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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국가가 그 군사력을 해상으로 확대하는 데 주요수단으로 사용하는 배의 총칭.
군함은 아군이 상륙해 적군과 싸울 해안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호하고, 자국의 상선대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 또한 적이 바다로 그 군대를 수송하는 것을 저지하며, 적의 상선들을 공격한다. 군함은 적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수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봉쇄에도 이용된다. 이러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군함들은 초창기부터 상선들보다 속도가 빠르고 견고하면서 공격용 무기들을 탑재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왔다.
노와 충각 시대의 군함
전투용으로 의장된 최초의 선박은 일반 운송용 배를 개조한 것이었다.
최초의 개조는 기습부대가 단지 무기를 배 안에 집결시키는 형태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박 자체에 공격력과 방어력이 추가되는 형태로 개조는 진행되었다.
BC 3000년경에는 항해용으로 건조된 대형 목선들이 이집트의 나일 강으로부터 장거리 순양과 무역·정복 등을 위해 출항했다. 이 배들은 노와 돛으로 움직이는 배들이었다. 배마다 하나의 쌍각(역V자) 마스트와 대형 가로돛으로 의장되었다.
이집트의 대형 선박들에는 한쪽에 20개 이상의 노와 2개 이상의 키잡이 노가 있었다. 병선(兵船) 겸용 갤리선(船)은 형태는 같지만 보다 견고하게 건조되었다. 그중에는 선체 밖으로 돌출한 충각(衝角)을 장치한 갤리선도 있었다. 그 충각은 적선의 건널뱃전을 들이받고 갑판까지 올라가 적선을 침수 또는 전복시킬 수 있도록 설계되기도 했다.
BC 2000년경 크레타가 동(東)지중해의 해상강국으로 등장했다.
크레타의 병선은 외돛대에 노젓는 곳이 1단으로 되어 있었다. 끝이 예리하게 된 선수(船首)는 충각의 계획적인 사용이 강조되었음을 시사한다. BC 11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은 크레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상선을 겸한 병선들을 운행했다. 이 배들은 보다 많은 노를 맬 수 있었고 따라서 힘과 추진력이 보다 강했다.
주무기는 충각이었다.
그리스 해양 도시국가들의 통상이 발전해 해상보호의 필요성이 증대하자, 처음부터 전투용으로 건조된 갤리선이 등장했다. 1단노선(一段櫓船)으로 불린 이 최초의 갤리선은 노를 젓는 곳이 1단으로 되어 있었으며, 속도가 빠르고 이물과 고물이 높이 휘어져 보기에 우아했다.
뒤이어 노젓는 곳이 상하 2단으로 된 갤리선이 등장해 BC 8세기의 주도적인 병선이 되었다(→ 바이림). 80~90년이 지나기 전에 최초의 3단노선이 점차 병선의 선두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살라미스 해전(BC 480)에서 그리스 해군이 승리한 이후 특히 두드러졌다(→ 트라이림).
3단 갤리선의 발전은 아테네에서 절정에 달했다.
BC 4세기 중엽 아테네인들은 4단노 갤리선을 진수시켰고 바로 뒤이어 5단노 갤리선이 등장했다. BC 4세기말에서 3세기초에 걸쳐 동지중해에서 군비확대경쟁이 계속된 결과 5단 이상의 배들도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군비확대경쟁은 다른 중요한 변화들도 가져왔다. 마케도니아의 디미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가 BC 3세기말 병선에 중(重)투척 무기를 처음 도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때부터 대형 군선(軍船)들이 쇠뇌를 장치해 적과 떨어져서 교전할 수 있게 되었다.
단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이 분열된 후 카르타고가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서 부상해 BC 300년경까지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해군국이 되었다. 로마의 성장은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의 야심과 충돌했다.
이로 인해 BC 264년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났다. 로마는 당시 해군국은 아니었지만 3단노선과 4단노선으로 갤리선 함대를 만들었다. 이중 4단 갤리선은 카르타고의 것을 본떠서 만든 것이었다.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에게 있어 승선은 이차적인 전술이었다. 반면 로마의 한 함장은 충각으로 적선을 들이받고 건널판자를 떨어뜨린 다음 로마의 수병들이 적선에 승선하여 적을 제압하게 했다.
로마는 상선들을 호송하고 해적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보다 가벼운 군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리부르니안(liburnian)이었다. 이것은 본래 가벼운 쾌속 1단노선이었는데 여기에 로마인들이 제2단의 노를 추가한 것이다. 악티움 해전(BC 31)에서 옥타비아누스의 노련한 함대 사령관 아그리파가 리부르니안을 이용해 성공을 거둔 이래 리부르니안은 로마의 주력 군함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면서 서방에서의 해군활동도 쇠퇴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에서는 해군력이 필요했으며, 11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의 통치자들은 잘 조직된 함대를 유지했다.
군함의 선형은 그리스어로 드로몬(dromon)으로 불린 리부르니안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그 오랜 존속기간에 군함은 의장과 병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투사물 발사기들은 규모가 커져, 무게가 450kg이나 되는 투사물을 685m의 거리까지 쏘는 것도 있었다.
적함 방화용의 가연성 물질인 그리스 화약은 7세기나 그 이전에 발명되었다. 이것은 8세기초부터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격하는 이슬람 함대에 위협을 주어 물러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이킹 시대가 시작되는 800년경 스칸디나비아의 초창기 배는 앞뒤 모양이 같고 뱃전을 겹붙인 갤리선으로 발전했다(→ 바이킹선). 이 배는 쇠못을 박아 붙이고 타르를 칠한 로프로 틈을 메워서 만들었다.
외돛대와 가로돛은 전투시에는 내리도록 되어 있었으며, 높은 이물과 고물에는 각각 떼어낼 수 있는 용두(龍頭)가 달려 있었다. '긴 배'로 알려진 이 바이킹의 배들은 콜럼버스 시대 이전에 그린란드와 아메리카를 탐험하고 스칸디나비아의 왕국들을 통일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바이킹들의 영국 침공을 포함해 광범위한 약탈과 정복에 사용되었다.
총포와 돛 시대의 군함
13~14세기 전투 때 오랫동안 우위를 점하고 있던 노의 역할이 끝날 만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1200년경 고물의 키가 도입되었고 이로 인해 긴 배는 진정한 범선으로 변모되었다. 15세기말 대형선박들은 4개의 마스트를 세우고 8개 이상의 돛을 달았다. 세 돛대의 범선은 마스트마다 대형 돛을 1개씩 달고 메인톱세일(주돛대의 주돛 위의 돛)과 선수사장(船首斜檣) 아래의 스프리트세일(스프리트로 펴는 돛)을 갖추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가 바로 이런 의장을 갖추고 있었다.
화약의 발명과 세계 탐험의 시대는 병선이 상선과 보다 뚜렷이 구별되게 할 변화들을 가져왔다.
총포는 15세기말까지 지중해의 갤리선에서 작은 역할만을 했다. 그러나 15세기말 고정된 포대(砲臺)가 선수(船首)의 중심선에 배치하는 활동(滑動) 포대로 바뀌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선수포(船首砲)로 불린 이 총포들은 처음에는 연철로 제작되었지만 1500년 이후 놋쇠로 대체되었다. 이 총포들 가운데는 무게가 27kg이나 되는 포탄을 발사하는 것도 있었다.
대포로 무장한 군함들로 대양을 누빈 최초의 나라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고 그 다음이 프랑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초로 진정한 항양(航洋) 전투함대를 창설한 것은 영국의 헨리 7세였다. 그후 헨리 8세의 함대는 포문(砲門)을 처음으로 설치하여 진정한 중포무장함(重砲武裝艦)이 되었다.
16세기의 큰 군함 1척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전함들처럼 크고 작은 포를 많이 탑재했다. 헨리 8세의 가장 유명한 군함 '앙리그라스아디외호'(Henry Grce à Dieu)가 1514년 처음으로 완전무장되었다. 당시 그 배에는 쇠로 만든 '거포'(巨砲) 다수를 포함해 186문의 포가 실려 있었다.
17세기에 이르러 포와 화약도 개량되었다.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거함'들은 대형 무장상선인 캐러크(carrack)선이었다. 이 배들은 상선을 바탕으로 해서 설계자가 보다 단단한 목재와 마스트·범력(帆力)·현측포(舷側砲), 높이 쌓은 선수루(船首樓)·선미루(船尾樓) 등으로 임전 능력을 보강한 것이다.
캐러크의 뒤를 이은 갈레온(galleon)선에서 군함 조종의 일반 원칙이 확립되었다. 캐러크선의 높이 쌓은 선수루는 맞바람을 받아 배의 조종을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갈레온선의 설계에서는 배제되었다. 그결과 배는 내항성(耐航性)이 월등하게 향상되었다.
16세기 중반에는 군함들이 28문 이상의 적선 공격용 포로 강력한 현측대포(舷側大砲)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즉 규모면에서 과거의 군함들보다 더 중무장한 것이다. 배를 다루기 쉽고 기동성있게 하기 위해 영국인들은 비교적 큰 대포를 현측에 장치했다. 그래서 영국 군함들은 떨어져서 싸우기에 유리하도록 설계되었고, 영국 함대는 배들의 우월한 기동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1588년 스페인의 아르마다(Armada:무적함대)와 싸울 때 영국 해군은 적선 격침용 포를 중심으로 하는 해전을 벌였다.
이것은 충각으로 적선을 들이받고 적선에 뛰어들어 접전으로 적군을 살상하는 재래식 해전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역사적인 해전으로 한 시대의 막이 내리고 대포를 중심으로 한 해군의 보다 위대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엘리자베스 시대 후기의 갈레온선이 진정한 이 계열 전투정(戰鬪艇)의 효시이다. 이 함정은 1610년 진수된 영국의 '프린스로열호'와 1637년 진수된 보다 대형의 '소버린오브더시스호'(Sovereigen of the Seas)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이 2척의 배는 3층의 갑판에 현측대포를 설치하고 있었다. 소브린오브더시스호는 대포가 100문이었고 배수량이 약 1,500t에 달했다. 미즌마스트(mizzenmast)의 큰 세로돛이 없어져 높이가 줄고 그후로 주력함에 의장된 표준 세 돛대만 남았다.
배들은 이내 다른 범주로 표준화되기 시작했다. 제임스 1세는 배를 4개의 종별로 편제했고, 17세기 중반까지 아직 체계를 이루진 못했지만 일반개념으로 6개의 '등급'이 존재했다. 그 등급은 배에 장착된 포의 수에 따라 결정됐다. 17세기에 치열한 해전이 빈번히 벌어진 결과 종진(縱陣)이라고 불리는 중군함(重軍艦)의 1열 대형이 개발되었다.
종진 대형은 모든 군함이 앞에 있는 군함의 뒤를 따라 항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대열에 있는 모든 배가 측현포로 발포할 때 시계를 가로막는 것이 없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리고 보다 강력한 군함들만이 '전열에 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700년대에 전열함(戰列艦)이라는 용어가 생긴 것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1~4등급의 전열함들은 단단한 쾌속 프리깃함을 요함(僚艦)으로 거느렸다.
현대 순양함의 전신인 이 프리깃함은 18세기 중반에 공격용으로만이 아니라 정찰용·순찰용·호송용으로도 개발되었다. 프리깃함은 단층포열갑판에 주포열(主砲列)을 설치하고 선수루와 후갑판에 다른 포들을 탑재했다. 전열함과 같이 프리깃함도 규모와 장비면에서 등급의 차이가 있었으며, 탑재포는 24~56문까지 있었다. 아직도 보존되고 있는 2개의 전형적인 함이 미해군의 대포 44문을 탑재한 '콘스티튜션호'와 38문을 탑재한 '콘스털레이션호'이다.
프리깃함들이 해상봉쇄·호송·상선공격 등과 그밖의 임무를 수행할 때 그보다 작은 배들이 조력했다.
증기와 철재 시대의 군함
19세기 산업혁명이 전개되면서 군함의 설계·운용·전술 등의 모든 면에서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위풍당당한 전열함이 바다를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
군함을 건조하는 데 철재의 사용이 일반화된 것은 유탄(留彈)을 발사하는 포의 진가가 완전히 인식되고 그에 따라 장갑의 필요성이 절실해진 결과였다.
그것이 처음으로 분명해진 때는 크림 전쟁에서였고, 이어 미국의 남북전쟁중 '모니터호'와 '메리맥호' 간에 벌어진 전투에서였다. 변화는 추진수단·무기·장갑 등에서 나타났다. 엔진과 엔진기능을 유지하는 기계장치가 처음에는 증기추진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1800년대초 내륙과 해안의 수로에서 작전하는 데 적합한 증기선들이 등장했다(→ 증기기관).
실전에 투입된 최초의 증기군함은 영국과 미국 해군이 해적과 그밖의 미약한 적들을 상대로 사용한 소형 외륜선(外輪船)이었다.
외륜은 적의 발포에 특히 쉽게 부서졌다. 1843년 스크루 추진기가 개발되어 대포 10문이 장착된 대형 슬루프(sloop)선인 미국 군함 '프린스턴호'에 장치되었다. 1840년대 중반까지 보일러·엔진·기계장치 등의 개량이 충분히 진척되어, 그후로 사실상 새로 건조되는 군함의 전부가 증기로 추진될 단계에 이르렀다.
무기의 근본적인 변화도 18세기에 시작되었다.
발사 후 포의 반동이 일으키는 최초의 충격을 흡수할 만큼 강한 스프링이 개발되었다. 이 개발로 영국 해군은 보다 중형의 장거리포를 설치할 수 있는 단계에 올랐다. 발포는 화승식(火繩式) 대신 줄로 부싯돌 발화장치를 잡아당기는 수발식(燧發式)으로 하게 되었다. 조준기도 개량되었다. 크림 전쟁 때 사용된 프랑스제 165㎜ 주철제 선조포(旋條砲)는 사정거리·파괴력·정확도에서 우월함을 입증했다. 이것은 모든 나라의 해군이 선조를 새긴 포신(砲身)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선조포로 발사하면 포탄의 비행 코스가 보다 정확해지고 사정거리가 보다 길어진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었다.
함포(艦砲)의 포신에 선조를 새기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발전은 철제의 단단한 구형(球形) 포탄을 대형 유탄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유탄은 충돌하면 파열됐다. 야금학, 포의 제작, 포격관제(砲擊管制) 등의 향상은 증기 군함의 기동력과 결합되어 마침내 중요한 사정거리의 연장을 이루었다.
이것은 대포가 출현할 때부터 기대되어왔던 것이다. 관통력이 더 크면서 파열탄(破裂彈)을 사용하는 보다 대형인 포의 사용에는 장갑이 필수적이었다. 초기에 실험된 것들 가운데는 크림 전쟁을 위해 건조된 부동장갑포대(浮動裝甲砲臺)가 있었다. 이 평저선(平底船)은 목조의 두꺼운 등판에 무거운 연철판(練鐵板)이 씌워져 있었다. 이 배는 대형 포탄을 발사하는 포를 탑재하고 연안으로 접근할 때 방어력이 탁월했다.
최초의 장갑함은 미국의 남북전쟁 발발 직전에 취역했으며, 그 전쟁에서 장갑함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전투는 모니터호와 메리맥호로 더 잘 알려진 '버지니아호'의 결전이었다(→ 모니터와 메리맥 전투). 북군이 1861년 4월 버지니아 주 포츠머스의 노퍽 해군조선소를 잃었을 때, 그들은 증기 추진의 중(重)프리깃함인 메리맥호를 포함하여 여러 척의 군함을 불태웠다.
남군은 메리맥호를 인양하여 버지니아호로 개칭했다. 버지니아호는 선조포 4문을 포함하여 10문의 포를 탑재하고 시운전을 위해 1862년 3월 8일에 출항했다. 이 배에는 그때까지도 선상에 남아 수리를 계속하는 조선소 일꾼들이 있었다. 버지니아호는 함상과 연안 포대의 집중포화에도 끄떡없이 해안을 봉쇄하고 있는 북군의 목선 함대 가운데 2척을 격침하고 썰물을 따라 후퇴했다.
이 극적인 순간에 존 에릭슨이 이끄는 모니터호가 한밤중에 뉴욕으로부터 도착했다.
모니터호는 결함이 많았다. 항해용 군함으로 건조한 것이 아닌 이 배는 뉴욕에서 오는 동안 거의 침몰할 뻔했으며, 그다음 번 항해 때는 침몰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3월 9일 결전에 임했을 때 이 배는 적의 군함과 대등하게 싸웠다. 그 전투는 어느 쪽도 중대한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무승부로 끝났지만, 철갑을 두른 군함들 사이에 벌어진 이 최초의 결전이 일으킨 반향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19세기 후반은 군함건조가 크게 붐을 이룬 시대였다.
수중에서 사용하는 무기류의 일대 진전은 자동어뢰의 발명이었다. 1864년 로버트 화이트헤드라는 영국의 기술자가 압축공기로 추진되고, 보호되지 않은 흘수선(吃水線) 아래의 선체를 공격하도록 고안된 발사체를 만들어냈다. 이 화이트헤드 어뢰는 직경이 약 406㎜였고, 대략 7kn(노트)의 속도에 약 914m의 사정거리를 가졌다.
상갑판의 중심선상에 회전식 포탑(砲塔)을 설치하고 대포를 발사하는, 전함을 지향하는 경향이 마침내 분명히 드러났다.
2개의 포탑에 305㎜ 포 4문을 장치하고 1869년에 취역한 8,300t짜리 영국 군함 '모너크호'가 아마도 최초의 진정한 항해용 포탑함(砲塔艦)이었을 것이다. 2개의 포탑에 305㎜ 포 4문을 탑재하고 육중하게 장갑된 9,330t짜리 영국 군함 '데버스테이션호'는 4년 후에 완성되었다. 돛이 없이 진수된 이 군함은 마침내 20세기에 등장할 전함, 즉 추진시설·탄약고·조종실 등을 장갑된 요새에 설치한 배에 한 단계 가까워진 포탑함이었다.
이 무렵에 장갑 순양함이 개발되었다. 그것은 중구경(中口徑) 포로 무장하고 장갑판과 중량급 장갑대(裝甲臺)로 방호된 대형 쾌속선이었다. 그무렵에 건조된 그밖의 함정으로는, 갑판은 장갑이었지만 장갑대는 없는 방호순양함(防護巡洋艦), 장갑을 거의 또는 전연 하지 않은 비방호 순양함, 사정이 짧은 저속 어뢰를 발사하는 어뢰정 등이 있었다.
1880년대말 강갑판을 뚫는 포탄이 실전에 사용되어 장갑함을 위협했다(→ 장갑관통체). 미국의 기술자 헤이워드 오거스터스 하비는 아주 높은 온도에서 강판의 표면에 장시간 탄소를 침투시켜 담금질하는 표면경화처리법을 완성했다.
1894년 독일의 크루프사(社)는 하비의 처리법을 기초로 해서 열가스 경화법을 고안했다. 그후 니켈 강(鋼)에 크롬을 보강하는 것이 더욱 좋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포와 화약의 발달은 군함 설계의 발달보다 해군에 더욱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 남북전쟁 후 20년 동안 포미(砲尾) 기계장치에 있었던 큰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개량된 포들은 후장(後裝)의 도입과 결합되어 사정의 연장과 발사 속도의 고도화를 가능하게 했다.
여러 나라가 질산염으로 처리한 셀룰로오스와, 보통 약간의 니트로글리세린을 첨가해 만든 무연 화약으로 승전을 거두기 시작했다. 타격력이 커짐으로써 장갑을 뚫는 발사체의 위력은 더욱 커졌다. 이런 발사체들은 처음부터 장갑판을 뚫을 목적으로만 고안된 것이었다. 1890년대에 강과 신관(信管)의 개량으로 추가로 폭약을 장전할 수 있게 되었다.
대포와 어뢰 시대의 군함
19세기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될 때까지 군함 개발은 대포와 어뢰의 경쟁적인 발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두 무기의 개량은 수상 군함의 설계와 활용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900년에 이르러 304㎜ 포로 분당 1~2발을 조준·발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10년 전 5분에 1발을 조준 발사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획기적인 진전이었다. 또한 그사이에 중포(重砲) 사격술의 수준도 향상되기 시작했다. 그뒤 19세기말에는 유효사정이 2,743~3,658m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배의 옆질과 뒷질은 체계적으로 상쇄될 수 있으며, 따라서 포탄을 매번 해면에 같은 각도로 발사하여 거의 정확히 같은 사정거리에 이르도록 할 수 있음이 발견되었다.
정확도의 향상은 포탄이 예상 탄착점(彈着點) 둘레에 무리지어 떨어지도록 일제사격을 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제사격시 탄환이 튀겨나간 모양을 보고 조준수정이 가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1만 3,716~1만 8,288m의 거리에서 발사하는 포의 명증율이 5%에 달할 만큼 포격관제가 향상되었다.
적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정거리에서 포탄을 명중시킬 수 있는 배는 멀리 떨어져서 유유히 적함들을 파괴할 수 있었다. 그런 배는 그 당시에도 사정거리와 방향조절 기능이 개량된 어뢰의 공격에 대비되어 있었다.
어뢰의 위협 때문에 선박설계자들은 전함에 수중 방호를 마련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의 연구 결과 선체 외면에 불룩 튀어나온 중배를 입혀 어뢰의 폭발이 선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일어나도록 하는 방안이 강구되었다.
신형 군함들은 특수제작된 여러 겹의 칸막이를 이용해 폭발의 충격을 흡수하도록 설계·건조되었다. 대전중에 사정거리가 길수록 포탄이 배의 장갑현측(裝甲舷側)보다 갑판에 더 많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이런 사정원리가 유틀란트 해전을 통해 얻어졌기 때문에, 그후 갑판의 장갑을 강화하도록 설계된 배들을 포스트유틀란트(post-Jutland)형으로 부르게 되었다.
군함의 발전은 무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추진의 변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0년 추진이 전적으로 왕복운동식(피스톤식)의 증기기관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증기기관은 추진력에 한계가 있었고 쉽게 진동하는 결함이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군함설계자들은 보다 원활하게 작동되면서 내재적인 한계가 없는 증기 터빈을 채택했다. 연료 역시 큰 문제가 되었다. 석탄은 깨끗하게 연소되지 않았고 해상의 배에서 배로 옮기기가 어려웠다.
반면 석유는 깨끗하게 연소되고 쉽게 옮겨 실을 수 있었다. 석유는 석탄보다 발열량도 높아서 같은 무게 또는 분량으로 배를 훨씬 더 오래 운전할 수 있었다.
1904년 미국 - 스페인 전쟁과 러일전쟁의 전투경험으로 보강된 연구 결과 혼성 포열(砲列)의 근접사격보다 대형 포의 원거리 포격이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이 드러났다. 장갑이 잘된 배는 보다 큰 포탄만이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던 것이다. 유효사정거리의 증대는 전함에 여러 구경의 포를 설치했던 과거의 방식을 버리고 포의 구경을 하나로 통일함으로써 촉진되었다.
이런 전함을 처음으로 진수시킨 나라는 영국이었으며, 그것은 1906년 완성된 '드레드노트호'였다. 이후 가장 발전된 설계에 따라 건조된 완전 신형 전함들을 드레드노트(Dreadnought)형 전함 또는 노급함(弩級艦)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4년까지 독일·미국·일본·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 등의 해군들이 이런 유형의 배들을 건조했다. 이 함정들은 이제까지 순양함만이 가능했던 21kn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영국 군함 '드레드노트호'는 거포(巨砲) 화력의 급속한 발전의 시작을 나타내기도 했다.
1909년 영국 해군은 배수량 2만 2,500t에 338㎜ 포로 무장된 최초의 '초(超)노급함'인 '오리온호'를 기공했다. 이어 미국은 350㎜ 포 탑재용의 배들을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 해군은 '퀸 엘리자베스호'로 진일보했다. 이 군함에는 375㎜ 포가 설치되었고 이론상 25kn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1916년 영미 두 나라는 약 953kg 무게의 포탄을 발사하는 406㎜ 포를 채택했다. 이 포들은 1만 8,288m나 되는 거리에서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었다.
'드레드노트호'는 과거의 대형 순양함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이 배의 속력이 그 순양함들과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국 해군은 일련의 배를 건조하여 순양전함(battle cruiser)이라고 칭했다. 이 순양전함은 크기가 최신형 전함만했고 전함포(戰艦砲)로 무장되었지만 항속이 25kn로 훨씬 더 빨랐다. 순양전함은 속력을 올리기 위해 중장갑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전함과 정면 승부는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입증한 것이 유틀란트 해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순양전함 '인빈서블호'가 단 한번의 일제사격에 의해 2쪽으로 쪼개져 다른 2척의 순양전함과 함께 침몰된 것이다.
순양함류의 함정 반대쪽 끝에는 정찰과 호송 임무를 맡은 소형 쾌속 '정찰함'이 있었다.
자동추진 어뢰는 소형 수상선(水上船)의 설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1880년대부터 많은 나라가 자국의 해안 수역에 어떤 적함도 침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증기기관으로 추진하는 소형 어뢰정 수백 척을 건조했다. 이 어뢰정들은 선체를 전부 기계로 채울 수 있었기 때문에 동력이 증가되어 속력이 아주 빨랐다.
1890년대초 최고 25kn의 항속이 기록되었다. 이 신형 쾌속선의 위협에 대비해 영국은 특대형 어뢰정들을 배치하고 이를 어뢰구축정(魚雷驅逐艇)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후에 구축함으로 개칭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구축함 설계는 전면적으로 바뀌었다. 독일이 1917년 2월 무제한 잠수함전에 돌입하자 연합국측은 선박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구축함을 함대 임무로부터 선단(船團)의 호위와 대잠수함전용으로 전용해야만 했다. 따라서 영국 해군은 여러 종류의 특수 호송함을 건조했다.
반면 미국 해군은 포와 어뢰만이 아니라 수중청음기와 대잠폭탄(對潛爆彈)을 장비한 함정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이런 구축함들로 잠수함의 위협을 극복했고 이 함들이 200만 명의 미군 중 단 한 명의 병사도 잃지 않고 유럽으로 안전하게 호송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항공모함 시대의 군함
해군 전략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전함과 순양전함을 계속 격찬했지만, 이것들은 곧 새로운 해군 항공술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에는 항공모함이 항공기들을 발진·회수·격납하고 자체적으로 적의 군함을 공격해 파괴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수상함대의 전투범위는 32km에서 480km로 확장되었다.
1922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과 일본의 특사들이 워싱턴 D. C.에서 서명한 5대국 해군감축조약은 각국의 전함 보유를 제한함으로써 해군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1931년까지 새로운 전함건조가 금지되었으며, 조약에 의해 허용된 신조(新造) 전함들은 구경 406㎜ 이상의 거포를 장치할 수 없었다.
많은 노급 전함들이 해체되었지만, 일부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갑판 장갑을 배가하고 수중폭뢰에 대한 내탄력(耐彈力)의 제고를 위해 새로운 총좌(銃座)를 덧대어 재건되었다.
새로운 전함들도 건조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주력함 건조를 1만t급으로 제한했지만, 1930년대 독일은 1만 2,000t급의 대형 순양함 3척을 건조했다. 이 전함들은 중장갑과 디젤 엔진의 설치로 인해 높은 항속력을 겸함으로써 당시 어떤 순양함도 물리칠 수 있었다.
1937년 워싱턴 조약과 런던 조약이 해소된 후 일본은 '야마토호', '무사시호' 건조에 착수했는데, 이 7만 2,800t급의 배들은 사상 최대의 전함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항공모함 탑재기에 의한 급강하 폭격과 뇌격(雷擊)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전함의 장갑을 관통할 만한 속력과 파괴력을 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해상에서 기동 연습을 하는 현대식 주력함들까지도 항공모함에 의해 격침될 수 있게 되었다.
1944년 10월과 1945년 4월 미국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비행기들이 무사시 호와 야마토호를 침몰시켰다. 이 사건으로 오랫동안 군림하던 전함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비행기가 바다에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얼마 앞둔 때였다. 1910년 11월 미국 정찰정 '버밍햄호'에서 처음 비행기가 발진한 것이 비행기의 선상 발진의 시초였다. 2달 후 미국 장갑 순양함 '펜실베이니아호'에 비행기 1대가 착함했다. 1913년 영국 순양함 '허미스호'가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다.
1918년에는 여객선 '아거스호'를 개조했다. 이 배는 이물에서 고물까지 부설된 비행갑판에서 비행기들을 이착함(離着艦)시킬 수 있었다. 아거스호는 그후 건조된 모든 항공모함의 원형이 되었다.
양차 대전 사이의 기간에 해군기의 성능은 거듭 향상되었다.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들을 탑재한 항공모함은 효과적인 선박 격침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발전으로 항공모함도 적의 공격에 아주 취약해졌다. 때문에 적의 항공모함을 먼저 발견하여 격침시키는 것만이 자국의 항공모함을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또다른 방법은 자체 전투기로 항공모함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어의 열쇠는 레이더였다. 레이더 현상이 관측된 것은 1920년대였다. 1940년 영국과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레이더를 설치했다. 격납고의 장갑은 적의 전투기 공격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항공모함의 운용을 위해서는 3가지 요소가 필요했다.
함재기를 발진시키는 수단, 항공기를 선상에 회수하는 수단, 적재수단 등이 그것이었다. 항공기의 착함은 갑판을 가로질러 매달린 제동삭(制動索)에 비행기의 꼬리 밑에 붙들어맨 갈고리가 걸리게 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미국과 일본의 항공모함에서는 항공기가 비행갑판 선단(先端)에 적재되었다. 영국 항공모함에서는 항공기가 착함하는 즉시 승강기를 이용해 갑판 아래에 적재했다.
1922년 워싱턴 조약은 각 강대국에 3만 3,000t을 넘지 않는 선에서 2척의 주력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하는 것을 허용했다.
새로 건조하는 항공모함은 배수량 2만 7,000t을 넘을 수 없었으며, 어떤 항공모함도 203㎜ 이상의 포를 설치할 수 없었다. 미국과 일본은 각각 조약에 의해 건조가 중지되었던 중(重)순양전함들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했다. 미국의 '렉싱턴호'와 '새러토가호' 및 일본의 '아카기호'와 '카가호'가 그것인데, 이 배들은 사실상 3만 3,000t의 한계를 초과했다.
1936년 새로 체결된 조약은 새로 건조하는 항공모함을 2만 3,000t으로 제한했지만, 항공모함의 총수에 대한 제한은 철폐했다. 이에 호응해 영국 해군은 일러스트리어스(illustrious)형의 2만 3,000t급 항공모함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이 배들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 취역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2만 7,500t급 에식스(Essex)형을 만들어냈다. 100대 이상의 항공기를 탑재하는 이 배들은 태평양 전역(戰域) 주력함대의 항공모함이었다. 1940~43년 미국은 또한 미드웨이(Midway)형으로 알려진 일련의 4만 5,000t급 배들을 설계했다. 이 배들이 비행갑판을 장갑한 미국 최초의 항공모함들이었다. 미국의 전쟁 프로그램에는 일련의 순양함을 1만 1,000t급 인디펜던스(Independence)형의 경(輕)항공모함으로 개조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항공모함들은 제2차 세계대전중 해상작전의 모든 면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항공모함이 진주만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미국과 영국의 항공모함들이 일본 본토에 무혈 입항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사이 1942년 5월 벌어진 산호해전투는 양쪽 함대가 서로 상대를 한 번도 목격하지 못한 채로 싸운 사상 최초의 해전이었다.
1개월 후의 미드웨이 해전은 바다를 지배하면 그 바다의 상공을 지배한다는 신념을 한층 굳게 해주었다.
1942년 가을에 벌어진 솔로몬 제도 전투는 함대 작전에서 항공기와 잠수함이 모두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제해권은 공중·지상·해저 병력의 삼지창(三枝槍)이라는 것도 강조한 일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잠수함의 위협으로 영국·미국·일본 등은 상선대를 호위할 호송함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 방면에서는 영국이 선두로 비교적 소형의 호송함인 코르벳함과 그보다 훨씬 대형의 호송함인 프리깃함을 건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과 그 도중에 독일·이탈리아·영국·미국 등의 해군은 좁은 해역 전투용으로 고속 어뢰정들을 건조했다.
영국해협과 북해에서 호위를 받으며 항해하는 선단은 독일의 S보트(S는 '쾌속정'을 뜻하는 독일어 Schnellboote의 머리글자)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미해군의 PT보트(Patrol Torpedo:초계어뢰정)들은 남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수송선단을 괴롭혔다. 이 보트들은 어뢰뿐만 아니라 포도 상당량 무장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내연기관의 도입으로 해군은 가장 획기적인 발명을 했다.
수륙 양용 작전시에 적진의 해변에 대군을 신속히 상륙시키는 데 이용된 얕은 상륙용 주정(舟艇)이 그것이다. 이런 주정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50명의 병사와 장비를 해변에서 해변으로 곧바로 수송할 수 있는 대형 LST(landing ship, tank:전차상륙함)이었다.
그와 비슷한 중형 LCT(landing craft, tank:전차상륙정)는 수송선에 실려 운반된 뒤 공격시에 진수되었다.
LCT는 재래식 수송선의 대빗(davit:보트·닻 등을 달아올리는 기둥)에 맞추기에는 너무 컸다. 그래서 LCT를 운반할 수 있는 신형의 배 LSD(landing ship, dock:상륙용 주정 모함)가 특별 제작되었다. 이 배들은 주로 내연기관으로 추진되었지만 증기를 이용하는 것도 있었다.
유도탄 시대의 군함
제2차 세계대전 중반까지 항공모함이 전함 대신 현대 해군의 중핵을 확실히 차지하게 되었다.
전후 제트기와 원자력선 추진의 발달은 작전 행동의 반경과 속도를 늘렸다. 그와 동시에 항공기와 잠수함에는 물론이고 가장 작은 수상선에도 탑재할 수 있는 신형 대함(對艦) 유도탄이 개발되었다. 이 미사일은 대공포(對空砲)의 사정 밖에서 발사될 수 있기 때문에 항공모함에 특히 위협적이었다. 또 무인피사체(無人被射體)라서 방어를 위한 발포를 해도 그 진로를 쉽게 이탈시킬 수 없었다.
주된 방어 수단은 그 미사일이나 미사일 발사대를 파괴할 수 있는 유도탄을 이쪽의 함대에서도 갖추는 것이었다.
증기추진은 증기 터빈의 보일러를 가열하는 데 핵분열을 이용하는 것으로서 그 발전이 극에 이르렀다. 1945년 원자력을 선박 특히 잠수함에 이용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1955년 미국은 핵잠수함 '노틸러스호'를 진수시켰다.
20년이 지나지 않아 영국·소련·프랑스·중국까지 핵잠수함을 운용했다. 1950년대 미국은 수상선용 원자력 발전소도 개발하여,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호송함에 설치했다. 이 개발에 돈은 많이 들었지만, 수상선에 사실상 고속도에서 무한대의 행동 반경을 부여했다. 보다 소형의 호송함들도 일관성있게 강력한 추진력을 일으키는 가스 터빈의 개발에 의해 성능이 향상되었다.
장갑의 역할은 1945년 이후 크게 줄었다.
그 이유는 군함에 최대의 위협인 항공기가 이제는 유도탄과 갑판의 가장 두꺼운 장갑도 관통할 수 있는 폭탄을 탑재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군함의 새로운 미사일 무기와 컴퓨터·레이더 등은 과거의 포·포탄·화약이 차지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간을 차지했다. 그런 공간에 가장 가벼운 피복 이외에 무엇이건 씌우자면 무게가 엄청나게 늘었을 것이고, 따라서 아주 크고 값비싼 선체가 필요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重)공격 항공모함은 3가지 역할을 개발했다.
바다와 연안의 목표물들에 대한 공습(재래식 무기와 핵무기에 의한), 다른 선박들에 대한 장거리 방공망(防空網) 제공, 대잠수함전의 지원 등이 그것이었다. 단 잠수함을 실제로 파괴하는 일은 다른 군함에 일임하고 있었다. 이런 역할들을 맡으려면 제트 항공모함이 워낙 거대해졌기 때문에 강대국만이 건조하고 운용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35년 동안 미국과 프랑스만이 본격적인 규모의 항공모함을 운용했다. 미국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8만t에 길이 305m의 거함들을 만들었다.
소련은 1983년에야 대형 항공모함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전후 항공모함을 설계하는 데 있어 기술상의 주된 발전 가운데는 1951년 완성된 수압식 비행기 발사기가 있었다. 제트기를 고속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착함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나은 착함제동장치가 필요했다. 착함 관제도 향상되었기 때문에 조종사는 중대 결정을 보다 신속히 내릴 수 있었다.
1955년에는 현대식 제트 항공모함이 출현했다.
그것은 증기(蒸氣) 사출기, 각이 진 비행갑판, 조종사의 착함 관제를 향상시킨 거울식 착함장치 등을 갖춘 것이었다. 이처럼 완비된 제트 항공모함 제1호는 1955년 취역한 미국의 '포리스털호'였다.
최초의 원자력 항공모함인 미국의 '엔터프라이즈호'는 1961년 취역했다. 그 배에는 원자로 8기(基)가 장치되었으며, 1 번의 연료 보급으로 3년 이상을 항해할 수 있었다. 엔터프라이즈호는 배수량 7만 5,700t의 무게에 100대의 제트기를 탑재했으며, 30kn 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1975년부터는 니미츠(Nimitz)형이 엔터프라이즈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 8만 1,600t급의 항공모함들은 단 2기의 원자로를 동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속도는 엔터프라이즈에 맞먹었으며, 그 우라늄 핵심은 13년에 1번만 갈아주면 되었다. 소련과 프랑스는 1980년대에 원자력 항공모함을 개발했다.
대형 항공모함을 건조하여 운용하는 데 돈이 많이 드는 것은 연료·무기·정비의 양이 막대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트기에 필요한 사출기와 착함제동장치의 복잡성과 규모 때문이기도 했다. 1960년대말 영국은 제트 전투기 해리어(Harrier)를 개발했다. 이 전투기는 수직으로, 또는 유료하중이 무거우면 단거리를 구른 뒤에 이함(離艦)할 수 있는 비행기였다. 항공모함을 이 V/STOL(vertical/short take off and landing:수직/단거리 이착륙) 제트기로 장비한다면 완전한 제트 항공모함보다 훨씬 작게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사출기도 착함제동장치도 필요없기 때문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영국은 이런 항공모함 3척을 건조했다. 그것이 인빈서블(Invincible)형이다. 이 2만t급의 배들은 시해리어(Sea Harrier)기 8대와 12개 가량의 대잠함(對潛艦) 헬리콥터를 탑재했다. 이 배에는 시해리어기의 단거리 활주 이함을 돕기 위해 비행갑판 끝에 위쪽으로 경사진 '스키점프' 장치도 마련되었다.
이탈리아·스페인·소련 등도 헬리콥터와 V/STOL 제트기를 탑재하는 경항공모함들을 건조했다.
미국은 1960년대에 착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호위항공모함들의 후신으로 이오지마(Iwo Jima)형, 타라와(Tarawa)형, 와습(Wasp)형의 상륙공격함들을 잇달아 건조했다. 타라와형과 와습형은 헬리콥터와 해리어기를 탑재하는 것 이외에 상륙용 주정진수를 위한 요갑판(凹甲板)이 있는 구조로 제작되었다.
순양함과 전갑판(全甲板) 경항공모함의 중간 형태가 헬리콥터 항공모함이다. 그 탁월한 전형은 1967년 선보인 소련의 1만 7,000t급 모스크바(Moskva)형이다.
1945년 이후 항공모함을 지원하는 수상선의 가장 중요한 추세는 선형(船型)의 혼합이었다. 1945년에 순양함은 장기간 단독으로 운행할 수 있는 장갑의 거포함(巨砲艦)이었다. 구축함은 본함대를 보호하는 전위 함대의 일각을 이루었다.
프리깃함은 비행기와 특히 잠수함의 공격으로부터 상선대를 호위하도록 설계된 보다 속도가 느린 군함이었다. 이 일련의 구별이 1950년대말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프리깃함이 신형 쾌속 잠수함에 대응하기 위해 구축함에 필적하는 속력을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소형 구축함에 보다 흡사해졌다. 그와 동시에 대부분의 순양함이 장거리 대공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도록 개조됨으로써 사실상 초대형 구축함으로 바뀌었다. 결국 이 3개의 선형이 모두 대공(對空)·대잠(對潛)·대함(對艦)의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무기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동향은 포에서 유도탄으로의 전환이었다.
1990년 유도탄의 사정거리는 단거리 대(對) 미사일용 미사일의 약 4해리에서 장거리 대함 미사일의 300해리 이상에 걸쳐 분포했다. 이 미사일들 중에는 음속 2배의 속력으로 비행하는 것도 있었다. 반면 주포(主砲)들은 그 수와 크기가 계속 줄었다. 1990년에 이르러 완전 자동포가 원격조정되었다.
거포 순양함들의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착공된 배들이 완공되면서 그 막을 내렸다.
1961년 미국은 '롱비치호'를 취역시켰다. 이 배는 용골 위 전체를 유도탄으로 장치하는 순양함으로 설계된 최초의 함선이며 원자력으로 추진되는 최초의 수상 군함이었다. 이 1만 4,000t급 배에 뒤이어 미국의 원자력 추진 순양함이 일련으로 나오다가 1970년대에 1만 400t급의 버지니아(Virginia)형이 등장했다. 이 버지니아형은 1980년대에 7,400t급의 가스 터빈으로 추진하는 타이칸더로가(Ticonderoga)형 순양함들로 보완되었다.
버지니아형과 타이칸더로가형은 모두 재래식 탄두나 핵탄두를 끼울 수 있는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로 무장되었다. 타이칸더로가형 배들은 2대의 잠수함 추적용 헬리콥터를 탑재했고, 적대물을 추적하여 미사일 방어를 지시할 수 있는 고도로 복잡한 이지스(Aegis) 레이더 체제를 갖추었다.
1973년 소련은 2만 2,000t급 키로프(Kirov)형 원자력 순양함 제1호를 착공했다. 이 모형은 무기·속도·항속거리 등에서 버지니아형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잠수함이 고속화되자 많은 형의 구축함과 프리깃함이 잠수함을 추적하는 데 헬리콥터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 형의 배들은 순양함과 마찬가지로 수중음파탐지기와 레이더 감지기를 갖추었다. 또한 적대물의 신속한 탐지 및 식별과 발사 자료의 컴퓨터 입력을 위한 전자 장치도 설비되었다.
이처럼 복잡한 장비로 채워진 배는 30kn 이상의 속도를 낼 만큼 빠르고, 항속력(航速力)도 뛰어났으며, 항속 시간도 길었다. 따라서 이것은 구축함과 프리깃함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취역했던 동종의 군함보다 대형화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60년대 미국의 해군 군함으로 취역한 디젤엔진의 뉴포트(Newport)형 LST들은 만재배수량(滿載排水量)이 8,000t을 넘었으며, 수륙양용정(水陸兩用艇)과 전차를 비롯해 그밖의 전투용 운반수단들을 400명의 병사와 함께 최고 20kn의 속도로 수송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LST들은 단순히 전차와 병사들을 바닷가에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반면 이 뉴포트형 LST에는 늘일 수 있는 수압식 이동트랩이 장치되어 있었다. 때문에 전차 바닥에 실린 수륙양용정이 선미(船尾)의 출입구로부터 양륙(揚陸)되는 동안 운반수단과 군인들은 이 이동트랩을 이용하여 상륙할 수 있었다. 앨리게이터(Alligator)형 LST는 소형 소련제 뉴포트였다.
1970년대 이용되기 시작한 가스 터빈을 이용한 동력으로 공기부상식 상륙정의 배치가 가능해졌다.
이 상륙정이 바로 약 50kn의 속도로 운항해 전차와 군인을 상륙시킬 수 있는 해군의 호버크라프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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