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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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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61년 |
검소한 왕족
영조는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이다. 그의 형인 경종이 나이 들어서도 아들이 없고 병 또한 잦아서, 그에게 왕위 계승이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도 소론은 경종을 감싸고 노론은 영조를 내세워 정권을 탈취하려고 했다.
영조는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를 여러 번 당했고 당파의 음모를 진저리칠 만큼 겪었다. 그가 마침내 왕위에 오르자 그 왕위 계승에 공을 세운 노론은 반대파인 소론에게 탄압을 가했다. 영조는 처음에는 노론을 중용했으나 그들이 지나치게 보복을 주장하자, 온건파 소론을 기용하고 노론을 억눌렀다.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내걸었다. 파당을 없애는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많은 세력을 거느리고 있던 노론은 이 탕평책을 반대했고, 소수파인 온건 소론은 탕평책을 지지하여 노 · 소론의 권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실제로는 탕평책의 대상에서 실세한 남인과 북인이 제외된 것이다.
원경하(元景夏, 1698~1761)는 탕평 중에서도 대탕평을 주장하고 나섰다. 곧 모든 당파가 고루 조정에 등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노론 계열이면서도 노론의 일방적인 독주에 반대하고 공평한 인사정책을 주장했다.
원경하는 효종의 딸인 숙경공주의 손자이며각주1) , 경종 · 영조와는 진외가로 6촌 사이이다. 원경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그는 남달리 총명해서 다른 손자들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검소한 생활을 몸에 익혔다. 나들이할 때에는 비쩍 마른 말을 타고 다녔으며, 여느 사람들이 말에 온갖 치장을 하는 것과는 달리 말안장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또한 옷과 신발도 늘 검소하게 차리고 다녔다. 그가 서울 거리를 다니면 많은 사람들이 여느 여염집 자제로 알고 대했다가 그가 공주의 손자라는 것을 알고는 모두 놀라고 존경했다. 원경하가 과거에 합격한 뒤 세자의 경호를 맡는 부솔(副率)이라는 벼슬을 얻은 것은 38세 때였다. 신분에 비해 아주 늦은 벼슬길이었지만, 비로소 네 살 위의 형뻘인 영조를 자주 대하게 되었다.
그가 부솔로 있을 때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유라는 선비가 벼슬자리 하나 얻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이유는 소년시절에 안면이 있는 원경하를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물러갔다. 원경하는 심부름꾼에게 맑은 물을 떠와 이유가 앉았던 자리를 말끔히 청소하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속된 무리가 감히 내 자리를 더럽혔구나.”
이 소문은 금방 시정에 파다하게 퍼졌다. 이로 해서 그에게 정상배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부솔이 되던 해 정시문과에 장원하고서야 제대로 정언 · 교리 등의 벼슬을 얻었다.
영조와 마음을 나누다
이즈음 영조는 탕평책을 본격적으로 밀고 나가기 위해 탕평을 주장하는 조현명(趙顯命) · 송인명(宋寅明) 같은 대신들을 중용했다. 그러나 진정한 탕평책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친위세력이 필요했다. 이때 유난히 눈에 띈 인물이 바로 원경하와 박문수였다. 영조는 원경하를 승지로 발탁했다. 원경하는 승지로 있으면서 영조의 뜻을 받들어 영남의 퇴계 계열 인사를 조정에 뽑아 쓰게 했고, 북인에게도 벼슬길을 터놓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조정은 노론이 절대다수였고 온건 소론이 때때로 득세하는 분위기였다. 원경하는 진정한 탕평은 인재를 고루 쓰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남인과 북인도 쓰면서 그들의 불만을 풀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조는 자기의 심중을 알아주는 원경하를 무척이나 신임했다. 조정의 모든 일을 그와 의논했는데, 그의 논리정연하고 공평한 건의는 대부분 왕에게 받아들여졌다. 이에 힘입어 그는 조정에 나온 지 10년 만에 박문수의 뒤를 이어 인사권을 쥔 이조판서와 병권을 쥔 병조판서 같은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의 인사정책은 늘 공평했지만 예전의 동료였던 노론은 기회만 있으면 그를 헐뜯기에 바빴다.
송인명에 의해 그에게 부제조라는 원로직이 추천되었는데, 이 벼슬을 받으면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그는 아직 이 반열에 들 나이가 아니라고 우겨 끝내 이 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 뒤 1747년(영조 23) 노론 계열인 김양택이 상소를 올렸는데 이런 구절이 있었다.
“위로 임금의 뜻에 맞추어 신임을 얻어서 지나치게 벼슬을 얻고는 못할 짓이 없는 모양을 보인 자가 조정에 있사옵니다.”
영조는 김양택을 불러 그런 자가 누구냐고 힐난하며 물었다. 김양택은 서슴없이 원경하 · 박문수라고 대답했다(《영조실록》 권65, 23년 3월조).
그가 죽자 실록의 사관은 이렇게 썼다.
그가 오광운(吳光運)의 무리와 함께 조정에서 대탕평을 부르짖어 벼슬아치와 벗들이 모두 수치로 여겨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 《영조실록》 권97, 37년 5월조
이것이 편파적인 기록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만큼 그의 주장은 같은 계보에게서도 미움을 받은 것이다. 이어 사관은 그의 검소한 생활을 기록하면서 “그러나 내심은 음험하여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가 어려웠다. 경대부라도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자는 헐뜯어서 말을 하여 남아날 사람이 없었다”고 곧바로 헐뜯으며 실상과 다른 기록을 전했다.
그러나 그가 추진한 일은 이것과는 사뭇 달랐다. 영조는 그를 헐뜯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뿐 아니라 오히려 헐뜯는 자들을 억눌렀다. 영조는 원경하와 박문수를 세손(世孫, 뒤의 정조)의 사부로 삼아 다음 왕을 이을 세손의 몸가짐과 학문을 가르치게 했다. 신변이 위태로운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정치의 폐단을 고치는 데 주력하다
그는 대탕평을 추진한 일 외에 두 가지 큰일을 해냈다. 첫째는 군역 비용으로 내는 신포와 공물을 쌀로 환산해 바치는 대동미의 양을 감하게 한 것이다. 신포는 장정 머릿수에 따라 일정량을 내게 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과중하거나 부정으로 징수되어서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대동미도 부담이 과중할 뿐 아니라 중개인들의 농락이 많았다. 이에 그는 1차로 경기지방부터 그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임금에게 건의해 관철시켰던 것이다.
다음은 과거의 폐단을 시정한 것이다. 시관(試官)들은 모두 서울의 권세가가 맡아, 과거 보는 유생들을 실력보다 정실로 뽑아 합격시키는 폐단이 무수히 저질러지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시관을 지역과 당색을 가리지 말고 고루 뽑아내야 한다고 건의해서 이를 실현시켰다.
그는 끝내 정승의 반열에 서지 못하고 60세에 봉조하(奉朝賀, 2품 이상의 퇴임한 벼슬아치에게 종신토록 그 품계에 맞는 녹을 주는 특례)가 되어 실직에서 물러 나왔다. 그는 파벌에 희생되어 정승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그는 실직에서 물러 나온 지 2년 만에 병을 얻어 죽었다. 반대파는 그가 병을 얻자 ‘울분 탓’이라고 모략질을 했다. 분한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죽자 영조는 친히 제문을 지어 그의 죽음을 위로했다. 그리고 원경하의 아들 원인손(元仁孫)에게 전라감사를 시켜 보내면서 원경하에 대한 보답의 뜻을 나타냈다. 원인손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정조 아래에서 탕평책의 실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원경하는 출신배경이 좋았지만 그것에 기대지 않고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는 또 문장에 능하고 과문(科文, 과거과목의 글)에 뛰어났지만 늦은 나이에야 과거에 응시했다.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은 권력을 쥐기 위해 당쟁을 벌이고 현실적인 이해를 계산해 탕평책을 내세웠지만, 그는 끝까지 사심 없이 대탕평을 밀고 나갔다. 그래서 그를 반대하는 세력은 그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이천보(李天輔)는 노론의 인물로 그와 절친한 친구지였지만 그의 대탕평에 불만을 품고 절교했다. 이 둘 사이를 두고 다시 시비가 붙었는데 이천보를 따르는 자들을 이붕(李朋), 원경하를 따르는 자들을 원붕(元朋)이라고 지목하여 또 다른 당파를 지었다. 그야말로 고질병이었다. 그 뒤 이천보가 죽었을 때 원경하가 제문을 지어 남달리 조문을 보낸 일을 두고 뼈대가 없다고 비웃어 댔다. 이것은 비난을 하기 위한 억지 논리였다.
그가 민중의 고통을 생각해서 조세를 감면하려고 노력한 일과 권문세족만이 부정으로 과거에 합격하는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심혈을 기울인 것에 관해서도 반대파는 인심을 얻고 명망을 낚으려는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공평한 마음과 곧은 행동이 현실이해에 따라 각기 다른 평가가 내려질 수도 있다는 본보기일 것이다. 그에게 병조판서가 내려졌을 때에 벼슬아치들의 보통 관례대로 하면 두세 번 사양하는 척하면서 받았는데도 그는 그냥 널름 받아들였다. 그는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는 솔직한 성품이었다. 그는 타협과 균형을 위해 노력했지만 노론은 노론대로 자신들을 두둔해 주지 않는다고 비난했고, 남인은 다른 당파라고 업신여기고 냉대했다.
오늘날 그의 행적은 역사에 교훈으로 남았다. 그의 이름을 역사에서 다시 찾아보는 것도 이런 데에 뜻이 있는 것이다. 그는 남달리 왕의 신임을 얻고 또 높은 벼슬을 누렸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청렴하게 살았다.
그의 묘소는 오늘날 성남에 속하는 분당 사송동에 있다. 묘소도 그의 검소한 생활태도만큼이나 깔끔하고 소박하게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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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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