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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황현

黃玹

사라진 나라의 아름다운 절개

요약 테이블
출생 1855년
사망 1910년

망국을 앞에 두고 죽음을 택하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제에게 완전히 넘어갔을 때에 지리산 구례 땅 월곡리에 은거하던 한 선비가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기고 죽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그리고 선비들은 그의 시를 너도나도 베껴 외웠다. 그 한 구절을 보면 이러하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나라는 이미 사라졌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 돌이켜보니
문자나 안다는 사람 인간되기 어렵구나

그는 죽으면서 거창한 뜻을 비치지도 않고 다만 지식인 또는 거사로서 망한 나라를 앞에 두고 죽음을 택한다고 읊었을 뿐이다.

황현

황현이 남긴 작품에는 번득이는 비판정신이 들어 있다. 자신의 울분은 물론 망국의 설움과 당시의 행태들을 제대로 묘사하려 애썼으며, 이런 그의 노력으로 오늘날 충실한 역사기록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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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비가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다. 그는 세종 때 정승을 지낸 명재상 황희의 후손이다. 그의 선조들은 황희 이후 그만그만한 벼슬을 지내며 살았으나, 그 한 갈래는 인조반정 이후 몰락하여 호남지방으로 낙향했다.

특히 황현의 아버지는 광양 땅 서석촌에 살면서 어렵사리 살림을 꾸려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 맏아들이 어릴 적부터 천재로 소문이 나자 벼슬을 시키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순천, 광주 등지에서 보인 백일장이나 초시에 번번이 나가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서울로 가서 명문대가들과 어울려 출셋길을 찾게 했다.

황현은 20대에 서울로 나와 명사들과 어울렸다. 그가 서울로 와서 명사들과 어울리게 된 것은 이건창(李建昌)을 통해서였다. 당시 이건창은 강화도 출신이면서 그의 할아버지 이시원(李是遠)의 명망을 업고 이름이 중앙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시원은 철종이 강화도에 살았을 때에 친분이 있어 판서 벼슬을 지냈고, 또 병인양요 때에는 나라의 정기를 위해 양잿물을 먹고 죽어 큰 명망을 얻었다.

이건창은 서울에 살면서 당대 개화파의 우두머리요 시인이요 명망이 높은 강위, 개성 출신의 사학자요 문장가인 김택영 등과 함께 명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여기에 광양의 시골 선비가 한자리에 끼어든 것이다. 이건창을 처음 찾아갔을 때에 키가 작은 이건창을 보고 그가 말을 건넸다.

“주인이 누구요?”
“나요.”
“아니오.”
“아닌 것이 아니오.”
“주인은 키가 8척 장신일 텐데 지금 당신은 6척도 못 되니 결코 아닐 것이오.”

이에 이건창이 크게 웃고 황현을 즐겁게 맞이했다 한다. 이렇게 재치가 있었다. 황현의 시 재주와 명민함이 이들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야말로 촌닭이 하루아침에 등단한 격이었다. 그만한 또래의 이들은 늘 어울려 시를 짓고 시세를 한탄하며 나날을 보냈다.

은거해 명저들을 남기다

1883년에 고종 임금은 인재를 널리 구하기 위해 보거과(保擧科)를 보인다고 공포했다. 황현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시관이 그의 글 솜씨를 보고 1등으로 합격시켰다가 그가 호남의 촌 선비라는 것을 알고는 2등으로 바꾸어버렸다. 다시 임금 앞에서 마지막 시험을 보고 나서는 더욱 등급이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에는 서울의 몇몇 문벌가 출신이 아니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과거에 합격시키지 않았다. 그 자신이 이런 비리를 모를 리 없었지만 인재를 널리 구한다고 실시한 보거과에까지 이런 작태가 그대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여간 낙망하지 않았다. 그는 서울생활을 뿌리치고 낙향했다. 거처를 광양에서 구례 만수동으로 옮기고 결코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을 결심을 굳혔다.

이런 황현을 보고 이건창은 늘 마음을 썼다. 1887년에 박정양(朴定陽)이 미국을 시찰할 때나 이유원(李惟遠)이 울릉도 탐사에 나갈 때에 그를 수행원으로 천거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수행원이 되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하다”고 핑계를 대고 이를 거절했다.

그는 이처럼 정계에 끈을 대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1888년에 다시 그에게 성균관의 생원시에 나갈 것을 권고했다. 이에 마지못해 생원시를 보았는데 1등급으로 합격했다. 그의 나이 서른세 살 때였다. 그는 결국 아버지의 소망을 이루어 성균관 생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합격은 그를 알아보는 친구 정만조(鄭萬朝)의 힘 때문이었다. 마침 정만조의 형 정범조(鄭範朝)가 시관이었는데, 정만조가 “황현이 1등급에 끼지 못하면 이 시험은 시험이 아니다”고 말하여 뽑힌 것이다. 정만조는 강위의 친구였고 이건창, 김택영 등과 어울린 명사였다. 그러나 나라는 더욱 엉망이 되어갔다. 마침 그의 부모도 연달아 돌아가시자, 그는 다시 구례 땅 만수동으로 돌아와 다시는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만수동에서 많은 책을 저술했다. 19세기 문벌정치 이후 흥선대원군의 정책, 민씨 척족세력의 등장, 개화파의 움직임 그리고 외세의 개입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역사적 현실을 보고 이를 글로 써서 남기려 한 것이다. 그는 많은 역사서적을 읽고 분석했다. 특히 당쟁관계의 책들을 읽었는데,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싸운 신임사적(辛壬事蹟)에 대한 책을 제대로 입수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이때 그가 지은 책들이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 《동비기략(東匪紀略)》 등이다. 지금 전해지지 않는 《동비기략》을 빼고 이 책들은 모두 그가 죽을 때까지의 사실을 담았다. 그는 관보를 입수하기도 하고 서울에서 들은 이야기를 담기도 하며 주변에서 전해지는 내용을 적기도 했다. 결코 들은 대로 함부로 적지 않았다. 이를 분석 · 정리하여 기재했고, 주제와 세부 기록을 적는 방식인 강목체(綱目體)로 체계를 세워 제시했다.

그의 비판정신은 곳곳에서 번득인다. 어떤 사물을 보고 이를 기술하면서 중간에 자기 의견을 덧붙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것이다. 따라서 민씨와 흥선대원군의 싸움, 왕의 나약함, 외세를 업은 개화파, 모든 선비의 비리를 남김없이 꾸짖었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을 일으킨 농민군 지도자들에게도 그 방법의 잘못을 꾸짖었다. 황현은 당시의 이런 정치현실 또는 사회현상이 모두 나라를 망친다고 본 것이다.

특히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을 겪고 나서 이를 충실히 기술하여 오늘날 이 관계기록으로는 가장 충실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또 의병활동의 실상을 전하면서 그 의미를 특별하게 부각시켰다. 그의 시에도 우국충정을 읊은 것들이 많다. 단순히 음풍농월만 일삼은 것이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그를 두고 전통적인 지사풍의 선비라거나 근왕적(勤王的) 척사위정 계열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 본 것이다. 물론 젊었을 때에는 신채호와 같이 그와 같은 면이 없지 않았겠으나, 적어도 그가 서울에 와서 활동한 이후에는 그런 면모가 없었다. 그가 서울에서 사귄 강위나 박정양은 개화파였고, 이건창, 김택영은 진보적 선비들이었다. 특히 끝까지 절친한 사이였던 이기는 철저한 후기 개화파였다.

또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세상이 변하는 것을 생각해서 서양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이에 대해 김택영은 〈본전(本傳)〉에서 “역대의 사적에서 나라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진 것과 성한 시대와 쇠망한 시대의 자취와 군사 · 형벌 · 재정 · 조세에 대한 것을 읽기 좋아했고, 또 서양의 이용후생의 기술에 마음을 쏟아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려는 생각을 가졌다”고 쓰고 있다. 또 그는 학교를 통해 신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보고 학교설립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전통적 선비도 아니었고 보수유림 세력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농민전쟁에 동조하는 변혁세력도 아니었다.

어쨌든 저술에 몰두할 즈음, 1898년 강화도에서 부음이 날아들었다. 이건창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이건창은 죽으면서 “황현을 한 번 보고 죽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했다. 이 부음을 받고 그는 6백 리 길을 단숨에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통곡해 마지않았다. 이건창은 황현처럼 당쟁의 역사를 정리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완성해 놓고 죽었다.

구례 만수동에 은거한 뒤 첫 바깥나들이를 친구의 조문으로 끝내고 다시 돌아왔다. 나라는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1905년 봄에 황현은 김택영으로부터 “중국으로 건너가 몸을 바친다면 섬아이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낫겠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동행할 것을 권고했다. 황현은 이에 병약한 몸을 걱정하면서도 아무도 몰래 노비를 마련하고 가을에 떠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6월에 종가의 형이 작고하여 어린 조카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맡았다. 근친도 없는 과부 형수와 어린 조카를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유언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친구 김택영만 중국에 보내고 홀로 고국에 남게 되었다. 그 자신은 만수동에서 같은 고을 월곡리로 옮기고 마음가짐을 새로이 했다.

끝내 을사조약이 맺어져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기자, 더욱 친구를 그리는 정에 사무쳤다. 을사조약의 소식을 듣고 며칠씩 밥을 굶으며 통곡했고, 여러 애국인사의 순절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기리며 새삼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는 절의를 지키며 깨끗이 처세한 도잠, 고염무 등 열 사람의 시로 병풍을 만들어 그를 보며 처신의 거울로 삼았다. 그리고 더욱 울분 속에서 저술에 몰두하는 나날을 보냈다.

끝내 순국하다

1910년 8월, 고종황제는 조칙을 내려 정식으로 한일합방을 선포했다. 이 조칙은 구례에도 전달되었다. 그가 그 과정이나 전말을 모를리 없었다. 그는 죽을 결심을 굳혔다. 그의 동생 황원(黃瑗)은 형의 뜻을 짐작하고 말했다.

오늘날 인망이 있는 사람으로 절개를 위해 죽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스스로 죽지 못하면서 남이 죽지 않는다고 꾸짖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인가? 종사가 망하는 날 사람마다 모두 죽어야 옳거늘 유난히 시망(時望)이 있는 사람만 죽어야 하겠는가?

나라 망한 소식을 들은 지 이틀 뒤 손님이 찾아와 밤늦도록 바둑을 두다가 새로 배달된 〈황성신문〉의 보도를 보고 있었다. 마침 이웃집 노인이 찾아오자, 술을 내오게 하여 석 잔씩 돌리고 말했다.

내 오늘 저녁 일이 있으니 내 아이의 처소에 가서 자 주시오.

이들이 나가자 문을 닫고 〈절명시〉 네 수를 써놓고, 장례를 간소히 할 것과 시문을 정리해두라는 따위의 유언을 썼다. 닭이 두 홰 울자, 그는 남은 소주에 아편을 타서 마셨다. 그리고 가물거리는 정신을 가누며 편안히 누워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맏아들이 이 사실을 알고 숙부에게 알렸고, 황원이 달려와 그를 일으키려 하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네가 어찌 나를 일으키려 하느냐? 내 정신이 평상시와 같아 조금도 고통이 없다. 약이 효력이 없으면 어찌할꼬?

황원이 재빨리 어린아이 오줌과 생강즙을 가져와 먹이려 했지만 그는 이를 쏟아버렸다. 그리고 몇 마디를 당부하고 이렇게 말했다.

약을 먹을 적에 입에서 뗀 적이 세 번이었구나. 내가 이렇게 어리석은가?

죽을 약을 마시면서 주저했다는 말을 마지막 가는 길에 솔직히 털어놓았다. 한낮이 된 뒤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다가 다음 날 새벽닭이 두 홰 운 뒤에 운명했다. 아편을 먹은 지 꼭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시문집과 저술들은 멀리 중국에 가 있는 김택영에게 전해져 상하이에서 간행되었다.

그는 분명히 지사요, 시인이요, 역사학자였다. 시대가 낳은 인물이었으나 시대의 갈등을 여러모로 겪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고 해마다 구례의 매천사와 광양의 묘소에서 그를 기리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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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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