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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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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641년 |
백제 중흥의 꿈
백제의 무왕(武王, ?~641)은 어려운 시기에 왕 노릇을 하면서 많은 업적을 이룩했고, 한편으로는 갖가지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그는 백제 30대 왕으로 41년 동안 재위했지만, 아들 의자왕 시기에 이르자 애써 지켜 내던 백제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그는 백제 마지막 시기에 꺼져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그런 탓에 백제의 왕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 당시 백제는 한강 언저리에 있던 도성에서 남쪽으로 쫓겨나 웅진과 사비성에 도읍지를 정해 새로운 각오로 나라를 일으키려 했지만 연달아 고구려와 신라의 압박을 받았다. 그리하여 영역을 야금야금 침식당해 동쪽으로는 청주 등지를 신라에게 내주었고, 북쪽으로는 한강 아래에서 훨씬 내려와 금강 언저리까지 밀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대성팔족(大姓八族)’이라 일컫는 귀족들은 정치권력을 나누어 쥐고 나약한 임금들을 쥐고 흔들었다. 무왕의 할아버지 혜왕과 아버지 법왕은 즉위한 뒤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웅진과 사비성에서 웅크리고 있던 백제는 옛 영광을 돌이키려고 먼 수나라에 사람을 자주 보내 고구려를 정벌해 달라고 요청했다각주1) . 백제의 꼬드김에 솔깃한 수나라가 고구려 정벌에 나섰지만 거듭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고구려에 대한 백제의 복수심은 공염불로 끝나고 말았다.
법왕은 꺼져 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힘을 쏟았다. 살생을 금지하면서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 주게 하고 고기잡이와 사냥 도구도 불태우게 했다. 이렇게 자비를 베풀어 민심을 모으려고 했지만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백제 중흥의 짐은 고스란히 무왕에게 지워졌다.
서동설화의 주인공
무왕은 호걸의 기상을 지니고 의지도 강했다. 그리고 정치적 책략에도 뛰어났을 것이다. 이것은 서동설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서동설화는 사랑 이야기 같지만 그 속에는 복잡한 정치적 술수가 깔려 있다. 서동은 마를 캐는 맛동을 말한다. 예전에 감자 · 고구마가 없었던 시대에 마는 칡뿌리와 함께 중요한 구황식품(救荒食品)이었다. 그래서 마를 캐서 파는 소년들이 있었다.
사비성(부여)에 한 맛동이 있었다. 그 소년은 과부의 아들로 백제의 서울 남쪽 연못가에서 살았다각주2) . 그의 어머니는 용과 잠자리를 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 아이가 마를 캐서 팔아 살림을 꾸렸기에 사람들이 맛동이라 불렀다. 맛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매우 아리땁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경주로 달려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동요를 지어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맛동의 방을 찾아 밤마다 무얼 안고 뒹군다네
국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향가로 꼽는 〈서동요〉가 경주 도성 안에 쫙 퍼졌다. 이 소문이 마침내 구중궁궐에 파묻혀 있는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진평왕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고, 신하들은 왕실의 권위를 타락시켰다며 선화공주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자고 했다. 공주가 유배의 길을 떠날 때 왕비는 황금 한 말을 주었다. 서동은 공주를 호위하면서 길을 따라왔다. 공주는 처음에 서동이 누구인 줄 몰랐으나 믿음직스러워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얼마 지난 뒤에 사랑하는 그 남자가 서동임을 알았다. 공주가 황금을 내놓으면서 우리가 100년 동안 살 수 있는 재산이라고 말하자, 서동이 이게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서동은 공주에게서 사연을 듣고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릴 적에 마를 캐면서 이런 물건을 진흙처럼 쌓아 놓았소.”
공주가 깜짝 놀라며 “황금은 귀중한 보배이니 우리 부모가 있는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서동은 황금을 모아 금오산 미륵사 옆에 언덕처럼 쌓아 놓았다. 그리고 용화산 사자사로 가서 지명법사를 만났다. 서동이 지명법사에게 황금을 신라 궁전으로 실어 나르는 방법을 묻자, 지명법사는 신통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황금을 신라 궁전으로 보냈다. 진평왕이 이 황금을 보고 놀라 서동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서동은 명성을 얻어 백제의 임금이 되었다.(《삼국유사》의 내용 요약)
무왕이 도성의 연못 언저리든 마룡지든 어디에서 태어났든 간에 용의 정령(精靈)이 과부의 몸을 빌려서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가난한 과부의 아들인 서동이라는 상징 조작을 설정했다. 이렇듯 서동은 용의 정령으로 태어났기에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고, 탁월한 지략으로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마침내 백제의 임금이 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무왕은 민중 출신으로 백제 귀족을 누를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임금으로 상징 조작되었으며, 장인과 사위의 관계인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맞서 옛 땅을 회복하고 정치적 환경을 조성할 인물로 부각된 것이다. 〈서동요〉는 물론 진평왕 시기에 유행한 향가로, 그 내용으로 보아 학자들은 서동을 백제의 동성왕이나 무령왕 또는 원효라고 보기도 하지만 일단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무왕으로 봐야 할 것이다.
미륵사를 세워 민심을 추스리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무왕에 얽힌 미륵사 창건설화도 전한다. 어느 날 무왕과 왕비가 용화산 사자사를 찾아가던 길에 산 아래의 큰 연못에 이르렀다. 발길을 잠시 멈춘 사이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났다. 이들은 치성을 드리면서 연못을 메워 절을 짓기로 했다.
무왕이 지명법사에게 연못 메울 일을 물어보자, 지명법사가 신통력을 발휘해 하룻밤 사이에 연못을 평지로 만들었다. 이윽고 이곳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미륵불을 모셨다. 이때 진평왕이 많은 목수와 석공을 보내 공사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용화산은 미륵불이 있는 용화회상(龍華會上)을 의미한다. 무왕은 미륵사를 창건하고 미륵신앙을 통해 자신은 전륜성왕(轉輪聖王, 위엄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성제)의 이미지를, 민중에게는 미륵세상의 출현을 기대하게 했다. 이대로라면 무왕은 최초로 미륵신앙을 이용한 군주가 될 것이다.
오늘날 미륵사터는 일연의 기록대로 익산 용화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 창건했을 때에는 동양 최대의 가람이었지만, 지금은 석탑과 당간지주 등만이 남아 있다.
1990년대 발굴 조사 때 그 규모를 알아냈으며 그릇과 연장 등 2만여 점의 유물을 발굴했다. 이를 통해 미륵사가 백제 미륵신앙의 중심 사찰이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무왕은 미륵신앙을 통해 일체감을 다지고 나라의 중흥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수나라 · 당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다
무왕은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서동설화의 이미지와는 달리 신라와 연달아 전쟁을 벌였지만, 예전처럼 결말이 쉽게 나지 않았다. 서로 힘만 빼는 겨루기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백제는 남쪽에 치우쳐 있었기에 국력이 쇠퇴해 있었다. 그런 탓으로 오히려 신라의 반격전 또는 침략전에 밀리기 일쑤였다.
또 북쪽에서 압박해 오는 고구려를 막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고구려는 내분이 심해져 예전처럼 백제를 공격하지 않았고 신라의 침략에도 제대로 반격전을 펼치지 못했다. 하지만 598년 백제의 위덕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수나라가 요동을 공격할 때 백제가 그 길잡이가 되어 주겠다고 자청했다. 이를 고구려에서 염탐하고 군사를 국경지대에 보내 복수전을 펼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태를 대비해야 했다.
무왕은 그 대처 방법으로 황해를 건너 수나라와 당나라의 군사력을 빌리려고 끊임없이 수 · 당에 접근했다. 607년, 백제의 사신이 많은 선물을 들고 수나라 수도로 찾아가 고구려의 무도함을 늘어놓으며 고구려 정벌에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양제는 고구려 정벌을 계획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받아들이는 척하며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아 일러 달라”고 당부했다. 그래서인지 그해 5월 고구려 군사가 백제 변경지대를 습격해 포로 3000여 명을 잡아갔다.
수나라는 마침내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때 백제 군사도 참여한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 공격이 실패를 거듭해 무왕의 의도와는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았다. 수나라가 망한 뒤 무왕은 다시 당나라에 접근해 고구려 공격의 뜻을 실현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당나라의 만류를 받았다.
다른 쪽으로는 옛 영역을 찾기 위해 627년에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신라 공격을 서둘렀다. 신라의 진평왕이 이 사실을 당나라에 급박하게 알리자, 무왕이 공격을 일시 중지했다. 그리고 이해 8월 무왕은 조카인 복신(福信)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때 당 태종은 신라와 평화롭게 지내라는 당부의 글을 보냈다. 무왕은 겉으로는 이 당부를 받아들이는 체했지만 결코 따르지 않았다.
백제,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지다
무왕은 왕조의 위기를 해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비성의 궁궐을 대대적으로 고치고, 옛 도성인 웅진성과 이궁이 있는 금마를 자주 왕래하면서 여러모로 대비책을 세웠다. 또 왕흥사를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고 틈나는 대로 불공을 드렸다. 이어 궁남지를 파서 물을 끌어대고 주변 20여 리에 걸쳐 버드나무를 심었다. 연못 안에는 인공의 섬을 만들어 방장산(方丈山,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고 불렀다. 무왕은 만년에 늙은 탓인지 많은 비빈과 신하를 데리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질펀한 잔치를 벌였다.
무왕은 41년 동안 임금 노릇을 하면서 백제의 중흥을 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아들 의자왕이 왕위를 이어 해동 증자(曾子, 공자의 수제자)라는 칭송을 들으면서 부왕의 큰 뜻을 실현시키려 힘을 쏟았다. 의자왕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고, 오래된 원수인 고구려와 늘 견제를 일삼는 당나라에 접근하기도 하면서 양면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그도 만년에는 아버지처럼 사치와 놀이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끝내 신라의 꾀에 휘말려 나라를 잃은 비운의 군주가 되고 말았다.
무왕의 무덤은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오늘날의 공주시 금성동)에서 발견되어 그 안에서 많은 유물들이 나왔다. 무왕의 무덤은 무령왕릉과 함께 백제의 신비를 알려 주는 무덤으로 남아 있다. 두 무덤은 백제의 문화를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문화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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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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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무왕 –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 주니어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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