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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나 궤를 잘 여는 도둑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빗장을 잘 질러야 하며, 자루를 잘 뒤지는 도둑을 막으려면 끈을 단단히 동여매야 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처신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비를 잘 해도 큰도둑들은 통째로 들고 가면서, 빗장과 노끈이 느슨하지 않을까 걱정을 한다. 그러니 지혜로운 처신이라는 것은 한낱 큰도둑만을 이롭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지혜로운 성인의 역할은 큰도둑이 가져갈 재물을 보관했다가 내어 주는 곳간지기에 지나지 않는다.거협(胠篋)
옛날 제(齊)나라는 비옥한 토지가 사방 2천 리에 달했고, 사회가 안정되어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성인의 법도에 따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웠으며 읍옥(邑屋, 땅의 넓이를 기준으로 한 단위), 주려(州閭, 려는 가옥을 기준으로 한 행정 단위), 향곡(鄕曲, 125려로 이루어진 행정 단위) 등의 행정 구역을 정해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태평성대도 잠시, 전성자(田成子)라는 도둑이 등장해 임금을 죽이고 왕권을 도둑질했다. 이로써 제나라는 권력뿐만 아니라 성인이 지혜로 이룩한 법도마저 잃게 되었다. 전성자는 도둑에 불과하나 요·순임금에 버금가는 영화를 누렸으며, 주변에 있는 국가들마저도 눈치를 봐야 하는 권력을 누렸다. 그의 이러한 부귀영화는 자손 대대로 이어졌다.
제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성인의 우쭐대는 지혜는 도둑이 가져갈 곳간을 지키는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가에서는 노자와 장자 외에 다른 학파들이 내세우는 정치 학설을 ‘유위(有爲)의 정치’라고 하며, 노자와 장자의 무위(無爲) 정치와 대비해서 비판한다. 특히 장자는 유위 정치의 맨 위에 유가를 놓고 더욱 심하게 비판했다. 이는 인의를 바탕으로 덕치(德治)를 주장하는 유가의 정치 철학이 무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도가의 입장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성인의 덕을 본받아 질서를 안정시키고 문물제도를 개혁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공자가 내세우는 성인의 덕이란 인위적인 개혁과 위계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장자는 유가의 이러한 주장을 상자, 궤, 자루를 마련해 재물을 담고, 이를 잘 단속해 도둑에게서 지키려는 노력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전성자의 예에서 보듯 큰도둑에게는 지혜로운 자의 백 가지 처방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완벽하게 잠그고 단단히 동여매도 송두리째 들고 가면 소용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철저한 단속이 도둑질에 편리만 제공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생각에서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만드는 것은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재물을 쌓아 둘 욕심이 없다면 상자와 궤, 그리고 담아 둘 자루가 필요하지 않듯이, 살아가기에 편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마음조차 버린다면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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