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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유길준

兪吉濬

전통사회의 근대인

요약 테이블
출생 1856년
사망 1914년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 기행문을 쓰다

1885년, 유럽의 도시들마다 행색이 초라한 조선 청년이 불쑥 나타나서 서툰 영어로 뭔가를 묻기도 하고 메모를 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는 빠듯한 여비를 아껴 쓰면서 이곳저곳 기차를 갈아타며 분주하게 쏘다녔다. 그러니 단순한 관광이 아닌 기행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었다. 유길준은 우리나라에서 몇 가지 ‘최초’를 기록한 사람이다. 그는 일어와 영어로 말하고 쓸 줄 아는 1세대였고 한문 지식이 해박했음에도 국한문 혼용의 문체로 저술을 남긴 지식인지만 무엇보다 유럽을 최초로 기행한 조선 사람이다.

이해 12월 유길준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들이 속속 잡혀 죽임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갑신정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의 동료들이 갑신정변에 연루된 개화파라고 하여 바로 연금을 당했다. 그가 연금 당한 장소는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 다음에는 가회동 삼청공원 안에 있었던 취운정(翠雲亭)이었다. 그는 취운정에서 연금 당해 외부와의 연락이 끊긴 속에서, 미국과 유럽에서 적어온 메모지를 펼쳐놓고 견문록을 쓰기 시작했다. 예전에 적은 메모지가 많이 없어졌고 또 연금생활을 하며 참고할 책을 제대로 구할 수 없었으나 기억을 되살리고 일부의 서적을 참고해 집필을 서둘렀다.

연금생활 속에서 집필을 계속하여 6년 정도 걸려 방대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완성했다. 이 책에서 그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문물제도를 자신이 보고 겪은 대로 소개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 유럽 기행문으로 꼽힌다. 더욱이 국문과 한문을 섞어 쉽게 썼다는 데에도 커다란 의의가 있다.

갑오개혁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다

그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진사를 지낸 아버지 유진수(兪鎭壽)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가학을 이어 양반행세나 할 수 있는 가정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으나 여느 사람이 보면 엉뚱한 길로 빠져 들었다. 그의 외가는 세도가의 마을인 한양의 북촌에 있었는데 여기에서 외조부 이경직에게서 한문을 익혔다. 그의 본가는 경기도 광주의 덕풍리였으나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살아 서울의 양반자제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개화사상가들

격변의 시대에 개화와 수구는 우리 민족을 크게 갈라놓았다. 개화사상의 중심에 서서 사회를 이끌었던 젊은 사상가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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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870년대, 곧 10대 소년시절부터 당시 개화파의 영수였던 박규수의 안국동 집을 드나들면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김윤식 등과 어울려 청나라와 유럽에 대한 지식을 얻어들었다. 그래서 개화파의 한 청년이 됐다. 박규수가 죽은 뒤에는 수표교 옆에 사는 유대치(劉大致)에게 개화사상을 배웠으며 개화사상가요 유명한 시인인 강위에게서도 지도를 받았다. 특히 청나라에서 유행하는 양무운동에 관련된 책을 탐독했다.

1881년 조정에서는 일본의 근대식 신무기의 시찰과 학습, 여러 신문물을 배우게 하려고 청년들을 골라 청나라와 일본으로 보냈다. 그 막후에는 개화승 이동인과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의 지원이 있었다. 이 시찰단은 12개조, 61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는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끼어 일본으로 갔다. 당시 유람단은 여러 조로 나뉘어 역할을 맡았는데, 그와 함께 간 수행원으로는 윤치호, 이상재, 민건호 등이었다. 이들은 유망한 청년들이었다.

다른 벼슬아치와 수행원들은 일본의 문물을 3개월 동안 돌아보고 귀국했다. 하지만 그는 3개월의 여행을 마치고 계속 남아 일본의 문물을 익히는 유학생이 됐다. 어윤중, 홍영식 등 개화파 지도자들이 그에게 근대지식과 일본의 여러 신문물을 배워오게 하려는 계획에 따라 그를 남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일본유학생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유길준은 경응의숙(慶應義塾, 지금의 게이오대학교 전신)에 입학해 1년쯤 공부를 했다(입학이 아니라 사숙을 했다는 주장도 있음). 그는 경응의숙의 교수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도를 받았고, 후쿠자와가 지은 《서양사정》을 탐독해 유럽의 정세와 문화를 알게 되었다. 또 후쿠자와는 신문 〈시사신보〉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신문의 기능을 논함〉이라는 논설을 썼다.

마침 박영효가 수신사로 1882년 일본에 왔다. 그는 박영효의 통역으로 활동하다 박영효가 귀국할 때 따라왔다. 이때 조선에서는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이어 개화파들이 조정에 많이 참여해 개혁정치를 단행하고 있었다. 박영효는 한성부윤이 되어 신문국을 설립하고 그에게 일을 맡겼다. 그는 일본에서 익힌 신문 지식을 바탕으로 신문 발간에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신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자금난을 겪었다.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미국과 통상조약이 맺어져 조정에서 미국으로 보내는 친선사절인 보빙사(報聘使) 민영익(閔泳翊)의 수행원이 된 것이다.

보빙사 일행은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하고 40여 일 동안 미국을 시찰한 뒤 귀국했다. 그런데 유길준은 다시 미국 유학생으로 남게 되었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것이다. 당시는 미국주재공사관이 설치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먼저 영어와 과학을 익히고 나서 대학 예비과정으로 매사추세츠주의 세일럼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20대 중반이었다. 이때 고국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고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귀국길에 오르면서 유럽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 귀국하려면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하나는 하와이를 거쳐 알래스카 연안을 거슬러 일본 땅에 기착하고서 조선으로 오는 일본의 기선을 이용하는 항로이다. 미국의 증기선은 직항로로 일본으로 올 수 없었다. 게다가 일반 여객이 거의 없어서 정기여객선을 두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왕래하는 정기 여객선을 타고 유럽으로 갔다가 중국의 홍콩 또는 상하이로 오는 여객선을 이용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미국생활은 1년 3개월, 유럽여행은 1년쯤 걸렸다. 그는 서울에 돌아오자 바로 연금 당했다.

그는 7년의 연금생활 끝에 풀려났다. 1894년 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뒤에 이른바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갑오개혁은 일제가 뒷전에서 개화파를 조종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갑오개혁은 사법권의 독립, 양반의 특권 배제, 노비제도의 철폐, 조세의 금납 따위 근대적 개혁조치들을 내세웠다. 이에 유길준은 처음에는 일제와 협력하여 개혁의 내용을 만들고 이를 시행하는 여러 조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는 이해 12월 개화파의 연립정권이 수립되자 처음에는 내무협판, 뒤에는 내무대신이 되어 종두법과 단발령의 시행 등 개화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런 급진개혁은 보수세력과 민중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고 항거하는 사태로 번졌던 것이다.

1896년 2월에는 고종이 일본세력을 꺾으려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해갔고 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 탁지부대신 어윤중 등이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맞아죽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제 친로파(親露派)의 세상이 되었다.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당시 일본에는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한 조선 청년장교들이 일심회(一心會)를 조직하고 있었다. 유길준은 이들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계획했는데 사전에 탄로가 나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그 주모자의 한 사람이 유길준이라는 것도 발각되었다.

저술로 근대화에 기여하다

이리하여 외교 분쟁이 야기되자 일본정부도 그를 감싸고 돌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 경찰에 구금되었고 이어 일본에서도 머나먼 섬인 오가사와라에 유폐되었다. 바로 김옥균이 갇혀 있던 섬이었다. 유배생활 4년을 포함해 11년에 걸친 망명생활은 가시밭길이었고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이 외딴섬에 살면서 그는 다른 생각을 했다. 곧 정치활동보다 사회운동으로 전환할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망명생활을 하며 우리말 문법의 체계를 세운 《대한문전(大韓文典)》을 완성했다. 이 책은 그가 신문을 국한문으로 발행하고 〈독립신문〉의 문체를 익혀두기도 한 문법지식이 바탕이 되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뒤에 이 책을 발간했다. 이 문법책은 외진 곳에서 누구의 조언도 받지 않고 혼자서 완성했다. 국어문법의 정리에도 선구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이어서 이른바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반식민지의 처지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내정을 간섭했다. 이런 판국에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들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귀국케 해달라고 교섭했고, 실권이 없이 껍데기만 남은 고종은 이를 한사코 거부했다. 개화파들이 반식민지 상태의 고국에 돌아와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유길준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고종은 끝내 일제의 강요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를 계기로 일본 망명객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나라를 구하려던 정치가들이 나라가 망해가는 판국에 돌아온 아이러니한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유길준은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잃은 분노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만주나 상하이 등지로 망명할 때에, 가장 온건하고 안전한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한국통감부가 ‘정미7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박탈하자 반대운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고종이 이를 알고 유길준을 가상하게 여겼다.

아무튼 그는 국민계몽에 앞장섰다. 백성들이 개화하지 못하고 산업이 일어나지 못하며 교육이 보급되지 못한 데에 나라가 망한 1차 원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미국에서 생물학을 배우고 난 뒤에 철저한 진화론자가 됐다. 미개사회는 생물이 진화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믿었다. 한국사회를 진화시키자. 이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유럽 제국주의 이론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흥사단과 같은 수양 또는 사회단체의 결성에 참여했고, 학교의 설립, 농림강습소와 노동야학회의 설치 등 교육운동에 앞장섰다. 또 민족자립경제를 위해 국민경제회를 조직하고 철도를 우리 손으로 깔기 위해 호남철도회사 설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교과서를 스스로 편찬하여 보급했고, 《이태리 독립운동사》 등 유럽의 역사책 또는 멸망사를 써서 구국의 정신적 귀감으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계몽운동을 벌일 때 고종이 예전과는 달리 은밀하게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나라가 망할 무렵, 그는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저술을 남겼을 것이다.

그는 일진회에서 한일합병을 주장했다는 소문을 듣고 일진회 사무실로 달려가서 간부들을 주먹으로 치는 정열을 보이기도 했다. 또 일제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뒤에 그 공로를 인정하고 특권을 보장해주는 작위를 그에게 주자 이를 거절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노량진에 은거했다. 그런 끝에 신장병이 도져 죽었다. 그는 죽으면서 자식들을 앉혀 놓고 “이 애비는 아무 한 일이 없으니 묘비를 세우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 지식인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친일파라는 더러운 이름을 뒤집어쓰고 죽지는 않았다. 더 살았다면 그의 동료 김윤식과 같이 친일파로 변신했을지 모를 일이지만, 유길준은 조국의 근대화를 이룩하려는 뜻이 좌절되자 울분으로 나날을 보내면서 숨어살았다.

하지만 동료인 김택영, 박은식, 신채호처럼 중국 등지로 망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많은 저술을 남겨 민족정신 또는 근대의식의 형성에 공헌했다. 수많은 개화파들이 뒷날 친일로 전락했음에도 그는 나름대로 지조를 지켰으니 가상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유길준의 유품

비록 망명을 하거나 치열한 독립투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유길준은 나름대로 교육을 통한 활발한 계몽운동을 펴 나갔다. 그의 손때가 묻은 유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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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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