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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미케네 문명이 파괴된 뒤부터 BC 8세기까지를 암흑시대라고 한다. 이후 도리스족의 침입 등 몇 차례의 이주로 그리스가 다시 세워졌다. 도리스족과 이오니아족은 암흑시대부터 서로 적대관계였다. BC 750년경 암흑시대가 끝나고 도시국가들의 복합체 형태가 등장했다. 이오니아족이 세운 도시국가는 아테네였다. 그리스 도시국가는 자연적인 지리적 구분과 종족적·종교적 구분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도시국가는 소수의 배타적인 일족이 시민권과 정치권력을 독점했으므로 귀족주의적이었다. 귀족주의적 질서가 처음 무너지기 시작한 코린트에서 최초의 그리스 참주정치가 등장했다. 참주정치를 경험하지 않은 도시국가들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스파르타였다. 고대 그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밖에 몇몇 도시국가의 역사가 그 중심을 이룬다.
개요
고전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미케네 문명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뒤부터 BC 8세기까지 흔히 암흑시대라고 부르던 수백 년 동안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지 못했고 실제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암흑기). BC 5세기의 위대한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트로이 전쟁부터 그 자신의 시대까지 수백 년에 걸친 역사를 썼지만, 이 극적인 공백기에는 어떤 빛도 비추어 주지 못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미케네 시대 이후 몇 차례의 이주로 그리스가 다시 세워진 과정에 대해서는 약간의 정보를 알려준다. 그 이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도리스족의 침입'인데 그리스인들은 이를 전설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자손들의 귀환'과 결부시켰다.
도리스족과 이오니아족들은 암흑시대부터 서로를 적대시했다. 이오니아족이 세운 가장 유명한 도시는 아테네였다.
그리스 역사에서 객관적으로 역사적인 정확성을 인정받는 최초의 연대는 제1회 올림픽 제전이 열린 BC 776년이다(→ 올림픽 대회). 기록을 남기고, 올림피아 같은 성역을 중심으로 하나 이상의 공동체를 조직하는 활동은 BC 8세기초로 올라간다.
1981년에 고고학자들은 암흑시대에서도 '가장 어두운' 시대를 되짚어 원시 기하학 시대(BC 1075경~900)까지 추정하게 되었다.
원시 기하학 시대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 도자기에 그려진 기하학적 무늬에서 나온 것이다. 매우 화려한 고분 하나가 1981년 그리스 에우보이아 섬의 레프칸디에서 발견되었는데, 연대를 확인한 결과 BC 1000년경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까지의 일반적인 생각에 따르면 BC 1000년경의 그리스는 가난하고 고립된 지역이었지만, 이 고분의 발견을 통해 적어도 그리스에 있는 한 섬의 한 모퉁이는 그 무렵 가난하지도 않았고 고립되어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레프칸디에 있던 커다란 여러 신전은 폴리스(복수형은 폴레이스)라고 부르던 도시국가들이 세워지기 시작한 시대의 것이다.
'폴리스 형성'이라는 명사를 가리켜 그리스인들은 시노이키스모스(synoikismos)라 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한데 모으기'라는 뜻이며 투키디데스는 시노이키스모스를 2종류로 나누었다. 첫째는 한 도시에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물리적인 인구 집중이고, 둘째는 사람들을 종전처럼 흩어져서 살게 두되 정치적으로만 통합을 이룩하는 것이다.
투키디데스가 예로 든 아티케는 초기에는 정치적 통합만 이루었을 뿐, 페리클레스가 많은 시골 주민을 아테네 성벽 안으로 데려온 BC 431년 전까지는 물리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도시국가의 기원은 사모스 섬의 거대한 헤라 신전 건립처럼 기념비적 건물이 최초로 세워진 때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런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했다는 것은 강한 집단 의식을 가진 도시국가의 형성을 전제로 한다.
또다른 이론에 따르면 공동체가 자신의 영토로 삼고자 하는 지역의 가장자리에 성역을 만든 것이 그리스 도시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한다. 세번째 이론은 도시국가의 기원을 좀더 격식을 갖춘 매장 관습과 결부시킨다. 이런 매장 의식은 BC 8세기에 더욱 보편적이 되었는데 이러한 매장의 '민주화'는 사회에 대한 태도가 근본적으로 새로워졌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또다른 이론은 그리스의 지형이 대개 산맥으로 둘러싸여 방어하기 쉬운 비좁은 충적평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지형 자체가 끊임없이 경계선을 넘어 전쟁을 벌이려는 작고 매서운 도시국가의 탄생을 어느 정도 촉진했다고 주장한다.
페니키아의 식민지 개척자들 역시 많은 인구가 모이는 중심지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페니키아 해안에 그리스의 초기 도시국가와 많은 점에서 비슷한 공동체가 세워짐에 따라 그리스인들은 이들과 자주 상거래를 했음이 분명하다.
암흑시대에 형성된 수많은 대(大) 집단은 집단 구성원들이 배타적인 지역적 동질성을 갖게 될 만큼 오랫동안 존재했다. 이오니아족과 아나톨리아의 도리스계(系) 그리스인, 심지어는 카리아족(그리스인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그리스화한 민족)까지도 각각 인보(隣保) 동맹(암픽티오니아)이라는 연합체들을 이루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오래 지속된 인보동맹은 그리스 중부에 있는 델포이 신전을 관리했다. 여기에는 유명한 그리스 신탁소가 있었는데, 이런 신탁소들은 특정한 질문에 대해 신의 계시를 받은 신탁으로 답하는 기능을 했다.
도시국가들은 소수의 배타적인 일족이 시민권과 정치 권력을 독점했다는 의미에서 귀족주의적이었다.
BC 7세기의 시인 헤시오도스의 시에는 일반적으로 왕을 뜻하는 바실레우스(복수형은 바실레이스)의 억압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귀족주의의 가치관은 가정 안에서 입에서 입으로 대를 이어 수직적 방식으로 전해졌을 뿐 아니라 심포시온(symposion)이라고 부르는 중요한 제도를 통해 수평적으로도 전해졌다. 먹고 마시는 행사였던 심포시온은 의식적(儀式的)인 요소가 강했다.
호메로스 시대의 시(詩)에 개최자의 지위를 과시하는 화려한 축제와 격식을 갖춘 연회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귀족주의 가치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강렬한 동성애(同性愛)도 귀족주의 가치관의 일부였다. 이런 관계는 김나시온(gymnasion)이라고 부르는 신체 단련장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김나지움).
심포시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성애 행위는 대부분 의식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올림픽 제전이 도시국가 사이의 운동시합이듯이 심포시온과 김나시온은 도시국가 사이의 경쟁이나 전쟁에 대한 채비를 반영한 것이다.
대규모 운동경기 제전은 그리스 개별 사회의 내부 조직보다는 도시들 사이의 상호 관계와 더 큰 관련이 있다. 도시들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규칙은 이른바 크세니아(xenia:손님에 대한 우정)였으며 이 관계 자체에 의식적 요소가 더욱 강했던 지역에서는 이런 제도 전체를 '의례화(儀禮化)한 우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도시 국가들 사이에 주로 이루어진 상호 작용은 우정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신화적인 '트로이 전쟁' 이후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그리스 전쟁은 렐란티네 전쟁이다(→ 렐란티네 전쟁). 이 전쟁은 BC 8세기말경 에우보이아의 주요도시였던 칼키스와 에레트리아 사이에 벌어졌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증언하고 있듯이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도 어느 정도는 이 전쟁에 개입했다. 최근의 학문적 연구에도 델포이의 신탁이 이 전쟁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었는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델포이는 현대인들에게는 너무나 불가사의하게 여겨지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신탁을 내려, 개척할 수 있는 식민지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정 지역의 식민지 건설을 맨처음 부추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참주들의 출현
종래의 귀족주의적 질서가 처음 무너지기 시작한 도시국가는 코린트였다.
코린트의 주요 가문인 바키아드 일족은 그리스의 남북 통로와 동서 통로를 둘 다 통제할 수 있는 코린트의 지리적 위치를 충분히 이용했고 동서 항로의 입항세(入港稅)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리스 세계가 팽창함에 따라 코린트의 다른 가문들은 바키아드 일족을 시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역사적 사실로 입증할 수 있는 최초의 그리스 참주정치가 등장했다. 최초의 참주 킵셀로스는 바키아드 가문의 피를 일부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킵셀로스의 성공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설명해 온 일부 학자들은 BC 7세기에 일어난 전투 방법의 변화를 그 근거로 내세웠다.
이전에는 전쟁에서 개개인의 용맹성이 강조되었으며, 위대한 전사들은 전차를 택시처럼 이용해 이곳저곳 전쟁터를 돌아다녔고, 전쟁터에 도착하면 전차에서 내려 동료 귀족 전사들과 함께 싸웠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승자는 패자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얻었으며 시체를 절단하는 의식 행위도 승자가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
BC 7세기에 이르러 중장(重裝) 보병(호플리테스)이라는 새로운 전투 대형이 등장했는데, 여러 사람이 한 덩어리를 이루어 싸우는 이 대형은 서민 계급에 더 많은 역할을 부여했다(→ 호플리테스). 보병들은 호플론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밀집 대형을 이루어 싸웠으며, 개개인의 칼을 든 손은 오른쪽에 있는 사람의 방패가 보호해주었다.
중장 보병의 무기와 전술, 집단 정신 강조가 참주정치 등장의 배경이라는 이 중장보병이론은 설득력이 있다. 이는 귀족 정치에 대한 반발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BC 7세기에는 코린트와 맞닿은 도시국가에서도 참주가 2명 등장했다. 메가라의 테아게네스는 부자들을 학살했으며 BC 630년경 사위 킬론이 아테네에서 권력을 잡도록 도왔다. 시키온에 등장한 오르타고라스 가문의 참주정(僭主政)은 일부 그리스인의 마음에 맺혀 있던 도리스족에 대한 적대감을 교묘히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이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참주는 BC 6세기초의 클레이스테네스로 그는 도리스족만이 아니라 아르고스 사람도 싫어했다.
참주정치를 면한 지역들을 검토해 보면 참주정치가 시행된 지역은 생각보다 훨씬 드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에는 도시국가가 수백 개 있었지만 그 대다수는 아주 작아서 한 번도 참주정치를 경험하지 않았다. 인구가 적은 곳에서는 정치적 야심가들이 대부분 공직에 앉을 기회가 충분했기 때문에 참주정이 필요없었을지도 모른다.
참주정치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견해는 잘못된 생각이지만 이는 예로부터 뿌리박힌 오해로,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도 참주정치가 수많은 곳에 확립되었다고 말했다.
참주정치를 한번도 경험하지 않은 도시국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은 스파르타였다. 스파르타는 식민지를 거의 건설하지 않았고, 도시를 요새화하지도 않았으며, 물리적으로 완전한 통합을 이룬 적도 없었다. 훨씬 큰 이웃 도시 메세니아를 정복해 수백 년 동안이나 복속시켰다는 점에서도 예외적인 도시였다.
스파르타의 귀족 전사들은 메세니아를 정복한 뒤, 메세니아인(人) 헬로트를 비롯한 국가소유의 노예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 노예들의 노동력 덕분에 스파르타인은 군사훈련을 기본으로 한 독특한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노예들은 스파르타가 외교 정책을 수정하는 데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스파르타는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군사 활동을 감행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원정을 떠나려면 불만을 품고 있는 수많은 노예들(스파르타인보다 7배가 많았음)을 남겨놓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메세니아 반란(BC 600경)을 진압한 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다.
BC 6세기에 스파르타는 그 세력을 더욱 넓혔지만 아직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이웃 국가들 가운데 일부는 스파르타의 도리스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웃 도시국가들의 신화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원래 아트레우스나 아가멤논 및 그의 아들 오레스테스 같은 아카이아오스족 왕들의 지배를 받았다고 되어 있었다.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적 행위는 오레스테스 왕의 뼈를 스파르타로 가져간 것이었다.
스파르타는 이것을 아트레우스 왕의 후계자임을 주장하는 구실로 삼았고 그 결과, 오늘날 펠로폰네소스 동맹이라 불리는 군사 연맹이 이루어졌다. 이 동맹 규약에 따라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은 스파르타가 공격을 받으면 방어해 주어야 할 의무를 졌고, 스파르타도 그 대가로 동맹국들에게 비슷한 보장을 약속했다.
한편 BC 6세기에 스파르타는 코린트의 킵셀로스를 비롯한 그리스 참주들을 권좌에서 몰아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더욱 높은 명성과 인기를 얻었다.
BC 431년에는 그리스를 신(新) 참주정치, 즉 아테네 제국(帝國)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자칭 해방자로서 대규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는 참주정치에 대한 혐오감이라는 순수한 이념적 동기에서 유발된 것이었다.
아테네의 번영
아테네 및 그 주변 지역인 아티카의 광대한 면적과 유리한 지형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과는 남다른 것이었다.
코린트나 메가라보다 훨씬 큰 아테네는 자체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요새(아크로폴리스)도 갖고 있었다. 이런 자연적 이점들 덕분에 아테네는 일찍부터 중앙 집권 정체(政體)를 세울 수 있었다. 아티카는 천연의 방어선을 이루는 네 개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아티카의 긴 해안선은 에게 해로 튀어나와 있었다. 이런 요인들 덕분에 아테네는 해양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배를 만들려면 부족한 목재를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으며, 이것은 아테네가 제국주의적 사고 방식을 갖게 된 주요 요인이 되었다.
또한 인구가 크게 늘어나자 아테네는 경작지를 얻기 위해 제국주의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BC 7세기말에 아테네는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이미 BC 8세기에 참주정치를 낳았던 그런 정치적 긴장이 이 무렵 아테네에도 퍼져 있었다. BC 630년대의 올림픽 제전 우승자인 킬론이 참주가 되려고 했지만 아테네는 이 위기를 간신히 넘겼고 킬론은 처형당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뒤 아테네의 입법자(立法者)인 드라콘이 아테네 최초로 포괄적인 법전을 만들었다(BC 621경). 이 법전이 지나치게 잔인했기 때문에 드라콘이라는 이름은 야만적인 법률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드라콘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법 내용이 파피루스에 씌어 1890년 발견된 〈아테네 헌법〉에 살아남아 있는데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것으로 보인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치세(治世)는 지대한 군사적·외교적 성공을 거둔 시대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긴장은 결국 고전시대 그리스 역사의 대부분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 두 도시국가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이 시대에 나타났다.
BC 7세기말 아티카의 경제와 사회가 불안했다는 증거는 솔론의 시(詩)에 나타난다.
솔론은 인간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한 최초의 유럽 정치가로, 그가 지향한 사회는 여전히 상류층의 단결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계급 사회였지만 좀더 공정한 사회였다. 솔론은 BC 594년에 아테네의 모든 빚을 말소하고 채무자를 노예로 삼는 제도를 폐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또한 장로들의 협의회인 아레오파고스와 더불어 새로운 400인회(불레)를 구성했는데, 이는 BC 6세기말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500인회로 바뀌었다.
하층 계급도 민회(에클레시아)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다. 솔론의 개혁이 추구한 전반적인 목표는 도시 국가의 활동 범위를 규정하고 확대하는 것이었다.
솔론은 빚을 탕감하고 땅을 재분배했지만 그때까지 헥테모로이(hektemoroi:'제6의 분할자들'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이들의 땅은 '호로이'라는 경계선으로 표시되어 있었음)가 경작했던 땅은 부자들이 계속 소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은 솔론 이후에도 후원자가 계속 필요했기 때문에 솔론 이후에는 진짜 참주인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의지했다.
아테네는 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에 스파르타의 적인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었고 게다가 BC 519년에는 보이오티아 지방의 플라타이아이와도 동맹을 맺었다. 아테네는 또한 조직적인 해군력을 가진 해양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문헌에서는 3단 노(櫓)를 갖춘 갤리가 아테네에 처음 등장했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 있는데, 고대 코린트 말기의 발명품인 이 배는 170명이 노를 저어 움직이고 30명의 전투 병력을 실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1987년 그리스에서 노가 3단으로 되어 있는 갤리를 복원해 물에 띄웠는데, 이 배의 크기와 정교함 및 시각적 효과를 보면 고대 아테네인들이 심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바다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BC 510년 스파르타에 의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가 아테네에서 쫓겨났다. BC 508년에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를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헤로도토스가 "부족과 민주주의를 도입한 사람"이라고 말한 클레이스테네스는 시민 전체를 10개의 부족으로 개편하는 것을 개혁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 부족은 아티카 전역에서 선발한 사람들을 포함하며, 혈통이 아니라 오로지 거주 지역만을 근거로 하여 만든 최초의 조직이었다. 이런 변화는 새로운 정치기구이자 행정기구인 500인회를 낳았으며 이 기구의 기능은 민회에서 결정할 사항들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500인회에는 아테네 역사상 처음으로 아티카 전역에서 선발된 사람들이 참여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무엇보다도 사회의 기초단위인 데모스(마을)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사회를 개혁한 혁신자였다(→ 데모스). 데모스는 사회단위이자 농업·사법 단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BC 510~450년대에는 데모스에 재판관을 두는 조치가 유보되었다. 외딴 데모스인 람노스에서 BC 5세기에 작성된 신전의 재정 계산서에 나타나듯 데모스는 경제 단위이기도 했고, 500인회에 대표를 파견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정치단위이기도 했다.
부족은 하나의 군사단위로서 같이 훈련을 받았고 BC 500년경 렘노스를 정복할 때도 하나의 집단으로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데모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보다도 종교 단위였다. 데모스에서는 화려한 축제가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데모스의 종교력(宗敎曆)을 보면 이 축제들은 아르테미스 숭배를 비롯해 도시국가의 종교적 축제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되어 문화 단위의 역할도 해 데모스가 주최하는 디오니소스 축제 때는 데모스의 부자들이 후원하는 연극제가 벌어졌다.
이 시대는 또한 후원의 시대였고 중요한 집안끼리 혼인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런 혼인 풍습과 관련된 고대의 전형적인 행사는 BC 6세기에 클레이스테네스가 딸 아가리스테의 구혼자들을 위해 베푼 연회로, 이는 몇 가지 점에서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에서 묘사한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연상시킨다.
시인과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도 그리스 세계를 한 문화권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한 새로운 현상이었다.
후원자를 찾아 옮겨 다니던 예술가들로 인해 각 참주들의 궁정 사이에 사람과 사상의 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시인들인 테오스의 아나크레온과 케오스의 시모니데스는 여러 참주의 궁정을 순회하던 당시 위대한 문화인의 생활 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이 둘은 참주들과 함께 살았고 그 참주들이 쫓겨나자 둘 다 다른 참주의 궁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고대의 모든 시인들이 참주들의 후원에 의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 출신인 알카이오스가 쓴(BC 600경) 시의 단편에는 그 고장의 참주를 비난하는 구절이 들어 있으며, 같은 시대에 같은 섬에서 살았던 여류 시인 사포의 시는 정치적 내용을 전혀 다루지 않고 사랑과 자연이라는 주제를 노래하는 개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동방의 그리스 식민지가 본토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아 이오니아의 지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본토보다 우월했음을 알 수 있다.
이오니아는 특히 사변(思辨) 분야에서 탁월했다. 아나톨리아 지방의 밀레토스는 만만찮은 사상가들을 낳았다.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및 아낙시메네스의 우주론은 그들이 도달한 결론보다는 오히려 방법론(추상 관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 등) 때문에 더 주목할 만하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크세노파네스는 자신의 시(詩)에서 종교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에티오피아의 신들이 피부가 검고 트라키아의 신들이 파란 눈을 갖고 있듯이 말[馬]들도 신을 갖고 있다면 그 신은 말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문화의 차이에 대한 이러한 인식으로 크세노파네스는 주변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 같은 이웃 나라의 문화는 특히 역사 분야에서 그리스에 가장 큰 문학적 자극을 주었다.
헤로도토스는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의 저서(BC 500경)가 없었다면 역사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지리학과 신화를 함께 다룬 그의 저서는 오늘날 단편으로만 남아 있으나 그의 연구는 당시 어느 정도의 실용성을 갖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식민지를 오가며 장거리 무역을 하던 밀레토스 같은 도시에서는 분명히 쓸모가 있었던 것이다.
BC 500년 이후 이오니아가 페르시아와 정치적으로 대결하게 되자 헤카타이오스는 이오니아 지방 도시들에게 공동방어로 대결에서 주도권을 잡으라고 제안했다. 크고 위협적이며 성격이 다른 문화가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결국 고대 그리스가 나중에 공통된 문화를 형성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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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그리스 고대 암흑시대와 도시국가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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