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김개남

김영주, 金開南

봉건사회의 심장을 꿰뚫은 불꽃같은 삶

요약 테이블
출생 1853년
사망 1895년

봉건사회의 모순 타파에 앞장서다

한말의 유학자 매천 황현은 이렇게 쓰고 있다.

도둑들이 처음 고부에서 봉기할 적에 그 괴수는 태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전라 좌우도에서 태인 접이 으뜸이었다. 전봉준과 김기범은 나이가 마흔 살쯤 되었다. 기범의 일가붙이는 대대로 태인에 살았는데, 사람들이 도강 김씨라고 불렀다. 기범은 사납고 무단스러워 난을 일으킬 적에 여러 일가붙이가 모두 따랐기 때문에, 도강 김씨에 스물네 명의 접주가 있었다.
- 황현 《오하기문》

김개남(金開南, 1853~95)의 근거지인 태인에서 농민군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고 그중에는 도강 김씨들이 많았는데 이것이 모두 김개남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쓰고 있다.

김기범은 스스로 말하기를 꿈에 신인이 개남(開南)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보여 주었기 때문에 이름을 ‘개남’으로 고쳤다고 했다. 태인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 재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한 집에서 말 네댓 마리를 길렀으며, 총통을 가장 적게 가진 집이 10여 개였다.

김개남이 ‘남조선을 개벽한다’는 뜻의 이름으로 바꾼 내력과 그의 근거지에 많은 말과 무기를 지니고 있음을 쓰고 있다. 이처럼 김개남은 봉건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열혈에 찬 행동을 보였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이후 김개남은 타협을 모르고 후퇴가 없는 강경파로 꼽힌다.

김개남은 태인 땅 산외면 지금실에서 부잣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들처럼 어릴 적에 서당에 다녔는데 어쩐 일인지 병서 읽기를 즐겨했다. 그리고 마을 소년들과 어울려 곧잘 장난질을 쳐 말썽꾸러기로 소문이 났다고 전해진다.

예전 어린이들은 곧잘 참외서리나 닭서리 같은 놀이 아닌 놀이를 벌인다. 그런데 영주(개남의 어릴 적 이름)는 통 크게도 돼지서리를 했다. 돼지는 한 집의 살림 밑천이 되곤 했는데, 돼지를 훔쳐 잡아먹었다면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었으니 부모의 애간장을 무척 태웠을 것이다. 그는 자라서 상두재를 넘어 원평이나 전주로 넘나들었고, 이때 일가붙이인 전주 영장 김시풍과 교분이 두터웠다. 그리고 그가 이때쯤 사귀던 사람들은 시세에 불평불만을 가진 사람, 기개가 있고 호걸스러운 사람 그리고 양반이나 벼슬아치보다 고통에 신음하는 서민들이었다 한다.(방손 김동기의 증언)

이런 그였으니 동학에 입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적어도 전봉준보다 먼저 동학에 들었고 도강 김씨의 자제들을 여기에 끌어들였다. 1890년 초기 최시형은 전라도 일대를 자주 순행하며 포덕에 열중했다. 1891년 최시형은 부안을 거쳐 태인 땅에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실 김개남의 집에 찾아갔고 이때 김개남은 여름옷 다섯 벌을 지어 올렸다 한다. 그 뒤 김개남은 각종 집회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그럴 적마다 강경파로 부상했다. 이런 탓으로 1894년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본격적 봉기가 전개되자, 그는 대장 전봉준 다음의 총관령이 되었다.

김개남

김개남은 혁명의 일급 지도자요, 열혈남아로서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런 탓인지 그는 박경리의 《토지》에도 농민군 지도자의 모델로 등장했다.

ⓒ 주니어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차별의 굴레를 끊기 위해 천민부대를 이끌다

전주에서 농민군이 퇴각할 적에 그는 전봉준, 손화중과 길을 달리했다. 그는 전라좌도 곧 지리산 언저리로 진출했다. 그의 지휘권 아래에 든 지역은 남원을 중심으로 임실, 장수, 무주 등지였다.

그가 남원에 웅거하고 호령할 적엔 천민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노비, 백정, 승려, 장인, 재인을 중심으로 한 천민부대였다. 그들은 온갖 차별의 굴레를 벗기 위해, 아니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한번 활개를 친 것이리라.

집강소 시기 갑오개혁에 의해 이들은 일단 제도로는 신분해방을 얻었다. 그러나 양반이나 상전들은 이런 신분 해방을 인정치 않으려 했다.

천민들은 양반이나 사족을 가장 미워해 길에서 갓을 쓴 사람을 만나면 “네가 양반이냐”고 윽박지르며 갓을 벗겨 찢어버리기도 하고 제 머리에 얹어 쓰고 다니며 횡행했다. 노비로 농민군을 따르던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노비들도 주인을 겁주며 노비문서를 불태웠고 강제로 양인 신분을 얻으려 했다. 더러는 그들의 상전을 묶어 주리를 틀기도 하고 곤장을 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특히 김개남 부대에서 많이 일어났다. 김개남은 이들을 끌어안고 스스로 왕이라 자처했다고 한다. 이런 철저한 반봉건운동 탓으로 지금까지 김개남은 핍박을 받고 있다.

김개남은 흥선대원군의 밀사를 꽁꽁 묶어 죽이려 했고, 현직 수령들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서슴없이 칼로 쳤으며, 전봉준에게 협조를 아끼지 않은 전라감사 김학진과는 대화를 끊고 전혀 상대하지 않았다.

9월 2차 봉기가 일어날 적에 그는 전봉준의 공주 공격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강력한 직속 농민군을 이끌고 10월에야 장수, 금산, 진잠을 거쳐 청주병영 공격에 나섰다. 그의 청주병영 공격은 실패했으나 청주병영의 관군이 공주전투에 투입되지 못하게 하는 데는 한몫했다.

그는 패전 장수가 되어 화문산의 깊은 산골 종송리(지금의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느티마을 매부 집으로 몸을 숨겼다. 이 마을의 아랫마을에는 옛 친구 임병찬이 살고 있었다. 임병찬은 아전 출신이나 부호였고 선비나 벼슬아치들과 넓은 교유를 트고 있었다.

이런 임병찬에게 김개남이 구명을 부탁했다. 임병찬은 “자네가 숨어 있는 곳보다 이곳이 안전할 터이니 우리 집으로 오게”라며 안심시켰다. 그러고는 재빨리 전주감영에 연락했고, 감사 이도재는 강화도 수비병의 종군인 황헌주와 포교를 보내왔다.

황헌주가 김개남이 숨어 있는 집을 포위하고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이때 마침 김개남은 측간에서 대변을 보고 있다가 “올 줄 알았네. 똥이나 다 누고 나가겠네”라고 대꾸했다 한다. 이렇게 해서 기개에 찬 영웅은 잡혔다. 그런데 이곳은 전봉준이 잡힌 피노마을과 불과 20여 리 거리에 있다. 두 지도자는 서로 만나 재기를 도모하려 각기 이곳으로 왔다고 일부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서로 만나지 못하고 한 사람은 옛 부하, 한 사람은 옛 친구의 밀고로 12월 2일 한날에 잡혔다. 묘한 인연이요 운명이다.

김개남은 전주로 끌려와 이도재의 심문을 받았다. 이도재는 정식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현지 처형을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김개남의 부하들이 드세어 그를 탈출케 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라거나 그가 처형한 남원부사 이용헌의 아들 등이 복수하게 해달라는 요구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도재가 그를 국문해보니 흥선대원군의 밀지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해 이런 사정을 숨기기 위해 처형했다는 설이다.

그를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하고는 배를 갈라 간을 큰 동이에 담으니 보통 사람의 것보다 컸다 한다. 원수진 사람들이 그 고기를 빼앗아 씹기도 하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한다. 그의 머리만 함지박에 담아 서울로 보내 조리돌렸다.

그가 잡혀갈 적에 백성들은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그 많던 군대 어데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 또는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는 유시(遺屍) 했노”라고 노랫가락으로 안타까워했다. 전라도 사람들은 ‘김’을 ‘진’이라고 곧잘 발음해서 ‘진개남’이라 불렀다.

제세안민을 꿈꾼 혁명가를 찾아, 전북 지금실

김개남의 손자 환옥(1994년 당시 76세) 씨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인상이었다. 평생을 흙과 함께 살아와 손등은 거칠고 얼굴에는 깊게 골이 팼지만 차분하고 편안했다. ‘참 곱게 늙으신 어른이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할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셨대. 사랑방에서 굵게 말씀하시면 온 마을에 소리가 다 들렸다더군.”

환옥 씨는 어릴 적 할머니 무릎맡에서 생전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전쟁이 터지고 남편을 잃은 할머니 전주 이씨는 어렵사리 자식을 키우며 아흔 살까지 살다 세상을 떠났다.

“전쟁 전에 논을 45마지기나 지었다던데 그 많은 곡식을 몰려온 군사들이 며칠 만에 남김없이 먹어치웠는데도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시기만 했다더군. 그 재산? 물론 다 남의 손에 넘어갔지.”

할아버지와 관련해서는 가슴 아프고 죄송스러운 기억도 많다. 역적의 손자라고 소곤거림을 당하던 열세 살 때, 방 하나에 가득했던 할아버지 책들을 집안 어른들이 재앙거리라며 마당에 모아놓고 불태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처럼 대접받을 줄 알았더라면 몇 권의 책이라도 건져놓는 건데.”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나하나 더듬어내던 환옥 씨는 정작 자신이 살아온 데 대해서는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살고 있는 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의 집 뒤에 있는 할아버지의 옛집(남의 손에 넘어간 뒤 30년 전쯤 밭으로 변했다)을 되살릴 돈이 없다는 것과 큰손자 녀석 대학 보낼 일이 걱정이라는 말을 꺼냈다.

‘김개남 장군 고택’이라는 팻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뒷밭 이야기가 나오자 환옥 씨의 눈이 금세 붉어졌다.

“작년에 서울의 출판사 사람들과 전주에서 대학생들이 찾아왔어. 뒷밭 두렁에서 할아버지를 기념해 만들었다는 노랜지 소린지를 하더구먼. 젊은 사람들이 어찌도 구슬프게 불러대든지 목이 메더군.”

김개남 집터

서울로 압송되지도 못했던 김개남은 참수되어 효시되었다.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그의 집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을 리 만무하지만 밭으로 변해버린 그의 집터가 서글픈 우리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 주니어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다른 백과사전


[Daum백과] 김개남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 주니어김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