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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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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8년 |
남자 17세에 무슨 일 이루었나
우리 역사에서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무수한 의병들이 등장했다. 그 중에서도 신돌석(申乭石, 1878~1908)은 우뚝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신돌석을 상놈 출신으로 알고 있다. 원래 의병장 아래의 의병들은 대부분 농민이나 종이었다. 이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벼슬이나 돌비 하나 세워주지 않는 것이 왕조시대의 풍조이다.
그래도 상놈 출신이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나라에 몸을 바쳤다면 더더욱 자랑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벼슬을 하지 않은 평민 집안 출신이다.
그는 평산 신씨로,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이들 신씨는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소외되어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돌석의 7대조는 동해에 접한 영해(寧海)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신돌석은 개항 뒤 나라가 어수선할 적에 영해부 복평리(福坪里,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 도곡동)에서 살림이 넉넉한 중농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신석주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50석지기의 재산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해부는 어떤 곳인가? 바로 동해를 접한 경상도의 요충지이다. 이곳에는 늘 왜구들이 몰려와 약탈을 일삼았고 이곳 부사는 수탈을 일삼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태어나기 5~6년 전에는 저 유명한 이필제가 최시형과 함께 영해부 관아를 습격해서 부사를 죽이고 창고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이른바 영해민란이 일어났다.
그가 태어나자 그의 아버지는 천한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주어야 오래 산다는 속설에 따라 ‘돌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본이름은 태호(泰浩)이다. 돌석이라는 이름 탓으로 그가 상놈 또는 머슴 출신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기골이 장대했고 특히 골목대장으로 활약이 눈부셨다. 그는 30여 리 떨어진 서당에 가서 글을 배우고 돌아오면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소년 돌석은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동구나무 밑에서 줄넘기, 뜀질하기 따위 연습을 시켰다. 놀이가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면 동네 가운데로 흐르는 작은 개울을 훌쩍 뛰어넘어 집 안으로 아버지 몰래 뛰어들어갔다.
그의 집은 결코 그에게 밥을 못 줄 형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남의 부엌을 뒤져 밥을 훔쳐 먹고 솥 안에 똥무더기를 싸놓기 일쑤였다. 그뿐이 아니다. 미나리꽝에 돌 던지기, 호박에 침주기 따위의 장난을 서슴없이 했다. 이런 얘기는 그 동네 사는 노인들이 들려준 것이다.
그의 부모는 얼마나 속이 썩었을까? 동네 사람들도 혀를 내둘렀으리라. 그러면서도 글 읽기는 결코 남보다 뒤떨어지지 않았다. 열다섯 살쯤에는 축지법을 익혔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하루 몇 백 리를 거뜬히 걸어다니고 웬만한 작은 언덕은 훌훌 넘는 그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가 아무 뜻없이 놀러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을 익혔다. 어느 날 그는 평해의 월송정에 올라 시를 지었다.
다락에 오른 떠돌이 갈 길을 잊고
조국에 낙목이 가로놓임을 탄식하네
남아 십칠 세에 무슨 일 이루었던가?
잠시 가을바람 맞는 속에 감개가 우러나는구나
범상한 소년(청년 때 것인지도 모른다)이 아님을 알 수 있겠다. 어쨌든 나라는 소란스러웠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바람은 이곳에도 불어왔고, 곧이어 일본의 낭인들이 이 나라의 왕비를 궁중에서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895년의 해가 질 무렵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경상도와 강원도를 누빈 신출귀몰한 의병장
열아홉 살이 되던 해인 1896년 봄, 신돌석은 어릴 적 동무들과 커서 사귄 동지들을 규합했다. 그들은 최신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을 습격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런 전과로 하여 그는 자연스럽게 영해군 의병진(義兵陣)의 둘째 자리인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의병활동은 이 해가 저물 무렵 기세가 죽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를 잡으려는 관군과 일군의 눈이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편한 잠을 잘 날이 거의 없었다. 조금의 낌새라도 있으면 옷을 홀랑 벗고 명주를 아랫도리에 친친 감고 그가 사는 동네에서 5리쯤 되는 고란으로 튀었다. 그 동네에 사는 노인은 “겁이 많기는 많았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명주를 온몸에 감고 뛴 것은 편리한 점도 있지만 명주는 요긴하게 쓰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틈틈이 동지들을 찾아다녔다. 특히 문경의 이강년(李康秊), 박상진(朴尙鎭) 등과 어울려 새로운 의병활동에 대해 의논했다. 이런 속에 청도지방을 지나다가 일군들이 전선 가설하는 꼴을 보고 공병 다섯 명을 때려눕히고 전선을 뽑아버리기도 했으며, 부산항으로 잠입하여 일본 배 한 척을 뒤집어엎기도 했다 한다. 일본군은 그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고 이때부터 그의 목에 많은 상금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
1905년에 이른바 을사조약으로 이 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또다시 의병항쟁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그는 재산을 팔아 북평리의 동지들을 모으고 대장기를 앞세우고 일어났다. 그 대장기에는 ‘영릉의병장(嶺陵義兵將)’이라 씌어 있었다. 그의 막하에 모인 300여 명은 영해부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리고 이어 울진으로 짓쳐 올라가 바다에 떠 있는 일본 병선 아홉 척을 쳐부쉈다.
1907년 들어 그는 강원도에서 다시 경상도로 들어와 많은 의병을 모았다. 그의 휘하는 이제 3천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신돌석의 용기와 전술과 담력이 이때 한껏 발휘되었다. 신돌석 의병부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징과 꽹과리를 울리며 기습을 감행했다. 마침내 청송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퇴각하고 영양의 일본군과도 격전을 벌여 몰아냈다.
신돌석의 명성이 자자하자 구식군대 군인을 비롯해 각지에서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부대는 신출귀몰했다. 진보를 거쳐 벌인 경주전투에서 총탄이 그의 엄지손가락을 관통했으나 그는 아무런 기색을 보이지 않고 항전하여 많은 적을 생포하기도 하고 사살하기도 했다. 그의 발길은 평해, 영해, 청송, 영덕, 영양, 진보 등 경상도 바닷가를 휩쓸었고 위로 강원도 일대에까지 뻗쳤다. 이 무렵 그에게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07년 겨울 전국의 의병들이 연합하여 서울로 진격했다. 그도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경상도 동해 일대의 의병대표로 이 전투에 참여했다. 그가 양주(지금의 구리시 언저리)에 도착해서 의병을 편성할 적에 13도 총대장으로 이인영(李麟榮)이 추대되었고 각지의 의병장으로 부대를 편성했다. 그런데 신돌석은 이 진용에서 빠져 있었다. 썩은 양반들이 평민 출신인 그를 의병장으로 삼을 수 없다고 제외시켰던 것이다. 도대체 나라를 찾자고 싸우는 판에 무슨 양반 평민의 구별이 있는가?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그의 구국항쟁의 기세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민중의 영웅으로 영원히 살아남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영해 일대를 해방지역으로 만들고 일월산, 백운산 일대를 거점으로 항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추운 겨울이 닥쳐오자 의병들도 많이 흩어지고 군량미도 부족한 상태여서 더 지탱할 수가 없어 신돌석은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다음해 봄에 다시 기의(起義)하기로 했다. 1908년 겨울, 운명의 계절이었다.
그는 영덕 눌곡(訥谷)으로 옛 부하이자 고종사촌인 김상열(일명 김자성)을 찾아갔다. 그를 맞이한 김상열 형제는 음모를 꾸몄다. 신돌석의 시체를 일본군에 바쳐 상금을 타려는 속셈이었다. 그들은 얼굴에 반가운 기색을 띠고 독주를 만들어 신돌석 앞에 내놓았다. 추운 겨울, 신출귀몰의 장수는 말술을 들이켜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김씨 형제는 도끼를 들고 그의 몸을 내리쳤다. 아무리 역발산의 장수라도 이런 상황을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이때의 일을 두고서 대체로 두 가지 말이 전해진다. 도끼를 맞은 신돌석이 바깥으로 뛰어나가 산 속으로 사라졌다고도 하고, 머리가 방안 대들보에 붙었다가 떨어졌다고도 한다.
신돌석은 무수한 일화를 남겼고 전설 같은 얘기들을 심어놓았다. 이런 것은 그를 기리는 민중들의 동경의 표현이자 그를 영웅으로 받들려는 의지의 소산일 것이다.
김상열 형제는 그의 시체(또는 머리)를 떠메고 일본군대로 갔다. 그리고 ‘신돌석의 머리’라며 상금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일본 군대의 장교는 “사로잡아 오라고 했지 죽이라고 했느냐”며 불호령을 내리고 이들을 쫓아보냈다. 민중의 영웅인 신돌석을 죽였다고 상금을 주는 것이 그들 일본군으로서는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도 내심으로는 동족으로서 영웅 신돌석을 죽인 것을 경멸했을 것이다. 이들 형제는 받지도 못할 상금에 눈이 어두워 역사의 죄인이 된 것이다.
오래 전 태백산맥을 돌아 일월산으로 가서 그의 유적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일월산에는 돌비 하나 없었고 그의 유적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영덕 읍내에 그의 유적비가 하나 세워져 있고, 그가 살던 마을 앞에 그의 동생이 세운 유허비 하나가 덩그렇게 서 있다.
그가 태어난 도곡리를 찾아들자, 그의 생가도 헐어 없애버렸고 그가 올라가 놀던 동구나무도 없어졌다.
이 마을에 신씨들이 10여 집 살았는데 일제시대에 모진 고초를 받았으며, 이 마을 사람들 역시 많은 고난을 겪었다 한다. 그런데도 뒷사람들의 푸대접이 너무 심했다. 다만 그의 얘기가 먼 태곳적 전설처럼 민중들의 가슴 속에 담겨 있을 뿐이다.
1993년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을 수여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1995년에는 그의 생가를 복원해 유품을 전시하고 추모공원을 만들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뒤늦게야 선양사업을 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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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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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신돌석 –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 주니어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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