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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국가

다른 표기 언어 city-state , 都市國家

요약 인접한 영토에 대해 통치권을 가지고 정치·경제·문화 생활의 중심지 및 선도자 역할을 하는 독립된 도시의 정치체계.

도시국가(city-state)

모로코 도시

ⓒ Bengt Nyman/wikipedia | CC BY 2.0

이 용어는 19세기말 영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고대 그리스·페니키아·이탈리아 도시들과 중세 이탈리아 도시들에 적용되었다(로마).

원래는 그리스 문명의 고전시대에 모습을 갖춘 정치형태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

도시국가의 고대 이름인 폴리스(polis)는 행정중심지를 나타내는 성채(acropolis)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 폴리스의 영토는 보통 너무 좁아 시민들(politai)이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고대 도시국가는 규모·배타성·애국심·독립에 대한 열정 등에 있어 부족체제나 민족체제와는 달랐다. 도시국가의 기원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아마도 경제 쇠퇴기에 부족체제가 붕괴된 뒤, 흩어진 집단들이 BC 1000~800년 그리스 반도(半島)와 에게 해의 섬, 소아시아 서부에 정착해 도시국가의 독립된 핵심(核心)을 이루었던 데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이주민들을 해외로 보냈고, 그결과 대략 BC 750~550년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비슷한 도시국가들이 세워졌다.

이 시기에 생긴 수천 개의 도시국가는 매우 다양했다. 군주제에서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각종 다양한 정치제도가 실시되었으며, 철학자들은 정치생활의 기본원칙들을 만들었다. 정력적이며 강력한 시민들의 실험정신으로 공업과 기술을 제외한 인간활동의 모든 분야가 전례없이 발전했으며 그리스·로마 문명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각자 자유와 독립을 지키려는 분립주의(分立主義)는 그들의 자랑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그들은 영구적인 연합이나 동맹을 만들지 못해 마케도니아·카르타고·로마 제국에게 정복되었으며 그 지배 아래에서 종속적인 특권 공동체(무니키피움)로 살아남았다. 로마는 도시국가로서 공화국의 역사를 시작했지만 고대 세계의 정치형태인 도시국가를 없애는 것을 대외정책으로 삼았다.

11세기 들어 몇몇 이탈리아 도시들이 상당한 부(富)를 이룩하면서 도시국가의 부활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들 도시는 대부분 비잔틴 제국 영토 안에 있거나 혹은 콘스탄티노플과 접촉하고 있어서 동방무역의 부활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앞선 도시국가는 베네치아아말피였으며 아말피는 11세기 중엽 상업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밖에 바리·오트란토·살레르노 등의 도시들도 발전했다. 한동안 베네치아의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아말피는 1073년 노르만족에게 항복한 뒤 쇠퇴했다.

1082년에 특권을 얻은 베네치아는 그뒤 비잔틴 제국 안에서 관세를 모두 면제받았다. 11세기에 토스카나의 천연 항구인 피사 시(市)는 아랍족을 계속해서 무찔렀고 그러는 가운데 성장하기 시작했다. 제노바도 피사를 뒤따라 성장했으며 그뒤 몇 세기 동안 피사와 경쟁했다. 그때까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내륙도시 가운데 밀라노는 롬바르디아 왕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번영한 파비아의 자리를 빼앗았으며, 롬바르디아에서 로마에 이르는 비아프란치제나에 있고 오랫동안 토스카나 후작의 영지였던 루카는 토스카나의 내륙도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헝가리와 아랍이 침입한 시기에 중심부를 요새화할 필요성이 커지자 도시는 더욱 발전했다.

다시 지어지거나 수리된 도시의 성은 시민과 농촌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지켜주었다. 농촌 사람들은 농촌지역 여러 곳에 지어지기 시작한 요새화한 '카스텔로'(castello:성곽으로 둘러싸인 소읍)에서 은신처를 구했다.

노르만족이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하자 이 지역의 도시 자치제는 발전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북부에는 '코뮌'(commune:자치시) 운동이 일어나 기존 당국과 충돌을 거치든 아니면 평화적으로 정권이 넘어가든 결국 완전한 자치정부가 세워졌다. 원래 자치시는 대개 지도계층에 있는 도시주민들의 연합이었으나 곧 새로운 도시국가가 되었다. 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 가장 큰 반대세력은 주교(主敎)들이었다. 후작의 세력이 막강했던 토스카나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1081년 피사와 루카에 상당한 특권을 허락하면서 그의 정적(政敵) 마틸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부추겼다.

마틸다의 죽음으로 피렌체는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도시국가의 최고기관은 모든 주민들이 참여하는 민회(parlamento, concio, arengo)와 콘솔리(집정관)들로 구성되는 행정부였다. 일찍부터 주체하기 힘든 민회를 대신해 시참사회(市參事會)가 일상적인 정치·입법 업무를 맡기 시작했으며, 헌법이 점점 복잡해지자 여러 위원회가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은 도시마다 상당히 달랐다. 12세기에는 자치시의 확립을 주도했던 계급이 대체로 집정관 자리를 독점했다. 이 계급은 주로 소규모의 봉건지주 혹은 비(非)봉건지주들과 돈 많은 상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피사와 제노바에서는 상업세력이 지배권을 잡은 반면 피에몬테 일부에서는 지방 귀족들의 연합세력이 도시를 이끌었다. 따라서 초기 도시국가에서는 대부분 귀족정치가 이루어졌다. 농촌지역의 봉건적 성(城)을 닮은 지배 가문들의 성탑이 이러한 상황을 말해준다.

이탈리아에는 프랑스 북부와 독일에서 볼 수 있는 도시와 농촌 지역의 구분이 사실상 없었다. 봉건사회가 도시로 침투하는 한편 귀족이 아닌 시민이 도시 외곽의 토지를 소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치시가 발전함에 따라 도시와 농촌의 이런 연결은 더욱 강하고 복잡해졌다.

농촌지역(contado)을 정복하는 것은 처음부터 도시국가 정책의 주된 목표 중 하나였다.

요새화한 카스텔로(castello)와 그보다 더 작은 농촌마을이 도시국가에 흡수되었다. 봉건토지는 롬바르디아의 상속법에 일부 영향을 받아 분리·세분되었으며, 이 때문에 봉건가문은 약화돼 쉽사리 정복되었다. 한편 주교들도 자치시의 세력이 그들의 영토로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시골귀족들은 자발적으로, 때로는 강제적으로 시민이 되었다. 에스테·말라스피나·구이디·알도브란데스키 같은 강력한 가문 몇몇만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들도 빈번히 영토를 잃거나 양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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