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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에게 의술을 전수받다
예전 우리나라의 명의들은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 출신배경이나 내력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중인신분으로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상(柳瑺)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유상은 숙종 때 천연두 전문가로서 왕과 왕비, 세자 · 왕자의 천연두 · 홍진을 치료해 많은 공로를 세우고 높은 관직까지 받았지만 출생과 사망연대, 그리고 행적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신비에 싸인 이야기만 전해 오고 있다.
유상은 젊을 적부터 의술이 용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는 어느 경상감사의 책실(冊室, 고을 원에 딸린 개인 비서)이 되어 대구로 따라 내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매일 하는 일 없이 먹고 자고 빈둥거리며 놀았다. 그러다가 감사에게 집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허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금호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뒤에 하인이 소변을 본다며 노새의 고삐를 그에게 맡겼다. 노새를 타고 있던 유상은 무심코 고삐를 잡고 채찍으로 노새를 한 번 쳤다.
그러자 놀란 노새가 어디론가 마구 달렸다. 그렇게 온종일 날이 저물 무렵 때까지 달리고 한 재를 넘어 어느 집 마루 앞에 섰다. 그때 방 안에 있던 한 노인이 아들에게 말했다.
“손님이 타고 온 노새를 잘 먹이고 손님의 저녁밥도 준비하여라.”
유상이 노새를 찾다가 이 집에 들어가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노인은 아무 말없이 앉아 있다가 바깥에 사람 찾아온 소리가 나자, 벌떡 일어나 큰 칼을 들고 나가며 유상에게 당부했다.
“그대는 방 안의 책을 보지 마시오.”
유상이 여러모로 괴이한 상황을 느끼고 아랫방을 살펴보자 그곳에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유상은 대수롭지 않게 책을 뒤적여 보니 모두 의학서적이었다. 그는 주인의 당부도 잊은 채 정신없이 책들을 읽어 나갔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인기척이 들리자 얼른 책을 덮어 버렸다. 그러나 주인이 방 안에 들어와서 말했다.
“매우 무례하군. 어른의 책을 허락도 없이 보다니.”
그러나 더 이상 꾸짖지 않고 함께 잠을 잤다. 첫닭이 울자, 주인은 빨리 떠나라고 말하고 한곳에 오래 머물지 말라고 당부했다. 유상이 노새에 오르자 주인의 아들이 채찍으로 노새를 쳤다. 노새는 어제처럼 마구 달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광주의 판교(板橋)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궁중에서 나온 액례(掖隷, 궁중의 경호를 맡은 하인들) 10여 명이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부르며 말했다.
“성상께서 천연두를 앓고 계신데 꿈에 신선이 나타나 유의원을 부르라고 했다 합니다.”
유상이 궁중 하인들과 함께 구리개를 지날 때 한 노파가 천연두 앓는 아이를 업고 가고 있었다. 길 가는 사람들이 물어보자 “지나가는 중이 송체탕(松蔕湯, 소나무 뿌리를 곤 물)을 먹이면 나을 것”이라고 해서 노파는 이 말대로 송체탕을 먹이고 나았다고 말했다.
유상이 궁중에 들어가 임금을 진찰해 보니 노파가 업고 가던 아이와 증세가 같았고 또 산속의 집에서 읽은 의학서에도 송체탕에 대한 용법이 있었다. 그래서 송체탕을 써서 임금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
- 유재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숙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임금의 어의가 되었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는 그가 신선의 의술을 배워 왔다는 것을 상징하는 신비스런 이야기로 엮여져 있다. 이때 그는 임금의 병을 고친 공로로 많은 벼슬아치들의 반대를 누르고 서산군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의원 출신으로 드물게 주어지는 수령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궁중에서 천연두 비슷한 병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불려 가 치료를 맡았다.
당시에는 천연두가 나돌면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사람들은 아이를 업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며, 어른이 여기에 걸리면 온갖 민간요법을 동원했다. 한꺼번에 죽어 가기 때문에 시체들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서 수구문 밖(오늘날의 왕십리 · 신당동 일대)에는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궁중에서 이 병이 나돌면 궁녀들은 사가(私家)로 보내졌고 왕자 · 공주들이 걸리면 이어소(移御所)를 두어 별거하게 했다.
1699년(숙종 25)에도 천연두가 궁중을 덮쳐 세자(뒤의 경종)가 앓아눕게 되었다. 그는 약청(藥廳) 의관으로 치료를 맡아 다스렸다. 이 공로로 그는 또다시 품계를 두 단계나 높여 받았고, 숙종의 배려로 또다시 직함만 받는 벼슬이 아닌 실직이 주어진 것이다. 이때 그는 틈틈이 민간인의 치료에도 힘을 다했다.
1711년(숙종 37)에 왕자(뒤의 영조)가 천연두로 앓아누웠다. 이때에도 그는 치료를 잘해 품계를 높여 받았다. 이해 12월에는 왕비와 임금이 다 같이 천연두와 머리종기로 심하게 고생을 하고 있었다. 특히 왕비는 이어소에 옮겨져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지만 유상의 치료로 왕비의 병이 완쾌되었다. 이번에는 유상이 삭령군수가 되었다.
이처럼 그가 공로를 세울 때마다 그에게 수령이라는 직책이 내려진 것은 숙종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었다. 참으로 상례를 벗어난 드문 은총이었다. 이때에도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그가 수령으로 있을 때 임금이 연포탕(軟泡湯, 꼬챙이에 꿴 두부를 닭국에 끓인 음식)을 먹고 심하게 체해 토하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임금은 궁중에서 말을 보내 급하게 그를 불러올렸다. 유상은 새문 밖에 이르렀을 때 한 노파가 길가에서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쌀뜨물을 두부에 부으니 두부가 녹아 버리네.”
그는 이 말을 귀담아 듣고 궁중으로 들어갔다. 유상은 임금이 두부에 체했다는 말을 듣고 임금에게 쌀뜨물을 복용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임금의 체증은 말끔히 나았다.
- 유재건 《이향견문록》
이런 일로 임금의 총애가 더욱 깊어지자 많은 벼슬아치들의 질투도 끊이지 않았다. 그의 흠집을 찾아내 꼬투리를 잡으려는 자들이 조정에 널려 있었다.
1718년(숙종 44)에 숙종이 연로한 탓에 세자에게 정사를 대리하도록 했다. 어린 세자는 정사를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 왕비(제2계비인 인원왕후)가 홍진을 심하게 앓았다. 그는 어김없이 이 병을 돌보게 되었고 자신의 비방에 따라 병을 거뜬히 치료하자 또다시 수령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자 사헌부에서는 대리청정하는 세자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수령의 연한은 실로 나라에서 정한 바꿀 수 없는 법전이옵니다. 약방에서 들어가 성상을 진찰할 적에 어의 유상에게 수령을 계수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유상의 공로는 진실로 많습니다만 앞뒤로 은상(恩賞, 공을 기려 임금이 상을 내림)이 지나치게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한 군의 수령을 맡은 것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금년에 이르러 수령의 연한이 이미 지났고, 비록 나았다고 하지만 병이 일단 심한 후이니 규정 밖의 임명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그에게 내린 수령의 재임명을 도로 거두어 주소서.
- 《숙종실록》 70권, 44년 7월조
이 말을 들은 세자는 벼슬아치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사실 그에게 거듭 수령자리를 준 것은 지나친 처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 그는 다시 수령의 자리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숙종은 그에게 규정에 어긋날 정도로 수령을 맡겼고, 그때마다 벼슬아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임금은 이를 누르고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그 까닭에 의원으로서는 드물게 왕조실록에 여러 번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쯤에는 숙종도 병들었고 대리청정하는 세자는 비록 그에게서 목숨을 구했지만 유상의 진가를 별로 알아주지 않았다. 이런 탓에 그는 몇 십 년 동안 누리던 수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헌길에게 비밀스럽게 전해진 치료법
그 뒤 곧바로 숙종이 세상을 떠났고 새 임금 경종이 들어섰다. 이와 함께 그의 이름도 사라졌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 몇 가지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가 최초로 전문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허준을 비롯한 많은 명의들의 이름이 전해지지만, 그들은 대개 의학이론을 세우거나 질병 전반에 대한 치료를 담당했었다. 종기 전문의 백광현이 있었지만 유상처럼 한 부분에 대해 전공한 의원이 드물었던 것이다. 유상이 종기 등을 치료한 일도 있었다고 하지만 전적으로 천연두나 그와 유사한 질병을 전문으로 치료했다는 사실이 독특하게 드러난다.
그의 뒤를 이은 인물로 영조 때 이헌길이 있다. 이헌길은 천연두의 치료에 일생을 바쳤는데, 그가 치료한 사람 중에 다산 정약용도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그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에 대한 약전(略傳)을 쓰고 《마과회통》을 저술해 천연두 치료에 공헌했다. 정약용이 없었더라면 이헌길의 행적이 의학사에서 사라질 뻔했다.
둘째, 그는 전문의로 국가의 공인을 받은 의원이 되었다. 대개 명의들은 민간에 떠돌다가 이름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비록 궁중의 어의가 되었더라도 임금이나 왕비가 죽으면 그 책임으로 목숨까지 잃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런 탓에 어의가 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정조의 종기를 치료하던 어의들은 정조가 죽자 그 책임으로 끝내 죽기도 하고 귀양도 갔다. 그의 뛰어난 의술 탓인지, 또는 행운인지 그는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다. 더욱이 의원으로서는 드물게 여러 차례 수령자리를 얻은 인물이 되었다.
셋째는 그가 이 분야에 아무런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헌길은 《을미신전》을 남겼고, 정약용이나 지석영도 자신이 공부한 천연두과에 대한 의서를 남겼다. 그런데 이 분야를 앞서 공부한 그가 저술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그도 저술을 남겼는데 전수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민간전설을 통해 신선의 의술을 받은 것처럼 전해 오고 또 꿈이나 계시를 통해 이름이 알려져 더욱 신비스러운 명의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는 분명히 여느 의원보다는 나라의 혜택을 받았고 평탄한 생애를 살았다. 그러나 이 점이 오히려 그의 생애를 빛나게 해 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만약 수령 임명에 반대하는 정도가 아닌 더 큰 탄압을 받았고 목숨까지 잃었다면 그의 이름이 훨씬 부각되었을지 모른다. 또한 어떤 저술을 남겼더라면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흔히 많은 명의들이 썩은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무시한 탓에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히고 말았는데, 그에게도 폐해가 미쳤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나마 천연두과에 헌신한 그의 이름이 한 줄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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