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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전투

다른 표기 언어 牛金峙戰鬪

요약 우금치전투는 농민전쟁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전투였으나, 농민군이 대패함으로써 농민전쟁 실패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관군과 합세하여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했다.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부는 삼례에서 항일전쟁을 위한 군비를 준비한 후 논산에서 2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전봉준은 그해 10월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부대와 합류했고, 공주를 완전히 포위하여 총공격을 하기로 했다. 10월 24일 공주로 진격하여 이후 11월 10일까지 2차례에 걸쳐 처절한 공주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패배하여 제2차 농민전쟁은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호남 일대에서 이규태·이두황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무자비한 농민군 살육전이 자행되었다.

농민전쟁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전투였으나, 농민군이 대패함으로써 농민전쟁 실패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894년 6월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정권을 수립하고, 평양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은 조선정부군과 합세하여 농민군을 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새 공사로 임명하는 등 남하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그해 9월 전봉준(全琫準)은 삼례(參禮)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동학 남접·북접 연합전선을 이루었고 공주-수원-서울의 진격로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전봉준은 우선 4,000명의 직속부대를 이끌고 공주로 북상하면서 남원에 진주하던 김개남(金開南)에게 합류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해 10월 중순 논산 풋내에서 손병희(孫秉熙)가 이끄는 북접부대가 합류했고, 이들은 2만여 명의 군세로 공주를 완전히 포위하여 일시에 총공격을 하기로 했다.

반면 정부군은 신정희(申正熙)를 양호순무사, 허진(許璡)·이규태(李圭泰)·이두황(李斗璜) 등을 주요지휘관으로 2,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일본군은 보병 18대대 및 미나미[南小四郞] 지휘하의 부대 등 200여 명으로 '동학당정토군'(東學黨征討軍)을 편성하여 각 처에서 농민군을 학살하면서 공주로 들어왔다. 그해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이인(利仁)·효포(孝浦) 등에서 제1차 접전이 벌어졌는데, 농민군은 패배하여 경천점으로 후퇴했다.

전봉준은 다시 김개남에게 후원을 요청했으나, 김개남부대는 금산·진잠으로 진격한 뒤 청주에서 정부군에 패하여 남쪽으로 다시 내려가 끝내 합류하지 않았다. 그해 11월초 전열을 재정비한 농민군은 다시 노성·경천으로 진출하여 군량을 비축하고 각 요지에 포대를 설치한 뒤 주공격로로 우금치를 잡는 한편, 곰티·검상마을·곰내·하고개·주미산 방면을 보조공격로로 잡았다.

그리고 금강 건너 유구 쪽에 홍성 농민군과 세성산 전투에서 후퇴한 농민군을 배치하여 공주를 위 아래에서 협공하기로 했다. 그해 11월 8일 마침내 대포를 쏘고 깃발을 흔들면서 총공격을 개시하여 경천에서 무너미고개·이인으로 각각 진격하여 관군을 우금치로 밀어붙였다. 이에 일본·조선정부 연합군은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으로 하여금 우금치 옆 뱁세울 앞산에 주둔하게 하고, 최후 방어선을 우금치·금학동·곰티·효포 봉수대로 설정하여 관군을 배치했다.

다음날 아침 농민군 일부가 관군 방어선의 곳곳을 공격한 뒤 여러 차례 주의를 분산시키는 사이,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우금치로 진격했다. 일본·조선정부 연합군은 월등한 화력의 최신무기로 농민군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이기동(李基東)이 농민군의 좌측을, 조병완(曺秉完)이 우측을 공격했다. 정면과 좌우측에서 협공을 당한 농민군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공주의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는 봉황산으로 진격하여 공주감영을 치려 했으나 하고개 및 금학동 골짜기에서 관군의 우세한 화력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4일간에 걸친 2차 공주접전에서 대패했고, 전봉준은 군인·이서(吏胥)·상인들이 농민군과 손잡고 일본군과 개화정권을 몰아낼 것을 호소했으나 실패했다. 승세를 잡은 일본·조선 정부 연합군은 11월 14일 노성에 주둔한 농민군을 세 방면에서 추격하여 다음날 일제히 협공을 가해, 농민군은 대촌(大村) 뒷산, 소토산(小土山)으로 계속 후퇴하다가 논산 황화대(黃華臺 : 지금의 봉화산) 아래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이미 패색이 짙어 사기마저 떨어져 계속된 원평·태인 전투에서 패하여 전봉준은 마침내 농민군 해산 결정을 내렸고, 자신도 12월 2일 순창에서 잡히고 말았다. 이후 호남 일대에서는 이규태·이두황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무자비한 농민군 살육전이 자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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