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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이상재

李商在

타협을 거부한 민족독립운동가

요약 테이블
출생 1850년
사망 1927년

나라의 실상에 눈 뜨다

충청도 서천의 한산 땅에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의 생가가 잘 보존되어 있고 유물관도 세워져 있다. 그의 생가를 보면 그저 먹고 살 만한 중농의 집 규모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시골구석에서 한 거인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상재 생가

어떻게 이런 시골에서 그런 거인이 태어날 수 있었을까? 한 번쯤 의문을 갖게 한다. 충청도 서천의 한산땅에는 다행히 생가가 잘 보존되어 있어, 그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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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어날 당시 농촌 출신으로서 출세하는 길은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과거공부에 열중했고 남달리 총명함을 인정받아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

소년 이상재는 여느 경우처럼 열다섯 살에 결혼했으며, 과거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드디어 때가 왔다. 1867년, 열여덟 살의 청년 이상재는 괴나리봇짐을 지고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향했다.

실질적인 집권자 흥선대원군이 문벌정치를 몰아내고 정치개혁을 단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지난 해 평양에서 벌어진 셔먼호사건으로 미국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민심이 흉흉했고, 경복궁 중건으로 국가 재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과거시험은 여전히 부정이 판을 치고 있었다. 과거는 실력이 모자라는 문벌 자제들이 가문의 힘으로 급제하여 관계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어 있었다. 문벌 배경이 없는 시골청년 이상재가 과거에 낙방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낙방한 뒤 이 집 저 집 줄을 찾아 식객 노릇을 하며 지냈다. 이때 남달리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있는데, 노론 계열의 명문대가 출신의 신진 관료 박정양(朴定陽)이었다. 박정양은 이상재보다 아홉 살이 많았고 당시 벼슬자리에 나와 있었으니 선배와 다름없었다. 이상재는 박정양의 집에 기거하면서 13년 동안 겸인(傔人, 서기나 비서) 노릇을 했다.

그동안 그는 나라 돌아가는 꼴을 예의 주시했다. 당시 척사파와 개화파가 등장하여 현실관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고, 연이은 일본의 강요로 개항을 하게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을 밀어내고 권력을 잡은 민씨들은 노골적으로 탐학과 부정을 저지르고 있었다.

청년 이상재는 이런 현실을 목도하면서 나름대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의 능력을 보여 줄 기회는 왔다.

신사유람단 단원으로 일본 시찰

1881년 조정에서는 일본의 개화문물을 익히기 위해 청년들을 신사유람단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이 시찰단은 12개조로 구성되었는데 개별 조마다 조장 1명과 수행원 · 하인 · 통역 등이 딸렸다. 총인원 61명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시찰단이었다. 조장은 홍영식, 어윤중, 박정양, 조병직, 민종묵 등 중간 벼슬아치들이었다. 수행원은 유길준, 윤치호, 그리고 막후에 참모관의 이름으로 개화승 이동인이 동참했다.

그는 조장 박정양의 추천으로 수행원이 되어 여기에 끼게 되었다. 그는 사인(士人) 신분이었다. 그 당시로 보면 꽤 화려한 멤버였는데 ‘이상재’의 이름이 올랐던 것이다. 일행은 2개월 보름 동안 일본의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박정양조는 내무성, 농상무성 등을 돌아보았고, 전체가 모여 이토 히로부미 등 요인들을 수시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사찰단원들은 전후 4개월 동안 같이 지내며 이런저런 시국 얘기도 하고 친목을 다졌다. 이때 이상재는 국제정세와 일본의 사정만을 살핀 것이 아니라 많은 동지를 사귀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시골 무지렁이가 아니었고 우리나라를 끼고 돌아가는 국제정세와 서양문물에 대한 이해도 넓어졌다. 그는 곧바로 개화파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1884년 최초로 우정국이 창설되어 신사유람단의 멤버인 개화파 홍영식이 그 총판이 되자 그를 주사로 임명하여 인천우체국에 근무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채 근무도 시작하기 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개화파는 떼죽음을 당했고,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이 일에 직접 가담하지 않아 혐의가 없었으나 분연히 처음으로 얻은 관직을 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887년 개화파가 다시 정계에 진출하여 박정양이 주미공사가 되었다. 이때 그는 참찬관 이완용 밑의 서기관으로서 박정양을 수행했다. 청국의 주미공사는 조선이 자기네 속국이라며 국서봉정(國書奉呈)을 방해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들 일행은 미국 외교관인 헤레이스 알렌의 주선으로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어렵게 국서를 전달했다. 청국 공사가 계속 방해하고 나서자 그는 박정양의 입장을 살려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못하게 하고, 그가 대신 활동을 했다. 사실 박정양은 게으르고 무능하기로 평판이 나 있었다.

게다가 통역을 맡은 이채연은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고 중개를 맡은 알렌은 한국어를 떠듬거리는 수준이어서 의사 소통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상재는 “미국 반벙어리와 조선 반벙어리가 적당히 얼버무려서 의사를 소통했다”고 회고했다. 외교라기보다 세월을 보내며 노닥거리는 생활이었다. 박정양이 청국의 입김으로 파면이 되어 10개월 만에 돌아올 때 그도 귀국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아버지의 초상을 만났다. 그가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던 해인 1894년 개화정권이 수립되었다. 내무대신이 된 박정양의 추천으로 그는 학부 참사관, 의정부 총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중견 관리로 점점 관료생활에 빠지는 듯했지만 성실하게 공무를 수행하면서 정상배들과 곳곳에서 마찰을 빚었다. 그는 러시아와 일본이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간교한 민비가 살해되고 고집쟁이 흥선대원군이 부침하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는 분연히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변신을 시도했다.

독립협회의 실세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은 1896년 4월에 창간되어 정부의 기관지가 되었다. 그 3개월쯤 뒤인 7월에 독립협회 창립총회를 열고 독립협회가 발족되었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기관지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대한제국 정부와 독립협회는 자매와 같은 처지였다.

독립협회에는 안경수, 이완용, 김가진 등 정부 대신들이 참여하여 기금을 냈고 재야인사라 할 서재필, 이상재, 오세창 등이 실무원으로 참여했으니 민간 사회단체라 볼 수 있다. 독립협회는 관민 합동으로 새로운 운동을 벌였다. 처음에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독립공원 조성을 도모하는 등 사회개량운동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나 차츰 러시아 배격, 자주권 회복, 정부정책 비판과 대신들의 비리 척결 등을 내세워 정부 대신들이 물러나는 사태를 맞이했다.

초기 1년 동안 34회에 걸쳐 독립협회에서 벌인 토론회에는 500여 명이 모였다. 후기에는 종로에서 벌인 만민공동회에 낮은 벼슬아치, 신지식인, 시민, 학생 등이 참여하여 1만여 명이 참여한 경우도 있다. 이에 힘입어 독립협회는 1898년 후반기부터 정치활동 중심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이 시기 총대위원인 이승만, 장붕 등이 참여하여 급진적으로 활동을 이끌었다. 이들은 요구한 일이 관철되지 않으면 황제가 있는 경운궁 앞에서 시위와 철야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초기 이완용, 서재필, 윤치호 등 진보세력들은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만민공동회를 통해 독립과 자주를 고취하는 운동을 했다. 그도 이 운동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쉰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기에 들어서 이상재는 윤치호 회장 밑에서 부회장을 맡았다. 이상재는 고종을 직접 만나 건의서를 전달하기도 하고 시위대를 이끌기도 했다.

한편 독립협회 간부들을 두고 황제를 몰아내고 공화제를 제정하여 새 정부를 만들고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내세운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모략이었지만 고종의 불신은 커져 갔다. 수구파 정부의 요청으로 경무청에서는 이상재, 남궁억 등 17명을 잡아들였다. 군중들이 경무청 앞으로 몰려가서 연좌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할 수 없이 17명 전원을 석방했다. 이때 정부의 사주를 받은 황국협회 깡패들이 몰려와 군중들을 방해했으며 군인과 순검들은 그 깡패들을 보호했다.

독립협회 단원

황제를 몰아내려 한다는 소문 때문에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경무청에 잡혀갔다. 1898년 이상재는 처음 경무청에 잡혀간 뒤, 감옥 문을 수시로 들락날락했다. 사진은 1898년 투옥된 독립협회 단원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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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무장대를 조직해 대항했다. 하지만 이상재는 온건파로 무력충돌을 견제하려 했다. 정부는 친위대를 동원해 광화문 집회를 총칼로 막았다. 윤치호는 만민공동회의 자진 해산을 선언했다. 중추원도 모든 민회를 해산한다고 결의했다. 독립협회는 3년, 만민공동회는 1년 동안 활동을 벌인 끝에 막을 내렸다. 이상재는 만민공동회의 사회를 보기도 하고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에 글을 쓰며 신문화운동 또는 민권 자주운동에 앞장섰다.

사학자 문일평(文一平)은 “독립협회에는 세 거두가 있으니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이다. 서씨를 창설자라고 한다면 윤씨는 계승자요 이씨는 그 확대자이다”라고 썼다. 후기의 독립협회운동은 실제로 이상재가 이끌었던 것이다.

이상재는 1898년 처음 경무청에 잡혀간 뒤부터 감옥 문을 들락날락했다. 그 뒤에도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고 하여 수구파들에 의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는데 계속해서 체포 구금되기 일쑤였다.

일제에 대한 비타협노선

나라가 완전히 일제 식민지배로 들어가자 그는 기독교운동을 통해 독립심 고취에 나섰다. 그는 1903년 감옥에 있을 때 처음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생활 때에도 기독교에 들지 않았는데 이때에야 기독교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능숙하지는 않았으나 영어를 조금 알았으니 선교사들과 접촉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908년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선교사 겸 교육부장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는 청년들의 지도와 교육에 전념하면서 일본 · 중국으로까지 활동을 넓혔다. 일제 당국은 황성기독교청년회를 해산시키려는 공작을 꾸몄다. 일제는 그에게 5만 원을 주겠으니 고향에 돌아가 편안히 지내라고 회유했다. 어림없는 짓거리였다.

“이 돈으로 땅을 사라니 나더러 죽으란 말이지. 나는 타고나기를 편안히 일생을 마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는 과감히 유혹을 뿌리치고 줄기차게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신간회 회장으로 독립지사들의 연합전선에 나서고,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언론활동을 벌였다. 여러 단체가 연합해 신간회를 발족했을 때 그는 회장을 맡아보았다. 그는 무수한 연설을 통해 독립운동을 고취시켰고 숱한 일화를 뿌렸다. 이 시기 그는 우파 민족주의자로 좌파들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고 전국기자대회를 열어 총독부를 향해 언론의 신장을 외치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다. 3·1운동 때 그의 역할에 의문을 던지는 역사학자들이 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에 끼지 않았고 3·1운동이 한창일 때도 별달리 한 일이 없었다. 다만 일제경찰에 한때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고 한다. 그의 온건노선 탓일까?

일제는 합병 직전 조선미술협회를 조직하고 그 창립식에 이상재를 초대했다. 그 자리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있었고 친일파 이완용, 송병준도 초대되었다. 이완용과는 미국공사관 시절 상사로 받들어 한때 친밀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이상재가 어떻게 이런 자리에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곳에서 이완용, 송병준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가시지요.”

“그게 무슨 말이오?”

“대감들은 망하게 하는 데는 천재니까 동경에 가면 일본이 망할 것 아니오?”

그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또 어느 날 강연장에서 그는 불쑥 “개나리가 많이 피었구나”라고 말했다. 그때 순사를 ‘나리’라고 불렀으니 ‘개 같은 순사들이 강연장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렇듯 그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 곧잘 사람들을 웃겼다.

그의 집은 서울 재동에 있었는데 삼간집이었다. 그가 죽자 당시 서울의 지사들은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모셨다. 그는 민족독립운동가로 추앙을 받은 것이다. 때로 그가 지나치게 온건하게 행동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그는 개화파 동료들이 대부분 친일파로 돌아설 때에도 꿋꿋한 지조를 지켰고, 끝까지 타협을 거부하며 살았다.

한용운은 그의 사회장 위원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알고 단숨에 달려가 철필로 자신의 이름을 북북 그어댔다고 한다. 이는 그 운동기질의 차이에서 나온 행동일 수도 있고, 3·1운동 시기에 남모르는 곡절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불승인 한용운이 기독교도인 이상재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그의 타협적인 온건 노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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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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