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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 창의군

다른 표기 언어 十三道倡義軍

요약 1907년 8월 일본에 의한 군대해산을 계기로 9월에 이은찬 등이 이인영을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전국적인 의병조직을 만들었다. 이인영은 비밀격문을 전국에 배포하고 동시에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호소문을 보내 조선침략의 불법성을 성토하고, 의병전쟁의 합법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각 도 의병장들은 그해 11월에 양주로 집결했는데 이때 참여한 총병력은 1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의병운동사상 가장 크고 강력한 의병군이었다. 그러나 신돌석과 홍범도 등이 이끄는 부대는 의병장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이들 13도 창의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려는 작전을 실행했으나 이 계획을 사전에 안 일본군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고, 이인영이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의병운동을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진영에 돌림으로써 지도부가 붕괴되어 의병의 주력부대는 흩어져 물러서고 말았다. 결국 1908년 2월 28일에 해산한 이후 13도 창의군은 각기 근거지로 돌아가 개별적인 의병활동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13도 창의군

서울 망우동에 있는 13도 창의군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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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8월 일본에 의한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9월 강원도 원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장 이은찬(李殷瓚)·이구재(李九載) 등이 경상북도 문경에서 은거하고 있던 이인영(李麟榮)을 설득하여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隊將)으로 추대하고 전국적인 의병조직을 만들었다.

대장에 오른 이인영은 원주를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비밀격문을 전국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1907년 9월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호소문을 보내 조선침략의 불법성을 성토하고, 의병은 순수한 애국단체로서 열강들도 이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하고 도와줄 것을 호소함으로써 의병전쟁의 합법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원주를 떠나 횡성·지평·의령·춘천 등지를 왕래하면서 8도 의병을 규합하기 위해 각 도의 의병장과 의병부대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도록 했다.

그의 비밀격문과 통문에 따라 각 도 의병장들은 그해 11월에 양주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전국 연합부대의 편성에 착수했다. 이때 집결한 각 도의 의병부대는 전라도 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본명은 文泰鉉), 충청도 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관동(關東) 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 교남(喬南:경상) 창의대장 신돌석(申乭石), 관서(關西) 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關北) 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 진동(鎭東:경기·황해) 창의대장 허위(許蔿) 등이었다. 이때 참여한 의병의 총병력은 1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 가운데 강원도 지방의 의병이 8,000여 명이었다.

신식 소총을 가진 3,000여 명의 해산군인도 포함되어 있어서 의병운동사상 가장 크고 강력한 의병군이었다.

이후 13도 연합의병부대를 전체적으로 재편성하게 되었다. 원수부 13도 총대장(元首府十三道總大將) 이인영, 군사장 허위로 하여 각지역의 의병대장으로 관동 민긍호, 호서 이강년, 교남 박정빈, 경기도·황해도 권중희, 관서 방인관, 관북 정봉준, 호남 문태수를 각각 임명했다.

그러나 전국연합 의병부대 재편성 과정에서 당시 일본군경의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던 신돌석과 평민출신 홍범도·김수민 등과 같은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는 제외되었다. 이들 평민출신의 의병장은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배제되었기 때문에 이후 의병부대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지 못하고, 전략적으로도 투쟁성과 기동전술이 미비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들 13도 창의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려는 작전을 실행하는 방법으로 일본군의 방위망을 뚫기 위해 각 의병대가 분산하여 서울로 향하되, 같은 날 동대문 밖에 집결하기로 예정했다.

따라서 허위는 몸소 결사대 300명을 인솔하고 서울 성문 밖 30리 지점에 이르렀고, 이어 다른 부대들이 도착했다. 그러나 이 계획을 사전에 안 일본군은 양주 의병의 진로를 차단하는 한편, 한강의 선박 운항을 일체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며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허위의 선착 부대는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퇴각했다. 더욱이 창의대장 이인영이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고향인 문경 집으로 돌아갔고, 의병운동을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진영에 돌림으로써 지도부가 붕괴되어 의병의 주력부대는 흩어져 물러서고 말았다.

결국 1908년 2월 28일에 해산한 이후 13도 창의군은 각기 근거지로 돌아가 개별적인 의병활동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의병운동에서 수도 서울의 탈환은 모든 의병부대의 궁극적인 목적이었고 이를 위한 세부적인 작전계획을 세운 예도 적지 않았지만 이때 실제로 의병연합부대를 조직하여 전투를 감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탈환작전의 실패는 그후 의병운동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남겼다.

처음부터 연합부대는 양반유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의병장이라도 신분적 차이를 용납하지 않아 전민족적 참여와 단결을 꾀하지 못했던 점,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냉엄한 이해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나 지원을 호소하고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어 철저한 무력항쟁으로 나서지 못한 점 등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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