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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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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42년 |
관노에게 벼슬을 내리다
세종이 왕이 되면서 조정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세종은 학문에 열중하면서 새로운 문화정치를 펴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과학을 크게 일으키려고 재주 있는 인재들을 발탁했다. 세종은 1420년(세종 2)에 천문학자 4명을 서울에 가까운 각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필요할 때 그들을 조정에 불러올려 천문학을 연구하게 하고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도록 했다.
이때 문신들이 들고일어나 ‘하찮은 자’들에게 수령자리를 주었다고 반대했다. 그러자 세종은 당시 자연재해가 일어난 일을 빗대 신하들에게 이렇게 꾸짖었다.
“이들 무리만이 여러 날 밤낮으로 몸에서 띠를 풀지 못하고 눈을 붙이지 못하면서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였다. 혹시라도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내 결코 천상(天象)에 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너희들이 편안히 앉아 잘 먹고 노는 것에 비할 수 없으니 번거롭게 방해 말고 빨리 이들을 부임케 하라.”(《연려실기술》 〈천문전고〉)
세종은 벼슬아치들을 누르고 오히려 천문학자들에게 해마다 겨울옷을 내려 주고 달마다 술 다섯 병을 선물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세종은 이 일이 있은 1년 뒤에 천문학자인 남양부사 윤사웅과 부평부사 최천구, 그리고 동래의 관노(관아에 딸린 종)인 장영실(蔣英實, ?~1442)을 불러 천문학 기구(혼천의)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천문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세종은 이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대단히 흡족해 했다. 특히 장영실에 대해 “비록 지위가 낮으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종은 장영실을 포함한 이들 천문학자들을 중국에 보내 관련 서적을 사오게 하고 보루각(물시계의 일종)과 혼천의(천문관측기계)의 설계도 등을 익히고 돌아오게 했다.
그렇게 이들은 중국에 가서 많은 과학지식을 배우고 1년 뒤에 돌아왔다. 이때에도 장영실은 종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연려실기술》 〈천문전고〉)
이들이 중국에서 돌아오자, 세종은 본격적으로 물시계와 천문관측을 위한 기구를 설치하게 했다. 그동안 눈치를 살피던 세종은 그제야 장영실의 종 신분을 벗겨 주고 상의원(궁중의 옷을 만드는 기구)의 별좌라는 벼슬을 내리려고 했다. 그래서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과 함께 상의했다.
허조가 말했다.
“영실은 기생의 아들이니 그런 자리에 임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조말생의 의견은 달랐다.
“이처럼 천한 출신에게 벼슬을 주기에는 상의원 자리가 마땅하겠습니다.”
세종은 원래 신하의 말을 존중한 탓에 더 이상의 논의를 그치고 그에게 벼슬자리 주는 것을 뒤로 미루었다.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료를 섭렵하다
그러면 장영실은 어떤 내력을 지닌 인물일까? 오늘날 그의 어머니가 기생이었고, 그가 동래관아의 종이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없다. 그는 아마도 동래부에서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었을 것이다.
그가 장인으로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며 뛰어난 과학적 소질을 발휘해서 조정에까지 소문이 났을 것이다. 처음 태종이 그를 중앙으로 불러올려 궁중에서 일을 보게 했다는 말이 전한다(《태종실록》). 그러다가 과학인재를 찾고 있던 세종의 부름을 다시 받아 큰일을 맡게 된 것이다.
장영실은 혼의성상도감(渾儀成象都監)에서 3년을 노력한 끝에 물시계와 천문기구의 골격을 만들어 냈다. 세종은 이를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장영실은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이 일을 해낸 것이다.
1425년 세종은 “기특하다. 훌륭한 장영실이 중한 보배를 성취했으니 공이 으뜸이로다”라고 말하며 장영실의 종 신분을 벗기고 첨지 벼슬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서울에 있으면서 물시계 연구에 열중하라고 했다.(《연려실기술》 〈천문전고〉)
이제 장영실은 관에 소속된 장인 신분에서 벗어나 동래에 가지 않고 마음 놓고 궁중에서 연구와 발명에 열중하게 되었다. 궁중에 출입하며 태종 · 세종의 눈에 든 지 10여 년 만에 봉건제의 신분을 극복하고 어엿한 벼슬아치이자 과학자로 대우받게 된 것이다. 그는 7년 동안 간의대를 만들어 서울의 위도를 측량하고 혼천의와 자격루(자동 물시계)를 최초로 완성하는 등 마음껏 과학적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공은 선배인 이천(李蕆)을 뛰어넘었다. 세종은 마침내 그에게 상의원 별좌(別座)라는 벼슬을 내렸다. 종5품에 해당하는, 지방의 큰 고을 수령보다 한 단계 높은 자리였다. 이때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영실의 사람 됨됨이가 재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성품이 총명하기가 누구보다 뛰어나 매양 내 옆에서 강론했고 또 내시를 대신해서 내 분부를 전달하는 일도 맡아 보았다. 그러나 이런 것이 어찌 공이 되겠느냐? 지금 자격루를 만들어서 내 분부를 잘 받들었도다. 이 사람이 만든 것은 원나라 순제 때의 것보다 뛰어나다. 영실의 정교함이 만세에 전할 기계를 만든 것이다.
- 《세종실록》 61권, 15년 9월조
참으로 그의 재능을 알아주고 극찬한 것이다. 세종이 그에게 단계를 높여 호군(護軍, 정4품)이라는 벼슬을 내리려고 하자 이번에는 정승인 황희도 이에 적극 찬성했다. 장영실은 기운을 얻어 노력을 더욱 아끼지 않았다.
다음 해 그가 만든 자격루를 궁궐 주변 요소요소에 설치했다. 이 자격루는 12시간을 알려 주는데, 시간마다 저절로 종이 울리고 밤에는 통행금지를 알리는 북이 울리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이를 완성해 각지에 설치하자, 세종은 큰 잔치를 베풀고 장영실의 공을 치하했다.
세종은 장영실에게 술잔을 건네며 마음껏 취하라고 분부하면서 흡족한 웃음을 띠었다. 모든 벼슬아치들도 이때만은 그의 재주를 마음껏 기리며 경탄해 마지않았다.
거듭되는 과학 도전
장영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격루는 시간을 알려 주는 역할만 했고,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데만 쓰이는 천문기구였다. 그래서 장영실은 이 두 가지를 합쳐서 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보듯, 또 절기에 따른 태양의 위치를 직접 눈으로 헤아리며 농촌에서 해야 할 농사일을 궁중에서도 볼 수 있게 물시계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전상운, 《장영실-이조의 갈릴레오》).
세종은 그의 이런 치밀한 계획을 허락했다. 그는 마침내 4년의 노력 끝에 1438년(세종 20)에 흠경각 안에 자동 물시계인 옥루를 완성했다. 높이가 7척이나 되는 종이산을 풀로 붙여 쌓고, 산허리에는 구름이 떠 있으며 절기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해가 뜨고 진다.
이 속에서 옥녀들이 금방울로 시간을 알려 준다. 그때 같은 시에 해당하는 시신(時神, 12간지의 띠와 같은 것)이 구멍을 열고 앞으로 나타난다. 또 시간마다 방위도 알려 주고 시(時)와 그 아래 경(更) · 점(點)마다 종 · 북 · 징을 치도록 장치했다(《장영실-이조의 갈릴레오》).
이 모든 장치가 저절로 쳐지면서 움직이도록 한 것이다. 장영실은 중국과 아라비아의 모든 자료를 연구하고 검토해 자신의 독창적인 시계를 완성한 것이다. 이 옥루는 우리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이었다. 세종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계속 새로운 임무를 맡겼다.
그는 장인공이라 불릴 정도로 궁중에서 쓰이는 여러 물건을 제작했다. 박연이 세종의 분부를 받아 음악의 율을 정했는데, 그 악기를 장영실이 제작했다. 중종 재위 시기 우찬성인 이장곤이 당대의 악기 제작이 잘못된 것이 많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전에 들으니 장영실이 적당한 시대에 난 탓에 제작한 성음(聲音)이 아주 신묘했는데 소리를 들어 보고는 고치고 이모저모 살피면서 바로잡아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아주 신묘했다고 합니다.
- 《중종실록》 36권, 14년 7월조
한편 그는 다른 일도 보았다. 이천과 함께 금속활자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1437년에는 김쇄가 서울로 도망와 있었다. 김쇄는 명나라의 기술자로 만주의 야인(여진족의 한 갈래)에게 잡혀 있다가 조선으로 탈출한 것이다. 세종은 김쇄에게 기생을 첩으로 삼게 하는 등 후하게 대우하며, 장영실로 하여금 김쇄의 기술을 모두 익히게 했다. 김쇄는 돌로 금을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장영실은 그의 비위를 맞추며 새로운 과학지식을 얻으려 노력했다.
이때 얼마쯤의 기술을 습득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종과 장영실이 그만큼 과학과 기술에 큰 뜻을 두고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김쇄는 허풍쟁이였고 사기꾼이었다. ‘돌로 금을 만들 수 있다’니 장영실 앞에서 어림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장영실은 옥루가 완성된 뒤 새로운 임무를 받았다. 곧 경상도 채방별감(採訪別監)이라는 직책을 받은 것이다. 경상도 일대의 동이나 철을 조사하라는 임무였다. 그는 경상도 지방을 두루 다니며 동 · 철 탐사에 나서 여러 곳의 동광 · 철광을 찾아냈다. 창원 · 울산 · 영주 · 청송 · 의성의 동과 철, 안강의 연철을 발견해 그것을 채굴해 조정에 바쳤다. 그런 임무를 완성한 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쯤 임금은 그에게 대호군(大護軍, 종3품)이라는 벼슬을 주어 지위를 높여 주었다. 세종의 돌봄은 참으로 지극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그의 이름이 조정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불경죄로 쫓겨나다
그때 세종과 왕비는 온천에 자주 다녔다. 임금이 늙어 병에 골골하자 요양차 온천을 자주 찾은 것이다. 이런 때에 임금이 탈 연(輦, 임금이 타는 가마의 하나)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책임자가 장영실이었다. 그런데 연을 다 만들어 놓고 타 보니 와장창 부서지고 말았다. 새로운 기술로 만든 연이 사람이 타자마자 곧 부서졌으니 그 책임을 따질 수밖에 없었다각주1) .
벼슬아치들은 “옳다. 잘됐구나” 하고 들고일어났다. 그는 의금부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그동안 한 번도 잘못된 일로 벼슬이 떨어지거나 귀양살이 한 일이 없던 그였다. 그런데 이때 사소한 일로 덜컥 갇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때의 잘못은 궁중의 물건을 만드는 공장(工匠)에게 있었다. 더욱이 장영실은 악기도 매우 정교하게 만들 줄 알았는데 단순한 연을 그토록 엉성하게 만들게 했을까? 무슨 음모가 숨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시기 질투를 일삼는 벼슬아치들은 진상을 자세히 캐려고 하지 않고 그를 옭아 넣으려고만 했던 것이다. 이에 그는 물건 만드는 공장인 임효록과 함께 매 80대를 얻어맞고 벼슬도 떨어진 채 쫓겨나고 말았다.
이때 세종은 소갈증과 안질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세자에게 정무를 돌보게 하면서 자신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으려고 했다. 그렇게 총명하던 임금도 나이가 드니 사리에 밝지 못했다.
더욱이 세종은 이 일을 정승 황희와 상의했는데 황희도 장영실의 죄를 인정했다. 황희도 늘 그를 감싸 주었는데, 이때는 마음을 바꾼 것이다.(《세종실록》 86권, 24년 3월조)
그는 불경죄로 궁중에서 쫓겨났는데, 그가 세종의 곁에서 과학연구에 몰두한 지 20여 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궁중에서 쫓겨날 때 그의 머리와 손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발명품인 측우기가 곳곳에 세워지고 있었다. 이 공로도 하찮은 불경죄로 빛을 보지 못했다. 이것이 당시 조정의 모습이었다. 어떤 경우든 임금에 관계되는 불경에 걸리면 여지없이 쫓겨나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던 것이다.
장영실이 그런 풍토를 극복하고 많은 발명을 한 것은 그의 천재적 과학지식과 세종의 배려 덕택이었지만, 끝내 벼슬아치들의 입방아에 희생되고 말았다.
그 뒤 그의 이름은 그의 재주를 기리는 벼슬아치들이 가끔 들먹일 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뛰어난 천재와 과학자를 키울 수 있는 풍토가 못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 우리나라가 낳은 걸출한 과학자로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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