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홍경래

洪景來

지역 차별에 저항한 민중의 넋

요약 테이블
출생 1780년
사망 1812년

백성을 구하는 의로운 깃발

우리 역사에서 민중봉기는 어느 시대에나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일정 기간에 일정 지역을 차지하고 왕조에 저항한 경우는 흔치 않다. 그중에서도 19세기 첫 무렵에 홍경래가 주도한 평안도 일대, 곧 관서지방의 민중봉기는 손꼽을 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홍경래(洪景來, 1780~1812)는 어떤 동기로 민중봉기를 주도했을까? 어떤 계층이 여기에 참여했던 것일까? 그리고 봉기의 과정과 영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이 봉기의 배경과 동기를 알아보기 위해 그가 봉기 초에 내건 격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 격문은 1811년(순조 11) 12월 18일, 10년의 준비 끝에 관군에게 맞서 항거해 가산을 점령한 뒤 그가 여러 고을에 돌린 것이다.

관서대원수(홍경래 자신을 가리킴)는 급급히 격문을 돌리노니 우리 관서의 부로(父老, 나이 많은 어른)와 공사(公私)의 노비들은 모두 이 격문을 귀담아들으시오.

대개 관서지방은 기자의 옛 성이 있고 단군의 옛 터전이어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났고 문물이 빛났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나라를 다시 세운 공이 있었고 정묘호란 때에는 목숨을 바쳐 싸운 충성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저 둔암(遁庵) 선우협(鮮于浹, 조선시대의 평양 출신의 성리학자로 관서 공자라 일컬음)의 학문과 월포(月浦) 홍경우(洪景佑, 학자 문사)의 재주가 서쪽 땅에서 났는데도 조정에서 서쪽 땅 버리기를 똥무더기 치우듯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 노비들조차 서쪽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놈(平漢)’이라고 부릅니다. 그 서쪽 사람이 된 자, 어찌 원통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나라에 급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서쪽 땅의 힘을 빌리고 또 과거 볼 적에는 서쪽 땅의 글을 빌렸으니 400년 동안 서쪽 사람들이 조정에 무엇을 등졌습니까?

지금 어린 왕이 위에 있고 척족 세력이 기승을 부려서 김모 · 박모(김모는 김조순, 박모는 박종경) 같은 무리가 나라의 권세를 쥐고 흔들어서,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에 우레와 지진이 일고 살별이 나타나며 폭풍과 우박이 해마다 일어나지 않는 해가 없습니다. 큰 흉년이 들지 않았는데도 이로 말미암아 주려 죽는 자가 길에 널려 있고, 늙은이와 어린애의 시체가 산골짜기를 메웠습니다. 남은 생민이 모두 쇠잔해 이리저리 떠돌고 있습니다.
- 《한국민중운동사 자료대계》 〈홍씨 일기〉

위에 인용한 부분이 봉기의 명분과 당위를 밝힌 대목이다. 이 내용으로 세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서북지방에 대한 조정의 차별정책을 말했다. 나라에 일이 있을 때 늘 관서지방민을 동원하고 이용하면서도 벼슬길은 터 주지 않았다. 이 차별정책은 조선조 초에 시작되어 18세기 이후에는 더욱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이것을 법으로 정해 놓은 것도 아닌데도 관례 또는 불문율로 시행되어 왔던 것이다.

둘째, 당시 노론 계열인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의해 그 가문의 무리들이 온갖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정치현실을 지적했다. 격문에서는 안동 김씨의 우두머리 김조순과 이에 빌붙어 있던 박종경(朴宗慶, 세자의 외숙)을 지탄의 대상으로 가리켰는데(김모 · 박모라고 표기한 것은 옮겨 적으면서 일부러 이름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임), 이들 세력은 권력과 이권을 독점하고 돈을 받고 벼슬을 사고팔며 온갖 부정을 저질러 토지를 겸병(한데 합쳐 소유함)하고 상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나라의 재정이 이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났고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다.

셋째, 이런 현실에서 가혹한 조세와 수탈로 민생이 고통에 처했다고 했다. 특히 봉기하던 해에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나라에서 곡식을 민간에 팔 때 현지 관리들과 짜고 서울의 대행업자들이 높은 값으로 주민에게 강제로 팔았다. 중간 대행업자인 경주인(京主人)들의 횡포는 어느 곳에나 널려 있었다.

이 세 가지 문제가 봉기의 동기라고 볼 수 있다. 홍경래는 구원자로서 홍의도에 있는 정진인(鄭眞人, 《정감록》의 정씨를 빙자한 듯함)을 받들고 ‘구민의기(救民義旗)’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 수령과 노비들까지 모두 참여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격문의 내용은 구민에 목표를 두고 관서지방의 모든 계층이 참여해 힘을 모으자는 의지가 깔려 있다.

홍경래는 국경지대에 있는 용강 출신으로 남양 홍씨이다. 남양 홍씨들은 홍경래가 태어날 무렵, 조정에서 세도를 부리던 척족 세력의 하나였다. 영조시대 벽파(조선 영조시대 일어난 당파의 하나. 사도세자를 고발한 노론 계열이 이에 속함. 사도세자를 두둔한 사파와 대립함)로 득세한 홍인한(洪麟漢)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서울의 홍씨와 별로 끈이 닿지는 않은 듯하다. 다만 그는 적어도 과거 볼 신분은 되었던 것이다.

홍경래의 아버지는 진사라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진사를 얻었는지는 모른다. 그는 어릴 때부터 외숙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웠다. 어느 정도 학문을 익힌 뒤 나름대로 뜻을 품고 서울에 가서 과거에 응시했다. 이곳 출신들은 거의 등용되지 않았지만 문과는 진사, 무과는 출신(出身, 무과 합격자)이라도 되기 위해 과거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는 몇 차례 과거를 보았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그런데 그보다 더 형편없는 글재주와 학식을 가진 남쪽 출신의 양반붙이들이 합격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20대의 그는 차별과 부정을 직접 보고 느꼈던 것이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단념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유랑생활을 했는데, 곳곳을 돌면서 술수를 익히고 풍수를 배워 지사(地師, 지관이라고도 함. 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를 잡아 주는 사람)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에 박천의 청룡사에서 자신보다 다섯 살 아래의 서자 출신인 우군칙(禹君則)을 만났다. 두 청년은 뜻이 맞아 현실의 비리를 지적하며 돌아가는 나라의 정세에 대해 토론했다. 그러던 중에 여진 땅에서 마적(말을 타고 떼 지어 다니는 도둑)을 지휘하던 정민시(鄭民始)를 만나게 되었다. 정민시는 만주의 사정을 일러 주었다. 이때부터 이들은 변란을 모의하고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키는 문제 등에 관해 서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치밀한 준비작업

홍경래나 우군칙은 모두 작은 키에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특히 홍경래는 새끼줄을 세 발쯤 높게 쳐 놓고 그 위를 뛰어넘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걸음도 날쌔게 잘 걸었다. 두 사람은 차력술 · 축지법을 동원하고 스스로 지관이라고 자처해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때로는 인삼장수로 꾸며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의 뜻을 흘렸다. 홍경래는 훈장 등 주로 지식층을, 우군칙은 주로 상인들을 포섭했다.

그렇게 가산의 이희저(역노 출신으로 무과에 합격한 부호), 곽산의 홍총각(힘센 장사)과 김창시(소과에 합격한 인물), 태천의 김사용(남을 도와 꾀를 내는 인물) 등을 끌어들였다.

우군칙은 이희저 아버지의 묏자리를 봐 주며 “당대에 귀하게 될터”라고 꾀었다. 이들은 이희저를 끌어들인 뒤, 그가 사는 가산 · 박천 사이에 있는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준비를 서둘렀다. 홍경래는 다복동에 있으면서 때로는 산에 올라가 천문(천체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보고 세상을 점치기도 하고, 때로는 장터에 나타나 신사(神師)라고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겼다.

다복동 앞에 있는 진두(津頭)는 대정강 중류에 있는 삼각주의 나루로, 양쪽으로 큰 길이 뻗쳐 있었다. 이곳은 상류에 있는 태천 · 운산의 물품과 재화가 와서 닿는 곳이다. 이 나루를 통해 분지인 다복동으로 들어오면 감쪽같이 숨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 두 곳을 그들의 거점으로 정했다.

홍경래는 준비 초기에 서울의 유력자인 김재찬을 찾아갔다. 김재찬은 한때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적도 있고 재령에 유배된 적도 있는 인물인데, 당시 좌의정을 지낸 고관이나 안동 김씨에게 불만을 지니고 있던 처지였다. 홍경래가 김재찬을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김재찬이 그의 인물 됨됨이를 알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경래는 “기왕에 벼슬할 수는 없으니 장사 밑천을 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김재찬은 평안감영에 보내는 편지를 써 주었다. 홍경래는 이 편지를 들고 평안감영에서 공납금 2000냥을 빌렸다. 이 돈은 거사에 귀중한 자금이 되었다.

홍경래는 돈 많은 상인들을 협조자로 만들기 위해 물색했다. 그래서 의주의 인삼상인 임상옥과도 연결이 되었다. 자금도 얼마 정도 받아 낸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정주의 부호인 김약하의 적극적인 호응도 다짐받았다. 이어 개성의 송상(松商)에게도 손을 뻗쳤다. 그쪽 부호들이 얼마 만큼의 자금을 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관련기록으로 보아 상당한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홍경래 일당은 운산 촉대봉에 광산을 마련하고 유랑민을 대상으로 광산 노동자를 모집했다. 당시 금광 채굴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운산군수 등에게 뇌물을 써서 금광을 개설하고 몰려온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었다.

이들은 또 추도(楸島)에 염전을 마련하고 수하의 노동자를 투입해 거점 또는 자금을 모으는 수단으로 삼았다. 추도에 굴을 파 놓고 그 속에서 돈을 위조해 찍어 내 자금으로 삼기도 했다. 한편 활 잘 쏘는 자, 총 잘 쏘는 자들을 모으고 각 고을의 구실아치들과 내통해 관가의 정보를 빼냈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의주에서 개성까지 부호 · 대상(大商)들이 거의 그들 무리에 가담했으며, 황해도 · 평안도 두 도의 파락호들과 무뢰배들이 그들의 하수인이 되었고, 떠돌이와 주린 백성들 또한 많이 투탁(남의 세력에 기댐)했다.

그들은 서울까지 염탐꾼을 심어 놓고 정보를 수집했다. 또 이런 기록도 있다.

유한순(兪漢淳)은 본래 영유 땅 사람인데 경향에 출입하면서 하는 짓이나 행동이 무뢰해, 혹 중들 사이에 자취를 감추기도 하고 혹 향리라고 거짓 핑계를 대기도 하다가 간사한 형상이 탄로나서 백령도에 충군(充軍, 귀양의 일종으로 일정 기간 군대에 복무하는 것)되었다. 거기서 풀려나서는 적괴 김사룡을 영유 땅에서 만나 서로 어우러져 역적 모의를 수작하고서 그의 종용을 받았다. 김사룡의 자금을 받아서 서울에 잠입하여 사람을 속여 아내를 얻고 도독의 하수인이 되어 남몰래 사정을 정탐했다. 혹 방문을 남대문 돌기둥에 붙이기도 하고 혹 옛 장위영 대문에 붙이기도 하여 민심을 선동하는 계책으로 삼았다. 또 관군의 소식을 염탐하여 선천의 도둑 소굴에 전해 주고 다시 김사룡의 지시를 받아 두 번째로 서울 근방에 들어와서 궁성에 출몰했다.
- 《진중일기》

이들은 궁극적으로 서울로 쳐들어올 계획이었기 때문에 서울의 소식과 함께 서울의 민심도 충동질했던 것이다. 또 자금이 닿는 대로 호피 · 철 · 대나무 등을 사들이며 각지에서 만들거나 입수한 칼 · 창 · 조총과 갖가지 색깔의 깃발을 다복동으로 실어 날랐다.

한편 금광 노동자를 구한다는 핑계로 장정들을 모아 구덩이를 파 놓고 뛰어 건너게 해서 그 힘을 시험하거나 새끼줄을 높게 매 놓고 뛰어넘게 해 그 날램을 견주기도 했다.

여기에 뽑히면 돈과 옷감을 주어 그 무리에 들게 했다. 이렇게 해서 10명이 되면 표지를 나눠 주어 각 고을로 잠입시키며 거병(군사를 일으킴)할 때에 내통하라고 일러 보냈다.

김창시에게는 민심을 선동하는 요언(妖言, 민심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사스러운 말)을 퍼뜨리게 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일사횡관 귀신탈의 십필가일척 소구유양족
一士橫冠 鬼神脫衣 十疋加一尺 小丘有兩足

이 열여섯 글자가 백성들 사이에 떠돌자, 백성들은 그 뜻을 궁금해 했다. 그러면 홍경래 일당이 슬쩍 이렇게 풀어 주었다.

“일사횡관(一士橫冠)은 사(士) 위에 일(一)을 삐딱하게 썼으니 ‘임(壬)’이요, 귀신탈의(鬼神脫衣)는 귀(鬼)와 신(神)의 옷(衤 · 示)을 떼어 내니 ‘신(申)’이요, 십필가일척(十疋加一尺)은 십(十)과 필(疋)에 몸(己)을 더하니 ‘기(起)’요, 소구유양족(小丘有兩足)은 구(丘) 아래에 팔(八)을 붙여 ‘병(兵)’이 된다오.”

그러면 이 글자가 ‘임신기병(壬申起兵)’이 된다. 간지로 1812년(순조 12)이 임신년이니, 이해에 거병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 말이 유행하면서 평안도 · 황해도 · 함경도 일대의 민심이 요동을 쳤다. 이렇게 오랜 준비 끝에 거사일을 12월 15일로 정했다.

전면적 봉기를 단행하다

그들의 첫 목표는 평양성이었다. 평양 대동관(大同館)에 불을 지르고 혼잡한 틈을 타 내통 세력의 호응을 얻어 밤중에 평양성을 차지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대동관 밑에 화약을 묻고 불을 붙였는데, 화선과 약통이 눈 녹은 물에 젖어 다음날 오후에야 불이 붙어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812년 12월 18일, 홍경래 무리는 마침내 전면적 봉기를 단행했다. 이들은 다복동을 시작으로 남진(南進)과 북진(北進) 두 조로 나누어 봉기했다. 그 주요 부서와 연루자는 다음과 같다.

이름출신지신분역할
홍경래(洪景來)용강(龍岡)평민도원수
우군칙(禹君則)가산(嘉山)서얼참모
김사용(金士用)태천(泰川)평민부원수
홍총각(洪總角)곽산(郭山)평민선봉장
윤후검(尹厚儉)봉산(鳳山)평민후군장
이제초(李濟初)개천(价川)평민선봉장
이희저(李禧著)가산(嘉山)역노자금
김창시(金昌始)곽산(郭山)진사참모
김사룡(金士龍)영유(永柔)평민연락
김약하(金若河)정주(定州)부호자금
임상옥(林尙沃)의주(義州)부호자금
유한순(兪漢淳)영유(永柔)평민정탐
  조직의 주요 인물

이 표는 행동부대와 참모 그리고 자금책 등을 위주로 작성한 것이다. 각 고을의 내통 세력 또한 규모가 컸다. 홍경래가 남진, 김사룡이 북진으로 나누어 맡아 남진군은 가산을, 북진군은 곽산을 맨 먼저 쳐서 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도원수 앞에는 ‘구민의기’를 내걸었고, 우군칙은 제갈량을 흉내 내어 학창의를 입고 부채를 손에 들었다. 군졸들에게는 검은 옷(푸른 옷이라는 설도 있음)을 입히고 푸른 수건(붉은 수건이라는 설도 있음)을 머리에 동이게 했다.

이들 무리가 거병하자 곳곳의 향리들이 호응해 관아가 속속 접수되었다. 그러나 남진군이 서울 진격을 서두르는 동안 관군의 세찬 반격을 받아 정주성으로 퇴각했다. 봉기군은 정주성에서 끈질기게 항거했지만 5개월 만에 성이 함락됨으로써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봉기군은 4개월 동안 평안도 일대의 거의 모든 고을을 접수해서 행정권을 행사했고 자기들 손으로 새로운 수령을 임명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관가의 곡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농민층을 광범위하게 흡수했다. 가담자 명단에서 보듯 각 사회계층을 모두 포함했고, 자금 · 무기 · 훈련에 최선을 다했으며 심리전(유언비어 또는 정진인 출현설과 복색 등)까지 동원하는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 그런데 왜 실패했을까?

먼저 힘의 분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북진군을 나눈 것은 뒤의 적들을 분리해 쳐부순다는 전술이었지만 일단 총력을 기울여 서울 진격을 꾀했어야 했다. 이것은 전술적으로 볼 때 큰 차질이었다. 다음은 홍경래가 거병하면서 자신을 ‘북영(北營)’이라고 표방하고 ‘남인(南人)’을 무참히 죽이겠다고 주장한 점을 실패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것은 서북지방의 인심을 충동했지만 다른 지역 인사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은 전술 · 전략의 차질은 오랜 준비와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정주성에서 버티면서 “호병(胡兵)의 내원군(來援軍)이 온다”고 말한 것은 봉기군을 단결시키기 위한 전술이었는지는 몰라도, 나중에 내원군이 없었던 것 또한 봉기 과정에서 하나의 차질을 빚었다고 볼 수 있다.

홍경래가 도우러 온다

이렇게 해서 조선 후기에 들어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진 홍경래의 봉기는 끝을 맺었다. 이때 김재찬은 평양감영에 보낸 편지를 재빨리 불살라 버렸고,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 김삿갓의 할아버지)은 봉기군에 끌려가서 벼슬을 받고 목숨을 부지한 탓에 많은 핍박을 받으며 죽었다. 운산군수 한상묵은 금광 채굴을 막지 못했다며 맨 먼저 파면을 당했고, 함경감사 조덕윤도 관곡을 높은 값에 팔아 백성의 원성을 샀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다. 한편 해주에서는 봉기군에 호응한 난이 일어났고, 남쪽의 양반들은 피난보따리를 싸기에 바빴다. 이만큼 봉기는 온 조정과 나라를 휘저었던 것이다.

홍경래는 죽고 난 뒤 민중의 영웅이 되었다. 그 뒤 봉기를 일으키려는 사람들은 홍경래의 봉기 계획을 본받기도 하고, 홍경래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자기들의 봉기를 도우러 온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래서홍경래가 한창 평안도를 석권하고 있을 때, 해주에서는 농민과 천민들이 난을 일으켜 홍경래에 호응했다. 또한 황주에서는 뱃사람들이 양반집을 불태우며 난동을 부렸다. 서울에서는 평민들이 무리를 지어 봉기를 선동하면서 “조정이 홍경래에 쫓겨 공주나 안동으로 피난 갈 것이다. 성내의 포수 300여 명과 함께 봉기하면 내응이 있을 것이요, 광주 분원(分院, 도자기 굽는 곳)의 군사가 돕고 전라도 관찰사가 도우러 온다”거나 “이조의 운수는 400년이다. 중인 · 서얼들이 양반을 죽이고 궁중의 일꾼들이 들고일어난다”는 말들이 장안에 떠돌았다.

순무영진도

홍경래가 주도한 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관군 진영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 주니어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또 1813년 12월에 제주도에서 풍헌(風憲, 지방에서 교화를 맡아 보던 아전)인 양제해(梁濟海)가 홍경래의 거병에 용기를 얻어 그 계획을 모방해서 변란을 일으켰으며, 1817년 4월에는 전주를 중심으로 한 변란 계획이 탄로났다. 그런데 이들은 동조자를 모으면서 “홍경래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데, 배를 타고 와서 도와줄 것이다”고 사람들을 선동했다.

1826년 5월에 청주감영과 북문에 불온문서가 걸려 있어 이를 수색해 변란 모의자들을 잡아들였는데, 이들 또한 “홍경래가 살아 있으며 우리를 도우러 올 것이다”고 동조자들을 설득했다. 이것은 모두 《순조실록》에 나오는 몇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홍경래는 홍길동 · 임꺽정과 함께 새로운 영웅으로 민중에게 부각되었다. 그러면 홍경래와 같은 혁명가가 왜 나타났을까? 위 격문에서 보듯 조선왕조의 정치 · 사회적 모순이 이러한 인물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혹독한 지역차별 정책이 서북지방에서 400년 동안 이어졌고, 후기에 와서는 호남(16세기 이후), 영남(18세기 이후) 지방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분제도에 묶여 평민 이하의 사회계층은 벼슬자리뿐만 아니라 온갖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들은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사회의 밑바닥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여기에 정치 · 경제적 독점체제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관리의 부정부패로 농민들은 최소한의 생존권조차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사회조건 속에서 19세기에 들어와 민중은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게 되었고 곧 변란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Daum백과] 홍경래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 주니어김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