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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전해 받은 아버지의 비방
조선시대 의원의 지위는 형편없이 낮았다. 비록 중인의 지위를 지니기는 했지만 정식 의원시험, 즉 잡과 의과에 합격한 경우에만 주어졌다. 대개 의원들은 대대로 가업을 이어 의술을 전수받았으며, 그들의 의술은 비밀로 전해 내려오기 일쑤였다. 정조시대 천민 출신의 명의 피재길도 의원의 아들이었다.
피재길(皮載吉)은 왕조시대 천업에 종사한 일곱 성씨각주1) 인 ‘천방지추마골피(千方池秋馬骨皮)’ 중 마지막인 ‘피’씨 성을 가진 낮은 신분의 사람이었다. 중인들의 내력을 적은 《시원록(始源錄)》에는 피씨들이 의원 집안이었다고 한다. 피홍집(皮弘集)은 약으로 종기를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했는데, 이 사람이 피재길의 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는 종기 전문가였고 약을 잘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재길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탓에 의원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고약 달이는 방법을 남편에게서 보고 들었던 것을 기억해 아들에게 그 비방을 성실하게 일러 주었다고 한다.(홍양호, 《이계집》 〈피재길 소전〉)
그러나 다른 의서를 읽을 지식도 없고 배울 곳도 없던 피재길은 체계적인 의학공부를 못 하고 다만 약재를 이리저리 모아서 고약 만드는 법을 알 뿐이었다. 그는 종기를 치료하는 고약을 만들어 떠돌아다니며 팔았기에 의원 축에 끼지도 못해 한낱 떠돌이 약장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파는 약이 용하다는 소문이 나서 그의 이름이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때 조정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정조가 큰 종기를 앓게 된 것이다. 정조는 어릴 때부터 체질 탓인지 종기를 자주 앓았는데, 40세가 되던 1793년 7월에 머리와 얼굴에 온통 종기가 돋아나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정조는 여러 분야에 지식이 해박한 임금이었다. 그는 자신의 체질을 소양(少陽)이라 진단하고 여러 탕제를 맞추어 쓰게 했다. 더욱이 의서에 “더운 여름날에는 침을 놓지 마라”고 씌어 있다는 의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침을 놓도록 명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종기는 가라앉지 않고 고열과 한기에 시달렸다. 고름이 얼굴과 턱에 더욱 심하게 번져 의관들은 극도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씨가 몹시 더워지자 탕건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신하들은 번갈아 숙직하면서 임금의 병을 돌봐야 했다. 이때 한 신하가 “피재길이 종기 치료에 이름이 자자하다”고 고하자, 정조는 피재길을 불러오라는 명을 내렸다.
정조의 어의가 되다
갑자기 임금의 부름을 받은 피재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임금이 온화한 모습으로 묻는 말에도 그는 몸을 벌벌 떨고 땀을 팥죽처럼 흘리며 겁에 질려 있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의관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임금은 피재길에게 가까이 와서 증상을 살펴보라고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너의 재능을 다해 보아라.”
“신에게 시험해 볼 만한 한 가지 치료 방법이 있습니다.”
피재길은 용기를 내어 말했고, 임금은 그 약을 지어 오라고 분부했다. 피재길은 정성을 다해 웅담에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 고아서 고약을 만들었다. 피재길이 그 고약을 가지고 정조에게 갔을 때, 정조는 다시 물었다.
“며칠이면 낫겠느냐?”
“하루면 통증이 그치고 사흘이면 나을 것입니다.”
벌벌 떨던 무지렁이의 말치고는 보통 당돌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고약을 붙인 뒤 정조의 종기는 보름 만에 말끔히 나았다. 임금은 내의원에 글을 보내 이렇게 분부했다.
“약을 바른 지 조금 뒤에 전날의 통증이 가시었다. 뜻밖에도 지금 세상에 이런 숨은 기술과 비방이 있었구나. 의술은 명의라고 할 만하고 약은 신방(神方, 효험이 있는 약방문)이라 할 만하다. 그의 공로에 보답할 방안을 의논하여 올리라.”
그러자 문신이 총책임자로 있던 약원에서는 씁쓰레한 마음으로 이렇게 아뢰었다.
“먼저 약원의 침의(鍼醫)로 임명하여 6품의 관복을 하사한 뒤에 마땅한 직분을 주게 하소서.”
먼저 적당한 벼슬을 주자는 것이다. 임금은 즉시 그를 나주 감목관(監牧官)으로 임명했다. 감목관은 6품으로 지방의 수령인 현감과 맞먹는 위치였다. 떠돌이 약장수가 하루아침에 임금을 모시는 처지로 바뀐데다 그 무서운 수령과 맞먹는 자리까지 주어진 것이다.(《정조실록》 38권, 17년 7월조)
조정의 의원들도 놀랐고 모든 벼슬아치들도 어리둥절해 했다. 나이 든 의원들도 그의 재능에 탄복해 그를 공손히 대했다. 피재길의 이름은 조정 밖에서 더욱 널리 퍼졌고, 그가 발명한 웅담고약은 천금 같은 약방문으로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앞날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정조는 그 뒤에도 종기가 나면 웅담고약을 발랐다. 그러나 자주 발라 면역이 생겼던 탓인지 웅담고약은 갈수록 효험이 떨어졌다. 1800년(정조 24) 6월, 정조는 다시 종기에 시달리게 되었다. 머리와 얼굴에 고름이 흐르고 등창까지 겹치자, 의관 박성일 · 정내교 등을 불러 의논했다.
“등에도 종기가 나는 듯한데 지금 거의 수십 일이 되었구나. 옷이 닿는 곳이기 때문에 삼베옷의 독이 묻은 것이리라.”
의관들이 진찰을 끝내자, 임금은 다시 말했다.
“무슨 약을 쓰는 것이 좋겠는가?”
“웅담고약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웅담고약도 효험이 없는 것 같구나.”
그렇게 온갖 약재를 쓰기도 하고 환부를 째기도 했지만, 종기는 더욱 심해져 온몸으로 번졌다. 정조는 열이 더욱 끓자 보리밥을 먹으며 식히려 했다. 다시 임금은 피재길과 방외의관(方外醫官, 정식 의원이 아닌 벼슬아치) 김한주 · 박동규 등을 불러 진찰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견이 각각 달라서 병세가 더욱 도질 뿐이었다.
정조는 궁중의 의관을 제치고 방외의관 심연을 불러 예전 피재길의 효능을 얻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임금은 끝내 죽고 말았다. 정조는 조선조 역대 임금 중에 세조 다음으로 피부병 때문에 죽은 임금이 되었다. 종기는 이만큼 무서운 병이었다.
임금의 죽음과 어의들의 수난
정조가 죽자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조정에서는 그 책임을 애꿎은 의관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의관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심문해 형을 내리거나 귀양 보내라고 주장했고, 내의원의 총책임자인 제조 서용보 등도 이들의 벼슬을 떼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섭정을 맡은 정순대비 김씨는 제조에게는 책임을 묻지 말고 의관만 조사해 처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의관 강명길 · 피재길, 방외의관 심연 · 정윤교 · 백성일 등이 잡혀 왔고, 대사간 유한녕은 더욱 강경하게 이렇게 요구했다.
역적 의관들에 대한 전지(傳旨, 전교해 내리는 지시)를 하루가 지났는데도 내리지 않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역적 강명길이나 심연은 예전 어느 역적 의관보다 심합니다. 천 번 만 번 살을 말려도 조금도 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피재길이 억지로 모르는 척하면서 처방을 미루었다 하여도 그 죄는 강명길이나 심연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신은 이르건대 의금부로 하여금 판결문을 올려 저자에 머리를 조리돌리는 형벌을 쾌히 베푸소서. 온 나라 신민의 철천지 원통이 풀리기를 바라며 이들에게 죄 주기를 결단코 그치지 않겠습니다.
- 《순조실록》 1권, 즉위년 7윌조
이런 주장들은 실제 문신들이 의관들을 탄압하는 구실로 권력다툼에 이용하는 행동이었다. 그야말로 이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그러나 피재길은 중심 인물이 아니었다. 목숨만 겨우 부지한 심연은 경흥, 피재길은 무산, 백성일은 초산, 정윤교는 위원으로 귀양살이를 떠났고, 강명길은 형틀에서 매를 맞아 죽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무참히 죽이라고 요구했지만, 이 사건은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약을 지어올린 사람은 심연 혼자였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피재길은 3년 뒤, 다른 이들은 5년 뒤에, 조정은 선심 쓰는 듯이 이들을 풀어 주었다. 이때 대비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각주2) .
저네들은 불행한 때를 만났을 뿐이지 이것이 어찌 저네들의 죄이겠느냐? 죄가 있다면 오로지 심연에게만 있을 것이다. 저네들이 처음부터 탕약을 지을 적에 참여하지 않고 다만 의관의 반역에 동참했을 뿐이다.
- 《순조실록》 5권, 3년 정월조
이들은 권력에 이용되었다가 다시 그 권력다툼의 여파로 풀려난 것이다. 더욱이 정조 임금은 종기로 죽기보다 탕약을 먹고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것은 탕약을 먹인 정순대비가 정조 독살의 원흉이라는 소문과 맞물려 있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의관들은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가장 큰 수난을 겪었던 것이다.
피재길은 뛰어난 재주와 노력으로 천민신분을 이겨 내고 당시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출세길을 달렸다. 더욱이 그는 다른 의원과는 달리 의서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무식쟁이였다. 이런 그를 좀더 북돋워 주고 키워 주었더라면 훨씬 더 뛰어난 업적을 남겼을 것이고, 당시 종기로 죽어 간 사람들을 더 많이 구제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썩은 벼슬아치들과 선비들은 그를 깔보고 어떻게든 해를 입히려고 했기에 그는 끝내 귀양살이까지 겪었다. 이런 까닭에 그의 이름은 후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종기 치료법도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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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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