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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05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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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101년 |
불법 정화에 나선 문종
의천(義天, 1055~1101)은 왕자로는 드물게 출가한 승려였다. 1055년 문종의 넷째 아들 의천이 태어났다. 이는 궁중의 경사라기보다 고려불교의 서광이라 할 수 있다. 의천이 태어난 다음해에 문종은 벼슬아치들의 학정으로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여러 곳에 어사를 내려 보냈다. 문종은 불교의 폐단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석가께서는 청정을 가장 먼저 가르쳐 더러움을 멀리하고 탐욕을 끊으라 하셨다. 지금 신역(身役)을 피하려는 무리들이 이름을 사문에 의탁하여 재물을 모으고자 농사를 짓고 가축 기르는 일을 본업으로 삼아 장사에 힘쓰는 것이 풍습처럼 되었다. 그리하여 나아가서는 계율을 어기고 물러가서는 청정의 서약을 업신여긴다. 어깨에 걸치는 법복으로 술동이를 덮고 강론하고, 범패 외는 마당을 파와 마늘을 심는 밭으로 떼어주었다. 장사꾼과 통하여 사고팔면서 술 마시며 놀이를 즐기고 있다. 절간의 꽃밭은 떠들썩하고 난초 화분은 지저분한데, 승려들은 속세의 관을 쓰고 속세의 옷을 입고 절을 수리한다고 핑계를 대고는 깃발과 북을 들고 노래하고 불면서 여염집에 들락날락한다. 그러면서 멋대로 시정의 사람과 싸워 피투성이가 된다. 짐은 선악을 구분하고 기강을 바로잡고자 온 나라의 이런 절을 도태시키고 계행(戒行)을 정성껏 닦는 자만을 편안히 도를 닦고 살게 하겠노라. 이를 범하는 자는 법으로 다스리겠노라.
- 《고려사》 〈세가(世家)〉
현실을 아주 냉철히 살펴본 준엄한 지시였다. 비리를 막자는 것이지 불도들을 탄압하자는 뜻이 아니었다. 이 지시에 따라 많은 절을 헐어버렸다. 헐린 절들은 대부분 귀족들이 벌여놓은 원당이나 권력을 끼고 중생제도를 외면하는 사원이었다. 민중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개인이 집을 보시하여 절로 삼는 일을 금지시켰으며 한 집안에 아들이 셋 있을 경우, 15세가 넘은 아들 하나만을 출가하는 것을 허락했다.
문종은 재위 37년 동안 누구보다도 불법의 진흥에 앞장섰다. 관례에 따라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궁중에서 법회를 열고 일곱 차례나 승려에게 반승(飯僧)을 베풀었는데 최고 3만 명이 모여든 적도 있었다. 현화사에 국가 소유의 둔전(屯田) 2천 2백여 결(結)을 시주하기도 했다. 벼슬아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2년에 걸쳐 개성 덕적산에 흥왕사를 짓고 원당으로 삼았는데, 그 규모가 2천 800칸이나 되었다. 그리고 성종 때에 폐지되었던 팔관회와 연등회를 30년 만에 부활시켰다. 문종의 이러한 행적이 이율배반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의 조서는 어디까지나 사찰과 승려의 타락을 방치할 수 없어 불가피하게 내린 개혁 조치였다.
시대적 요구에 따른 새로운 종파, 천태종
어느 날 문종은 여러 아들을 불러놓고 “누가 스님이 되어 복전의 이익을 얻겠는가?”라고 물었다. 다른 아들들은 아무 말이 없었으나 11세가 된 후(煦, 의천)가 나서서 “제가 출가할 뜻이 있습니다. 오직 부왕의 분부를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의천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개경 외곽에 있는 영통사 등에 머물면서 화엄종의 교지를 배웠고 유교의 가르침까지 두루 섭렵했다. 그는 송나라 명승 정원법사(淨源法師)에게 편지를 보내 교분을 넓혔으며 정원법사의 저술을 모두 얻어 보았다. 그의 탐구욕은 이에 머물지 않았다.
의천은 아버지와 형들에게 중국에 가서 불법을 배워오겠다고 청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했다. 특히 어머니가 한사코 말렸다. 문종이 죽은 뒤인 1085년 사월 초파일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기고 그는 제자 두 명과 함께 송나라 상선을 타고 송나라 수도 변경(지금의 하남성 개봉)으로 들어갔다. 그때 송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밀려 북경 일대를 내주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교류를 하면 육로를 피해 배편을 이용하고 있었다. 의천은 그만큼 험한 길을 왕래한 것이다.
당시 변경에는 인도승과 라마승을 비롯하여 남쪽 여러 나라의 승려들의 내왕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많은 승려들과 교류를 하면서 송의 철종 황제를 만나고 그곳 벼슬아치들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는 이에 만족치 않고 고행을 거듭하며 항주 등지 남쪽의 여러 절을 두루 돌아보았다. 그리고 서호 주변의 절에도 드나들었다. 그런데 예전과 다른 기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의천은 출국할 때 많은 불교 관련의 책을 가져갔다. 당시 송나라는 거란과 오랜 전쟁을 벌이면서 불경 관련의 책들이 불에 타서 구독하기 힘들었다. 이를 알고 있던 의천은 가져간 책들을 그곳 승려들에게 보여 주었다. 종래에는 송나라에서 불교책을 들여 왔었는데 이때는 도리어 수출하는 모양이 되었다.
이렇게 1년 2개월을 보낸 뒤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보고 싶어 귀국을 종용하는 간곡한 편지를 송나라 황실에 보낸 것이다. 의천은 고국에 돌아와 흥왕사에 머물면서 송나라에서 가져온 불경과 경서 3천여 권을 나라에 바쳤다. 그는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연달아 북쪽의 요나라와 송나라에서 책을 들여와 찍어냈다. 이때 간행한 책이 4천 700여 권에 이르렀으며 여기에는 원효의 저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국청사에 머물 적에는 고승 1천여 명이 모여들어 거처할 방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때 본격적으로 천태 교학을 강의하면서 천태종을 창시했다. 그리고 2년 뒤에 천태종은 세상에서 공인된 종파가 되었다. 그가 새로운 종파를 창시한 것은 시대적 요구에 따른 것이다. 이 무렵 선종과 교종의 대립과 갈등이 재연되고 있었다. 한편 국제관계로는 북방에서 여진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다. 의천은 견문이 넓고 사려가 깊으며 합리적 판단을 하는 품성에다가 왕자라는 높은 신분도 지니고 있었다. 남다른 지도자의 역할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관념을 실천으로, 대립을 융화로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문벌세력을 누르며 불교의 타락을 막고 민중을 추동하여 여진의 침입에 대비해야 하는 책무를 스스로 걸머졌다. 이런 이념을 처음에는 화엄종 사상을 중심으로 펴려 했으나 나중에는 천태종을 통해 구현하려 했다. 의천은 중국의 절강성 천태산의 국청사를 찾아가 천태종의 교리를 깊이 있게 새겼다. 국청사는 천태종의 중심 사찰이다. 이 절 앞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승려들이 공부할 때 거처했던 신라원이 있다.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 고려에서 천태종의 교의를 펴보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천태종에서는 선과 지혜의 조화를 강조한다. 그는 특별히 조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천태종의 기본 경전은 《법화경》이다. 《법화경》의 중심 사상은 《화엄경》보다 구체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에 있다. 곧 사람의 등급을 셋으로 나누는데 “아무리 모자라는 중생이라도 성불할 수 있다”고 했고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중생”이라고도 했다. 그러니 셋이 마침내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의천은 부처가 마지막으로 설법한 이 사상을 고려의 현실에 뿌리내리도록 했다. 신분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평등관의 구현이었다.
그가 존숭하는 선사는 원효였다. 의천은 원효의 화쟁사상을 어떻게 새로운 환경에 맞는 이념으로 만들 것인지 고심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하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제창했다. 화엄종을 비롯하여 교의만을 닦는 종파들은 마음의 실체를 버리고 바깥에서 허망하게 진리를 찾아 헤맨다고 보았다. 선종처럼 참선에만 치우치는 종파들은 바깥의 현실은 외면하고 마음에만 진리를 밝히려 하여 현실을 소홀하게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한쪽에 치우치는 것은 아집이라고 했다. 그래서 화엄종과 선종이 벌이는 다툼에 대해 이렇게 설파했다.
토끼뿔은 실재하지도 않는데 한쪽에서는 길다고 우기고 한쪽에서는 짧다고 우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이처럼 의천은 교의 공부와 함께 선을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는 관념을 실천으로, 대립을 융화로 이끌 수 있는 이념이었다. 그래서 교관겸수를 원융사상이라고 하며 이를 표방한 천태종을 총화불교라고도 한다.
의천은 자신이 처음 몸담았던 화엄종의 일부 세력과 대립했고 법상종을 받드는 문벌 귀족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다. 뒷날 왕사로 추대된 학일(學一)은 의천의 협조를 거절하고 선종의 독자성을 지키려 했다. 학일은 의천이 죽은 뒤 청도의 운문사에 은거하면서 선에 정진했다.
화폐의 유통을 주장하다
의천의 실천적 현실인식은 화폐의 통용을 강력하게 추진한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송나라에서 돌아와 형인 숙종에게 화폐를 통용하게 해달라는 건의를 올렸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돈은 몸은 하나이지만 역할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 생김새를 보면 둥글고 구멍은 네모납니다.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고 네모난 것은 땅의 모양입니다. 이는 하늘이 온갖 것을 완전하게 덮고 땅이 완전하게 받쳐주는 것을 나타냅니다. 둘째, 돈은 샘물처럼 끝없이 흘러나와 마르지 않습니다. 쓰면 없어지는 곡식과 다릅니다. 셋째, 돈을 백성에게 퍼뜨리면 위아래 어디를 돌아다니더라도 길이길이 막힘이 없습니다. 넷째, 돈은 이익을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나누어줍니다. 그 날카로움은 칼과 같으나 늘 써도 무디어지지 않습니다.
- 《대각국사문집》
그는 송나라의 화폐유통을 보고 고국에 널리 통용케 하여 민생에 도움을 주려 했다. 그의 이런 주장과 이론은 숙종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고려 역대 조정에서도 화폐의 통용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숙종은 주전관(鑄錢官)을 두어 화폐를 만들었으며 주전도감(鑄錢都監)을 두어 동전을 찍어냈다. 이리하여 의천은 한국 화폐 발달사에 큰 이름을 올렸다. 이는 그가 승려로서 정치권력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 중생제도를 위한 한 방편이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이를 현실참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숙종은 한편 의천에게서 자문을 받아 불교 개혁을 서둘렀다.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를 들어보자. 당시 비구와 비구니들은 친목을 위해 만불회(萬佛會)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비구와 비구니들은 서로 연계하여 가난한 이와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하고 고리대 등 이권 챙기기에 열중했다. 그리고 신도들을 유혹하여 시주를 받아냈다. 숙종은 이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의천은 승려로서 최고직인 승통(僧統)이 되었고 대각국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는 결코 왕자라는 혈통에 힘입은 것만은 아니었으나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의 명망은 양식 있는 승려만이 아니라 신도들에게 더욱 높았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의천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의식 기반과 문벌체제의 타파라는 시각에서 출발하여 불교의 전반적이고 구체적인 개혁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절들은 귀족의 원당으로 전락하여 재산 도피처가 되고 정치권력 투쟁에 이용되는 등 현실적 모순에 휩싸였지만 이를 전면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귀족불교를 민중불교로 끌어내리는 데 실패했고 원효의 깊은 뜻을 올바르게 실현하지 못했다. 의천이 죽고 난 뒤 그가 추구했던 원융사상은 빛이 바랬고 불교의 타락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 까닭은 첫째, 밑으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범위한 승려와 신도를 중심으로 결사운동을 벌이지 않은 것이다. 둘째, 조직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현해내지 못했다. 지나치게 이념 제시에 열중한 것이다. 이러한 의천의 개혁사상은 뒷날 태어난 지눌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지눌에 의해 그 한계는 상당히 극복되었다.
오늘날 한국전쟁 당시 불타 없어진 영통사를 남쪽의 천태종에서 천태종의 본산이라 하여 복원했다. 이 복원과정에서 의천의 행적이 적힌 비가 발견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 비는 오랜 풍상이 할퀴어 훼손되어 있으나 그 원형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개봉과 항주의 서호 언저리 등 그가 머물렀던 여러 절에 그의 행적을 기록해 두어 남쪽 관광객의 발길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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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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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의천 –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 주니어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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