 말았다. 정약용은 이 일이 중단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목민심서》 〈호전(戶典) 곡부(穀簿)〉에 곡식이 들어오거나 나가는 것, 그리고 남아 있거나 소모된 것을 환히 알 수 있는 경위표를 새로 만들어 제시했다.
이 경위표는 유운룡이 만든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것은 분명하다. 만일 조선 중기, 유운룡이 살아 있을 당시에 이것이 제대로 시행되었다면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 따위의 부정을 막는 데 큰 공헌을 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받은 목민관
그는 6년 동안 인동현감의 일을 보았다. 이때 정여립 옥사가 일어나 자신의 뜻과는 달리 조사관에 뽑힌 탓에 잠시 고을원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옥사가 마무리되자 임금은 다시 그를 재임시켰다. 거의 선례가 없는 조처였다.
7년 동안 수령의 일을 잘 수행하자 서울에 있는 광흥창(廣興倉, 세미의 곡식을 모으는 창고)의 주부로 뽑혀 올라갔다. 그가 인동고을을 떠나게 되자, 고을 백성들은 그를 기려 공적비를 세웠다. 사실 수령들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 거사비를 세우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는데 이것마저 부정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유운룡을 비롯해서, 토정 이지함이나 순암 안정복과 같은 경우는 사뭇 달랐다. 백성들이 그들의 치적을 마음으로 기린 것이다. 그는 서울로 와서 광흥창의 일을 보다가 한성판윤 · 평시서령(平市署令)을 맡게 되었다.
그가 이런 일을 어떻게 해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수령 때의 경험을 살려 백성과 직접 부딪치는 일을 맡았을 게 틀림없다. 말할 나위가 없겠다. 특히 장시를 관장하는 평시서령으로서의 업적을 알려 주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뒷날의 이야기이기는 하나, 그의 동생 유성룡이 서울에서 죽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제대로 초상을 치를 수가 없었다. 그때 평소에 그의 은혜를 입었다는 서울 주변의 상인들 수백 명이 몰려와 초상경비를 대고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만일 유운룡이 부정한 짓을 했다면 이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었을까? 유성룡이 장시의 일을 중시하여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사람은 형밖에 없다고 여겨서 그를 책임자로 임명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1592년 4월, 그의 나이 54세에 임진왜란을 만났다. 임금이 북쪽으로 쫓겨가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동생이 재상의 자리에 앉아 모든 난중의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유성룡은 임금에게 “형의 벼슬을 해임해 달라”고 호소했다. 자기를 대신해 어머니를 돌보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식구들을 데리고 태백산 등지로 피난길을 떠났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했다. 일본군이 잠시 물러가자, 다시 임시로 풍기군수의 자리를 받았고 이어 원주목사가 되었다. 그는 일본군이 잠시 물러가 있을 무렵, 어머니의 병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죽령이 영남 · 호서의 통로로서 일본군을 막기에 좋은 지점이므로 이곳의 방비를 건의하고 그 아래 큰 진을 두자는 상소를 올렸다.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조정에 불러올려 자문을 얻으려고 했으나 몇몇 신하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는 의병 모집에 나서서 왜적 방어의 방책을 강구하기도 하고 뒷날 동생이 주화파로 몰려 곤란한 처지에 놓이자 나라 사정에 비추어 부득이했음을 변호하기도 했다. 그 뒤에도 임금은 그를 승지로 불러올려 곁에 두고자 했지만 과거 출신도 아니고 별 재주도 없다는 구실로 몇몇 신하들이 반대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징비록》의 집필을 돕다
그는 60세가 넘어 조용히 고향 하회에 와서 나날을 보냈다. 이때 동생 유성룡도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와서 임진왜란 경험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징비록》이다.
《징비록》 내용 중 일부는 유운룡의 조언이 담겨 있다. 그는 오랜만에 동생과 함께 지내며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이런 유운룡을 두고 민중들 사이에 많은 일화가 떠돌았다. 유운룡이 도술을 부려 일본 첩자의 혼을 빼 돌려보냈다는 따위의 이야기였다. 유성룡을 큰 인물로 키운 것도 그의 가르침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천문지리에 통달해서 많은 조화를 부릴 줄 아는 도인이라고도 했다.
민중들은 높은 벼슬을 차지하지는 않았던 그를 이렇게 우러러보았다. 오늘날 이권과 부정에 눈이 어두운 많은 공직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명예와 이익을 떠나 민중을 위해 봉사하고 공헌한 유운룡의 삶은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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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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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유운룡 –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 주니어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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