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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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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달려 있다
요약 테이블
출생 617년
사망 686년
국적 한국

신라의 고승. 설총의 아버지. 특정한 스승이 없이 여러 교학과 학승들을 편력하며 혼자 공부했다. 출가하기 전의 이름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원효는 그의 법명(法名)이다. 원효는 왕실과 귀족 등에게만 받아들여진 불교를 일반 백성들에게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제자를 양성하는 데에는 큰 뜻을 두지 않았으며, 신라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중국에 널리 알려져 중국 화엄학이 성립되는 데에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특히 고려 시대에 들어와 의천에 의해 화쟁 국사로 추증되면서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불교 사상을 종합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한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이자 으뜸가는 저술가다.

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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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끼에 밤 한 알도 많다

원효는 신라 진평왕 때에 지금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 밤실에서 오색구름이 찬란한 가운데 첫 울음소리를 냈다. 그의 출생 상황은 석가와 비슷했다. 그의 어머니는 유성(별똥별)이 배 속으로 들어와 요동을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꿈을 깼다. 그 직후 그녀는 아기를 잉태했으며, 친정집으로 가던 중 아랫배가 아파 밤나무 밑에서 쉬다가 원효를 낳았다. 그녀는 갑자기 산기가 있어 남편의 옷을 그 밤나무에 걸어놓은 채 해산하는데, 그 때문에 그 밤나무를 '사라수각주1) '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중에 원효는 이곳에 절을 지어 '사라사'라 이름 지었으며, 집까지 절로 개조하여 초개사(初開寺)라 했다.

'사라밤'이라 불렸던 사라수의 밤(栗)은 유난히 커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을 정도다. 후세에 이곳 사라사의 한 노비가 '한 끼 식사로 주는 밤 두 알이 너무 적다'며 관가에 고발했다. 관리가 조사해보니 밤 하나가 큰 사발에 가득 차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한 끼에 밤 두 알은 너무 많으니,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원효의 아버지 설담날은 하급 관리 내마(柰麻, 17관등 중 11번째)였다. 원효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이때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사람은 왜 죽을까?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 하는 철학적인 사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생로병사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효의 소년 시절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스승에게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쳤다고 전한다. 다른 청소년들처럼 화랑각주2) 이 되어 학문은 물론 궁술, 검술, 기마술과 풍류 등을 익혔으며, 백제와 치른 전투에도 참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불교에 귀의한 것은 29세 무렵으로, 백제와의 전투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혹자는 그가 출가하게 된 계기를 방울스님과의 만남 때문이라고도 한다. 원효가 방울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은 그의 근심이 무엇이고 또 왜 번민에 젖어들고 있는지를 환히 꿰뚫어보고, 원효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귀와 영화는 헛된 꿈이야. 생사병고, 고통, 시련, 번민 같은 것은 모두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진정한 이치를 깨닫게 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 삶의 희열을 느끼게 되는 거야."

원효가 이 말을 듣고 불교의 도를 닦자는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불교의 진리 탐구에 매진하며, 장차 이차돈각주3) 같은 고승이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는 어려운 사람을 돌보아주고 병든 사람을 불공으로 치유하는가 하면,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아이를 귀여워했다.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초개사는 난데없이 붐비기도 했다.

이 무렵 친척지간인 의상대사[해동(海東) 화엄종의 창시자]가 찾아왔다. 불법을 더 깊이 알고 또 행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에 다녀와야 한다며 같이 갈 것을 청했다. 650년, 원효의 나이 33세에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당나라를 지척에 둔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의 순찰대에 붙잡혀 첩자 혐의로 심문을 받고, 얼마 후 풀려나서 귀국했다.

661년에 의상대사와 원효는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가기 위해서 서해안의 당주(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부근)에 도착했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무역선을 기다리다가 해가 저물었다. 두 사람은 하룻밤 지낼 곳을 찾아 어둠 속을 헤매다가 빈 초막을 찾아 들어가 잠들게 되었다. 밤중에 심한 갈증을 느껴 잠을 깬 원효는 주위를 더듬다가 그릇에 물이 들어 있음을 알고 그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는 해가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그가 잠들었던 곳은 초막이 아니라 무덤이었으며, 맛있게 들이켰던 물은 해골에 괴인 썩은 물이었다. 그것을 알자마자 원효는 뱃속에 든 것을 전부 토해내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원효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오직 마음 하나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법을 구하러 당나라에 들어가려 했으나, 이제 구태여 당나라에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원효는 의상대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원효는 그 뒤로 좋고 나쁨, 길고 짧음, 나와 너의 구별을 초월하고 어떤 계율이나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의상대사는 초지일관하여 당나라로 가서 지엄(智儼)에게 화엄학을 배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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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약간 다른 이야기도 전하는데, 원효와 의상대사는 노곤하여 굴속에 드러누워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굴은 무덤이었고, 무덤 안에는 해골이 뒹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온몸이 오싹해졌으나, 그 다음날도 비바람이 계속 몰아쳐서 어쩔 수 없이 그 무덤에서 다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첫날밤의 평온함과는 달리 꿈속에 온갖 잡귀들이 나타나 원효를 괴롭혔고, 또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번뇌와 망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리하여 원효는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요석 공주와의 하룻밤

경주로 돌아온 원효는 엄한 계율에서 벗어나 문란한 생활을 즐겼다. 계율을 깨뜨린 '파계승'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원효는 이렇게 맞섰다.

"더러움과 깨끗함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속된 것과 참된 것 역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원효의 법회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잘생겼고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을 뿐 아니라, 설법의 내용 또한 감동적이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느 날 그는 "도끼에 자루를 낄 자가 없느냐? 내가 하늘을 받칠 큰 기둥을 깎아보련다!"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아무도 그 뜻을 몰랐는데 태종무열왕각주4) 이 이 노래를 전해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은 모양이구나!' 하고 과부가 된 자신의 둘째 딸 요석 공주를 마음에 두고 관리에게 원효를 찾게 했다.

관리들이 때마침 문천교를 건너는 원효를 발견했다. 관리들이 자기를 찾는 것을 눈치챈 원효는 일부러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물에 빠져 옷이 흠뻑 젖었으므로 관리들은 그를 가까운 곳에 있는 요석궁으로 데려갔다. 원효는 옷을 말리기 위해 옷을 벗고 하룻밤을 지내다 공주와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어 파계했다. 그는 승려의 옷을 벗어버리고 자기를 소성(小性)거사 또는 복성(卜性)거사라고 불렀다. 그 후 요석 공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설총각주5) 이다.

그러나 원효는 결혼 2주 만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불자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는 늘 백성들에게 쉽게 불교를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어느 날 우연히 원효는 광대들이 표주박을 가지고 춤추는 것을 구경하다가 '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퍼뜨리면, 무지한 대중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하여 그는 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표주박을 두드리면서 화엄경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서 큰 길 위를 걷기도 하고, 거지들과 한데 어울려 잠을 자기도 하며, 귀족들 틈에 끼여 기담(이상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으로 날을 새우기도 했다. 때로는 깊은 산중의 암자에서 꼼짝하지 않고 좌선각주6) 하고 지낼 때도 있었으며, 분황사 무애당에서 홀로 밤을 새우며 책 쓰는 일에 골몰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그는 다른 승려들로부터 멸시받고 소외되었다. 그러던 중에 불교에 관심이 많은 왕이 '불교 경전 중 왕들에게 부처의 도를 닦는 법과 나라를 보호하는 방도에 대해 설교하는 내용'인 《인왕경》을 듣기 위해 전국의 고승들을 불러들였는데, 이때 원효도 추천되었다. 그러나 다른 승려들에게 배척을 받아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백 개의 서까래와 하나의 대들보

얼마 후 왕이 당나라에서 《금강삼매경각주7) 》을 구했는데, 그 해설을 듣고 싶어 대규모의 법회를 열도록 명했다. 전국의 고승들을 초대하고 강의할 대사를 물색했으나, 《금강삼매경》은 대단히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강의할 만한 마땅한 인물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때 어떤 승려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대안 법사를 추천했다. 그러나 대안 법사는 《금강삼매경》을 훑어보고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이것을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원효밖에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초개사에 머물던 원효는 왕이 보낸 사신을 따라나섰다. 그는 소를 타고 가면서 양쪽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붓을 들어 강론할 《금강삼매경》을 풀이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각승(角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5권으로 된 이 책을 누가 훔쳐가고 말았다. 원효는 하는 수 없이 왕에게 아뢰어 사흘을 더 연기하고는 다시 3권으로 소(疏, 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지었다. 이것이 바로 《금강삼매경론》이다.

왕은 물론 여러 대신들과 전국의 명망 높은 스님들 앞에서 원효는 강해를 시작했다. 그 강론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히 장내에 울려 퍼졌으며, 위풍당당한 그의 모습을 찬양하는 소리가 고승들의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중에 처음부터 계속 눈물을 흘리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다름 아닌 요석 공주였다. 감격에 겨워 그녀는 "부처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마침내 장내에 다음과 같은 외침이 울렸다.

"원효대사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시다!"

강론을 끝마친 원효는 장내의 고승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얼마 전 나라에서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 나는 감히 그 축에 낄 수도 없었는데, 이제 하나의 대들보를 구하게 되니 비로소 나 혼자 그 역할을 하는구나!"

그때부터 더욱더 연구에 몰두하니, 그의 연구가 미치지 않는 불경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686년 3월 30일, 산중 깊숙이 자리 잡은 경천 남산의 작은 절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니, 원효의 나이 69세였다.

철학 속으로

원효가 과제로 느낀 것은 불교가 공인된 지 10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언뜻 보기에 서로 모순된 불교 이론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체계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시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경전을 분류하고, 거기에 각각 독자적 해석을 더하여 주석을 달았다. 특히 그는 서로 모순되고 대립하는 견해들을 극복하는 데에 '화쟁'이라는 자신의 독특한 개념을 사용했다. 화쟁은 원효의 핵심 사상인 화해(和解)와 회통(會通)의 논리 체계를 이르는 말로 특정 종파를 고집하지 않고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결시켜 사상 체계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불교 사상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고려 시대의 의천과 지눌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원효의 사상은 일심(一心)이라는 용어에 응집되어 있다. 일심이란 모든 중생의 마음을 가리킨다.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의 진여(眞如)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은 항상 망념과 번뇌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무지(無明) 때문에 미망의 현상적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달으면 곧 마음은 그 원천으로 돌아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진(眞)과 속(俗), 부처와 범부, 보리[불교 최고의 이상적 경지인 정각(正覺, 올바로 깨달음)의 지혜]와 번뇌 간의 대립이 해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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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집필자 소개

전남 영광 출생. 전남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북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내에서 윤리교육과 학과장, 학생생활연구..펼쳐보기

출처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 저자강성률 | cp명평단문화사 전체항목 도서 소개

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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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원효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강성률, 평단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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