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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이회영

李會榮

독립운동의 초석을 마련한 지도자

요약 테이블
출생 1867년
사망 1932년

최초의 이주사에 얽힌 사연

1911년 초봄, 압록강 건너편 안동(지금의 단동)에서 동쪽으로 횡도천(橫道川) 가는 500리 길에는 말 100여 필의 행렬이 얼음길을 타고 달리는 장관을 이루었다. 그 중의 한 필을 40대 중반의 씩씩한 장년이 말고삐를 잡고 몰아가고 있었는데 이 사나이가 바로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이다.

이회영과 더불어 형들인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 아우들인 시영(始榮), 호영(護榮)과 그 식구들, 그리고 심부름꾼 등 모두 60여 명이 짐을 나누어 싣고 횡도천 임시 거점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씨 형제들은 어떤 연유로 몽땅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던가. 그리고 어떻게 서간도 지역의 본격적인 최초의 이주사를 기록하게 되었는가.

이회영은 조선의 명신 이항복의 후손이며 19세기 말기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유승(李裕承)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나라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며 그는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교육운동과 사회운동에 투신했다. 나라에서 탁지부 주사 따위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했다.

이때부터 그는 우당(友堂)이라는 아호로 통했으며 서울의 상동교회(중구 남창동)를 중심으로 전덕기(全德基) 목사, 나인영, 이상재 등의 동지들을 만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아전과 노비 등 낮은 신분층에 존대하는 말을 하여 신분해방을 실천했고, 가정이나 사회에서 적서의 차별을 없애고 개가와 재혼을 장려하는 등 봉건잔재를 타파하고 나섰다. 그는 과부가 된 자신의 누이를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가하도록 주선했다. 뒷날에는 자신의 종을 독립군으로 삼기도 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나인영과 함께 5적 암살에 나섰다. 그는 의병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다가 일제에 섬멸당하자 그 기지를 만주로 옮길 것을 이동녕, 이상설, 여준 등과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이상설이 먼저 러시아 땅인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가 열릴 적에 이회영이 막후에서 밀사파견을 공작한 결과 이상설이 수석대표로 결정되었다. 이 사건으로 끝내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이상설은 영구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돌아올 수 없는 망명객이 되었다.

이회영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해 헤이그평화회의에 참석한 뒤 만주에 망명해 있는 이상설을 찾아가 새로운 운동의 활력을 위해 국내외의 운동기구가 발족되어야 하며, 그 기구를 통해 국민교육과 국민각성을 도모하고 비밀조직으로 운동의 중추를 이룩하고 만주에 광복군을 양성하고 자금을 준비할 것 등을 합의했다. 이때 이상설은 만주지역, 이회영은 국내를 각기 맡기로 합의했다.

이회영은 고국에 돌아와 대성학교, 오산학교, 협동학교 등에 인물을 배치하고 자신은 상동교회 안에 둔 청년학원의 학감이 되었다. 한편 비밀조직으로 이동휘, 이동녕, 양기택, 이갑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다. 이에 따라 상동교회는 신민회의 아지트가 되었다. 뒷날 조선총독부는 독립지사들이 우글거리는 상동교회를 주목한 끝에 1911년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그리하여 안창호 등 지도자들이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망명한 뒤에 일어난 것이라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압록강물 어느 땐들 마르리

이회영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이에 끝내 나라가 완전히 일제에 넘어갔다. 이제 더 이상 국내에서 버틸 수 없게 된 그는 온 형제와 식구들을 설득하여 6형제가 몽땅 간도로 이주하기로 했다. 특히 그의 둘째형 석영은 영의정을 지낸 유원(裕元)의 양자로 들어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만석지기 땅을 팔아 길을 떠났다. 이렇게 온 가족이 그의 설득에 호응한 것은 그의 강한 의지와 지도력을 믿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그의 인생 제1기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씨 일가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일대에 터전을 잡았다. 이어 1911년 봄에는 이들 중 이석영, 회영 두 집 식구는 더욱 깊은 산골인 추가가(鄒家街)라는 마을로 옮겼다. 여기에서 경학사(耕學社)라는 민단적 성격을 띤 자치기관의 설립을 보게 된다. 그 목적은 교민들에게 농업을 장려하여 생활을 안정시키고 교육을 보급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사상적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었다. 사장은 이상룡, 내무부장은 이회영, 재무부장은 이동녕이 맡았다.

이 경학사 산하에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했다가 이 강습소를 토대로 신흥학교를 정식 발족했다. 이 학교의 교주(校主)는 이석영, 사장은 이상룡이었으나 실제 설립자는 이회영이었다. 이 학교의 본과는 중학과정이며 특별과는 사관(士官) 양성이었는데 교사로는 구한말 무관학교 출신인 장도순(張道淳), 제1회 특별과 수료생으로는 변영태(卞榮泰) 등이 있었다.

이회영은 경학사 설립을 통해 동포의 자치조직을 만들고, 신흥학교 설립으로 꿈에 그리던 사관양성의 빛을 보았다. 뒷날 경학사는 부민단(扶民團), 통의부(統義府), 국민부(國民府) 등으로 이어지면서 남만주 항일투쟁의 기간조직이 되었으며, 뒤에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어 만주 한인 군사교육의 첫 과정을 이룩해놓았다.

뒤이어 이회영은 러시아 땅인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이상설과 함께 한국사관학교를 설립하기로 그곳 극동 총독과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극동 총독은 그 설립자금 중 일부인 50만환을 한국측에서 부담하라고 요구했다. 고국에 돌아온 이회영은 어렵사리 고종과 서신을 통했다. 고종은 이미 이회영의 인물됨과 활동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민영달에게 지시하여 50만환을 전달하도록 했다. 이회영은 이 돈을 하바로프스크에 전달하려 했으나 이미 볼셰비키정권이 들어선 뒤여서 사정은 달라져 있었다.

형제와 뜻이 달라 갈라서고

한편 만주의 아내와 아들이 서간도 일대에서 살아가기가 어려워 이때 서울로 합류해 와 있었다. 1919년 첫 무렵 그는 다시 가족과 함께 상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런데 이 무렵 고종이 이회영 등의 주선으로 북경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가 이 사실이 누설되어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다.(이관식의 《우당이회영실기》)

고종이 죽은 뒤 곧바로 3·1운동이 일어났고,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즈음 국내의 인사들이 물밀듯 상해로 몰려들었다. 이회영은 임시정부의 창립을 반대했는데 망명정부보다는 운동조직이 현실적으로 더 요청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 국내의 청년학도들이 몇몇 지도자의 노선을 무조건 따르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판단한 끝에 나온 주장이다. 그는 다른 기성세대와 달리 현실을 이해했다. 시대가 변하고 정세가 변했으니 이에 따른 운동의 방향과 방법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운동은 약자로서 세계적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강자와 맞서는 운동이므로 우리가 지닌 온 힘을 합하여 하나로 단결된 항쟁을 해야 하는데 과거부터 내려오는 지방적인 또는 인물중심의 대립 등을 일체 지양하고 한마음으로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자고 했다.(이정규 《우당이회영약전》)

결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예전 당파에 따라 파당을 짓고, 지방이 다른 기호와 서북이 갈라지고,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타협을 거부하는 등 주도권을 놓고 쟁투를 벌이기 일쑤였다.

그가 “정부라는 행정적인 조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운동단체를 결성하자”라고 주장한 것은 상해에 와서 임시정부 조직과정을 직접 보면서 더욱 절실하게 느낀 탓이다. 그는 또 “혁명당본부와 독립운동본부와 정부는 성질이 다른 것이니 이를 깊이 고려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국내와 노령-간도의 대표들이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고 더 이상 상해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느끼고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때 평생의 동지였던 동생 이시영, 후배 이동녕과 길을 달리하게 되는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다. 또 한때 고종을 망명시키려 한 탓인지 복벽파(復辟派)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북경으로 돌아올 적에 그의 나이 50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는데 여기까지가 그의 제2의 인생과정인 셈이다.

독립을 위한 무정부주의

북경에서의 그의 생활은 전혀 새롭게 전개되었다. 공산 소비에트에 관심을 돌렸다가 조소앙의 부정적 견해를 참작한 끝에 회의를 갖기도 했고, 신채호와 함께 구미의 여러 정치제도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북경에서 중국 소설가 노신(魯迅), 러시아 시인 에로센코 등과 자주 만나 끊임없이 토론을 벌였다.

1923년 이회영은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목적으로 하며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새로운 사상가로 변신한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그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접근하게 되었다. 그는 아나키즘이라는 자유연합의 이상과 조직의 이론으로 새 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회영은 신채호, 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고 그 기관지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행하면서 패권을 추구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과 안창호계열이 벌이는 민족개량주의의 무실역행(務實力行)에 대한 시비를 벌이고 소작 농민운동을 위해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중국과 소비에트를 믿을 수가 없으니 세계무정부주의자의 연대와 지원으로 한국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노선이었다.

그는 몇 년 동안 한족연합회 구성 등의 일에 분주하다가 1930년 한때 천진에서 심한 가난 속에 은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어 상해에서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던 그는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을 조직화하려고 비밀리에 만주로 가는 길에 대련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문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그가 잡힌 것은 조카가 낀 한인 밀정의 정보 때문이었다 하니 의지에 찬 독립투사에게 깃든 가정적 비극이었다.

해방 이후 이회영의 이름을 아는 이가 적다. 일제는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를 가장 탄압했다. 8·15 이후 이승만 정권이 반공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써먹은 것과 비슷하다. 그리하여 그를 민족주의자로 추앙하기 이전에 무정부주의자로만 덤터기를 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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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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