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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대 여러 민족들이 전쟁과 상업용으로 돛이 달린 갤리선을 이용했다. 갤리선은 많은 선원이 필요하므로 비용이 많이 들지만 조종이 쉬워서 중세 성기까지 평상시나 전시에 가장 많이 쓰였다. 바이킹족이 사용한 배는 한쪽에 최대 10개의 노와 가로돛 하나를 갖춘 작은 갤리선으로 50~60명을 태울 수 있었다. 비잔티움·베네치아 및 중세 해양 강대국들은 훨씬 더 정교한 갤리선을 만들었다. 13세기까지 이탈리아 갤리선들은 플랑드르 지역과 영국, 아프리카 북서부 해안까지 진출하여 무역을 했다. 큰 삼각돛과 선미키를 갖춘 갤리선이 나옴으로써 상선으로는 쓸모없게 되었지만 군사용으로는 16세기까지 쓰였다. 18세기까지 프랑스나 그외 여러 지역의 중죄수들을 실어 배에서 노역을 시키기도 했으나 그뒤로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다.
이집트·크레타 등 고대 여러 민족들이 전쟁과 상업용으로 돛이 달린 갤리선을 이용했다. 노를 젓는 곳이 상하 2단으로 된 갤리선은 BC 700년경 페니키아인이 처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이림).
이 배는 배 양옆에 노가 서로 엇갈리게 2줄[列]로 배치되어 있으며, 윗줄의 노는 아랫줄의 노와 엉키지 않도록 위쪽에 놓여 있다.
현외부재(舷外浮材)를 덧붙여 3번째 노잡이 줄을 사용했으며, 노젓는 사람들은 다른 2개의 줄 위와 밖에 앉았다. 트라이림이라 하는 이러한 배는 BC 500년에 그리스에서 건조된 것으로 보인다. 더 많은 노잡이 줄이 있는 퀸퀴어림은 초대형 선박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단지 노잡이 줄이 2~3개가 있었다.
로마 말기, 전함 갤리선은 선체가 길고 좁아졌으며, 이물충각이 있어 상용(商用) 갤리선과는 많이 달랐다. 선체가 더 넓고 깊은 상선에는 점차 돛을 사용했으며 나중에는 모든 항해용 선박이 상선으로 쓰였다. 그러나 중세말까지도 모든 갤리선이 상선으로 이용된 것은 아니다. 한편 갤리선은 많은 선원이 필요하므로 비용이 많이 들지만 조종하기가 편해서 중세 성기에 이르기까지 평상시나 전시에 가장 많이 쓰였다.
바이킹족이 사용한 배는 한쪽에 최대 10개의 노와 가로돛 하나를 갖춘 작은 갤리선으로 50~60명을 태울 수 있었다. 비잔티움·베네치아·제노바 및 그외 중세 해양 강대국들은 훨씬 더 정교한 갤리선을 만들었다. 13세기까지 이탈리아 갤리선들은 플랑드르 지역과 영국, 나아가 아프리카 북서부 해안까지 진출하여 무역을 했다. 1291년 2척의 제노바 갤리선은 서아프리카 해안을 지나 서인도 제도로 통하는 항로를 찾다가 좌초되었다.
큰 삼각돛(세로돛)과 선미(船尾)키를 갖춘 갤리선이 나옴으로써 상선으로는 쓸모없게 되었지만 군사용으로는 16세기까지 쓰였으며,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세기까지 프랑스나 그외 여러 지역의 중죄수들을 실어 배에서 노역을 시키기도 했으나 그뒤로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다. 초기 갤리선에는 전시에도 믿을 수 있는 민간인들을 많이 고용했으나 때로 전쟁포로를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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