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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다른 표기 언어 Carthage
요약 테이블
위치 튀니지의 지중해 연안
인구 24,216명 (2014 추계)
면적 8.3㎢
대륙 아프리카
국가 튀니지
참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1979년)

요약 BC 814년 티레의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 북쪽해안에 건설했으며, 지금은 튀니스 시의 교외 거주구역이다.
BC 3세기 중반부터 BC 2세기 중반까지 카르타고는 로마와 일련의 전쟁을 치렀다. 포에니 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들은 카르타고의 완패로 끝났다. 카르타고가 BC 146년 최종적으로 무너졌을 때 그 도시는 약탈과 방화로 폐허가 되었다. BC 29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 행정중심지로 이곳을 정했다. 그후 이곳은 콜로니아율리아카르타고로 알려지고 번창하게 되었으나 3세기 중엽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는 705년 아랍군에게 함락된 후로는 완전히 빛을 잃었다. 로마의 카르타고는 파괴되었지만 요새의 윤곽, 수도교, 주악당, 극장, 원형경기장, 목욕탕과 신전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안토니우스의 목욕탕(Baths of Antoninus)

카르타고에 있는 안토니우스 목욕탕 유적

ⓒ BishkekRocks/wikipedia | Public Domain

BC 814년 티레의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 북쪽해안에 전통적인 양식으로 건설했으며, 지금은 튀니스 시의 교외 거주구역이다.

카르타고의 건설에 관해서 이 도시를 카르케돈으로 부른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가지각색의 전설이 유포되었지만, 로마 쪽의 전설이 〈아이네이스 Aeneid〉로 인해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서사시에는 오빠 피그말리온(역사상의 티레의 왕 이름)을 피해 도망친 티레의 공주 디도가 카르타고를 건설했다고 나와 있다.

그 주민들은 로마인들에게 포에니(Poeni)인으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페니케스(페니키아인)에서 유래했으며, 'Punic'(포에니의)이라는 형용사는 여기에서 파생했다. 카르타고의 건설 연대는 고고학적 자료와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카르타고인들이 과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설상의 건설 연대보다 만 1세기가 지난 BC 8세기 초반 이전 유적으로 발견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튀니스 만 연안의 중앙에 카르타고의 건설을 위해 선정된 부지는 이상적이었다. 도시는 낮은 언덕들로 이루어진 3각형의 반도 위에 건설되었고, 배후에는 안전한 정박지가 있고 어류의 공급이 풍부한 튀니스 호가 있었다. 도시의 부지는 잘 보호되어 있어 방어하기가 용이했다.

남쪽에서 반도는 좁은 지협을 통해 본토와 연결된다. 고대의 성채 비르사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 위에 있었다. 카르타고의 가옥과 공공건물의 유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데도 그 언덕에서는 최초의 무덤 몇 개가 발견되었다. 카르타고인들이 누린 문화생활의 수준은 고대 지중 해 세계의 좀더 큰 도시들보다 훨씬 뒤졌을 것이다.

포에니인들의 주요관심은 상업이었다. 로마 시대에 포에니의 침대·쿠션·방석 들은 사치품으로 간주되었으며, 포에니의 소목 세공과 가구들은 다른 곳에서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카르타고의 재정수입 가운데 상당량은 일찍이 BC 800년경에 시작된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지방의 은광 채굴에서 생기는 것이었다.

BC 3세기 중반부터 BC 2세기 중반까지 카르타고는 로마와 일련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포에니 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들은 카르타고가 로마에 완전히 패하는 것으로 끝났다. 카르타고가 BC 146년에 최종적으로 무너졌을 때 그 도시는 약탈과 방화로 폐허가 되었고 그곳에 사람이 거주하는 것은 일체 금지되었다.

BC 122년 로마의 원로원은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에게 카르타고의 옛 터에 식민지를 건설하도록 위임했다. 그 건설사업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다수의 토지 없는 시민을 보냈으며, BC 29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 행정중심지로 이곳을 정했다. 그후 이곳은 콜로니아율리아카르타고로 알려졌으며, 알렉산드리아나 안티오크와 맞먹을 정도로 번창하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로마 황제들 중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 도시를 좋아했다.

제국 후기의 이곳 역사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3세기 중엽부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2세기가 끝날 때부터 그리스도교 주교의 소재지가 되었으며, 이곳의 선각자들 가운데에는 그리스도교 교부들인 테르툴리아누스와 성 키프리아누스가 있었다.

4, 5세기에 카르타고는 도나투스파와 펠라기우스파의 논쟁으로 계속 시달렸다. 439년에 반달족의 지도자 가이세릭이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입성해 도시를 약탈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비잔틴 군대가 반달족의 마지막 왕 겔리메르를 데키뭄 부근에서 격파하고 카르타고에 무저항으로 입성했다(533). 카르타고는 705년에 아랍군에게 함락된 후로는 신흥도시 튀니스에 밀려 완전히 빛을 잃었다.

로마의 카르타고는 파괴되었지만 그 유적은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많은 요새의 윤곽과 수도교(水道橋)이다. 과거의 비르사 성채 구역은 유노와 유피테르와 미네르바를 모시는 큰 신전으로 장식되었고, 그 근처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친 신전이 서 있었다. 또한 비르사가 있던 자리에는 옥외 주랑(柱廊) 현관이 세워졌는데, 그 현관을 장식했던 카르타고의 가장 우수한 조각작품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밖의 로마 시대 도시의 유적으로는 주악당(奏樂堂), 하드리아누스가 세운 극장,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떠 지은 원형경기장, 수많은 목욕탕과 신전들, 곡마장이 있다.

시내에 있는 그리스도교도의 건물들은 반달족의 건축물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잔틴 양식으로 되어 있다. 가장 큰 바실리카는 본래 바실리카가 있던 자리에 6세기에 재건된 것이다. 3, 4세기에도 교회들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자취는 남아 있지 않다.

카르타고 유적(Punic ruins)

ⓒ Pradigue/wikipedia |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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