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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시스트라토스

다른 표기 언어 Peisistratos
요약 테이블
출생 BC 6세기초
사망 527
국적 아테네, 그리스

요약 아티카 지방을 통일하고 아테네의 급속한 번영의 기반을 닦아 이후 아테네가 그리스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BC 565년경 메가라 시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 메가라의 항구를 점령하여 군사적 명성을 얻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메가클레스의 딸과 계약결혼을 맺어 아테네에서 일시적으로 권력을 획득했다.
그러나 리쿠르고스와 메가클레스가 합세하여 자신을 몰아내자 556년 경 그리스 북부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그는 판가이움 산의 금광과 은광을 채굴하면서 부를 축적한 후, 546년 자금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아티카를 침공했다. 완벽한 승리를 거둔 후 아테네의 지배자가 되어 BC 527년에 죽을 때까지 계속 집권했다. 그의 통치기간 중 아테네는 종교적·애국적인 일체성이 커다란 진전을 이룩했다.

개요

아티카 지방을 통일하고 아테네의 급속한 번영의 기반을 닦아 이후 아테네가 그리스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권력의 장악

BC 594년 페이시스트라토스 어머니의 친척인 개혁가 솔론이 아테네 하층계급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켜주었다.

그러나 솔론의 정치개혁은 최고행정관 직책인 아르곤(집정관) 지위를 놓고 귀족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성인이 되었을 때 경쟁하는 두 파벌로 리쿠르고스가 이끄는 평원파와 메가클레스가 이끄는 해안파가 있었다.

BC 565년경 메가라 시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메가라의 항구를 점령하여 군사적 명성을 얻었다.

이후 자신의 파벌을 조직하고 산악파라고 불렀다. 산악파는 그의 출신구역인 아티카 동부 출신의 귀족가문들과 아테네 시의 늘어나는 인구의 상당부분을 포함했다. 어느 땐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과 자기 마차의 노새에 매질을 하여 적들이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것처럼 보이기 위해 극적인 제스처를 써가면서 아고라 광장에 들어간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투표를 통해 그가 곤봉으로 무장한 시민들로 구성된 호위대를 거느리도록 조치했다.

호위대의 도움으로 그는 아크로폴리스를 장악하고 BC 560(559)년에 잠시 동안 권력을 잡기도 했다. 자신의 지지세력을 늘리기 위해 그는 메카클레스의 딸과 짧은 기간 동안 계약결혼을 맺어 다시 아테네에서 일시적 권력을 획득했다(BC 556~555경). 그러나 리쿠르고스와 메가클레스가 합세하여 그를 몰아냈다.

몇 년 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리스 북부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그는 자신이 돌아갈 터전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판가이움 산의 금광과 은광을 채굴하고 테베·아르고스·낙소스 등지에 사는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546년에는 자신의 자금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마련한 병력을 이끌고 에우보이아 섬에 있는 에레트리아로 가서 그곳을 기지로 삼아 아티카를 침공했다. 히메토스 산 부근의 팔레네에서 그는 한낮의 열기에 지쳐 아테네군이 노름을 하거나 잠을 자는 동안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완벽한 승리를 거둔 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3번째로 아테네의 지배자가 되어 BC 527년에 죽을 때까지 계속 집권했다. 아들인 히피아스와 히파르코스가 그를 이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당시의 관련된 파벌들이 마치 상이한 경제적 이해관계나 순전히 지리적인 구역을 나타내는 듯이 해석하는 경우가 가끔씩 있는데 이는 잘못된 착상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페이시스트라토스에 관한 전설을 파고든다 하더라도 그의 성품에 관해 판별할 수 있는 가망이 전혀 없다.

BC 546년까지 그의 활동은 끈덕지고 치밀한 특성과 외교적 수완이 두드러진다. 일단 지배자가 되고 나자 그는 도시주민을 특히 기쁘게 해주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농촌의 대다수에게도 호소력을 잃지 않았다.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무력으로 아테네의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 명칭으로는 '티라노스'(참주)라고 일컬었다.

그는 용병 호위대를 거느렸으며 그 가운데는 스키티아의 궁수들도 있었다. 시민들을 무장해제하고 주요 가문에서 인질을 뽑아 낙소스 섬에 가두어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헌법적인 정부형태를 유지하고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일부 귀족들은 그에게 협력하여 1년 임기의 아르콘직을 보유하도록 허락받았지만 다른 귀족들은 고발당하여 재판 당일날 법정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고발자가 겁에 질려 감히 재판을 계속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그의 국내정책에는 아테네 국가의 통일성과 위엄을 높이기 위한 구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조는 종교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취한 조치도 대부분 종교개혁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엘레우시스에 있는 데메테르 신전을 국가 통제 아래 두고, 해마다 입문(入門)의 의식을 치르기 위해 최초의 대규모 신비의 전당(텔레스테리온)을 건설했다. 아티카의 여러 지방 종교는 도시로 옮겨지거나 도시에 신전의 분소(分所)를 설치했다. 예컨대 아르테미스 신에 대한 제사는 여전히 브라우론에서 행했지만 한편 아크로폴리스에도 아르테미스 신전이 세워졌다.

특히 아테네 여신은 모든 아테네 시민들이 숭배하는 주신(主神)이 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크로폴리스에 관문(프로필라이아)을 건설했고 현재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 있는 신전 아래쪽에 옛 파르테논 신전을 지었던 것 같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세운 건축물에 조각된 석회석 파편들이 아크로폴리스에서 무수하게 발견되었으며 거대한 미완성의 신전의 토대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그리스 종교).

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에는 또한 제전과 문학이 번창했다.

그는 아테네 여신에게 바치는 연례 제전인 판아테나이아의 영예를 높이기 위해 4년마다 아테나이아 대제전을 열어 체육경기를 벌이고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낭송하는 음유시인들에게 상을 내렸다. BC 534년 디오니소스 신앙이 국가의 후원을 받게 된 이후에는 해마다 열리는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디오니소스 찬가를 부르거나 비극공연을 하는 데 대해서도 상이 주어졌다. 아나크레온과 같은 시인들은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 아들들의 궁정에서 함께 살았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또한 신탁을 장려하고 유명한 예언자 오노마크리토스를 후원했다.

아테네의 성장에 끼친 공헌

이당시 아테네는 부락들이 모여 있는 단계를 지나서 하나의 도시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고라 광장의 모퉁이에 있는 엔네아크루노스 샘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로를 건설하여 아테네의 물공급을 원활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시장 자체도 미화하고 짜임새 있게 꾸몄다. 아고라 발굴작업에서 BC 6세기에 만든 시장의 경계선 표시가 발견되었다. 도시를 바로 벗어난 지점의 일리소스 강 언덕에 그는 올림포스의 제우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올림포스 제우스 대신전). 그러나 이 신전은 로마 황제 아드리아누스의 재위 때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일찍이 솔론은 올리브와 포도 등 환금작물의 재배를 장려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소농들에게 농기구와 설비를 마련할 자금을 대여해주었다. 몇몇 경우에는 추방된 귀족들의 토지를 분배하기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티카의 농촌에 대한 귀족들의 지배력을 축소시키는 주요수단은 정부의 규제였던 것 같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순회판사제도를 두어 농촌지역의 소송사건을 즉석에서 재판할 수 있도록 했으며 자신도 시찰여행을 다녔다. 이와 같이 광범위한 문화적·정치적 활동에 드는 재정은 판가이움 광산에서 나오는 페이시스트라토스 자신의 수입과 국내 재원으로 충당했다.

라우리움의 은광은 국가재산이었으며 아테네 여러 항구에서 번창하는 무역활동에서도 세금이 나왔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농업생산에 대해 10% 정도 되는 세금을 부과했다.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언젠가 시찰을 나갔다가 한 농부가 돌밭을 파헤치는 것을 보고 그는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농부는 이렇게 응답했다. "쑤시고 결리는 게 전부요. 이렇게 쑤시고 결리는 것 중에서 10%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가져갈 몫이지요." 참주는 그 솔직한 농부에게 모든 세금을 면제해주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산업과 통상은 6세기 후반기에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통치가 이러한 발전에 주로 공헌한 점은 아마도 내정의 안정을 보장해주고 외국인 이주민들을 보호해준 데 있었다고 생각된다. 대외적으로 참주는 평화정책을 추구했다. 그것은 큰 전쟁이 일어나 아테네 시민이 무장하게 되는 것을 그가 꺼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이당시 그리스 사회는 일시적인 균형상태를 누린 것이 사실이었다. 에게 해 지방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낙소스의 릭다미스 같은 동맹자들이 지방 참주가 되도록 지원했다. 그는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 부근에 있는 오래된 무덤들을 없애버림으로써 신성한 섬을 정결하게 했다. 그러나 남부 러시아에서 곡물을 수입해오는 통로인 헬레스폰트 해협을 장악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이를 위해 그는 시게움을 점령하고 차남인 헤게시스트라토스를 통치자로 앉혔다. 더 중요한 일은 그가 아테네인 장군 밀티아데스로 하여금 민간 차원의 원정을 벌여 케르소네소스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도록 독려한 것이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을 당시 아테네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스파르타보다 그리스 전체에서 훨씬 비중이 떨어지는 위치에 있었다.

상업적으로는 밀레토스·코린트·아이기나 등의 도시국가들이 최소한 아테네에 못지않게 활발했고 동시대의 참주인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도 페이시스트라토스에 못지않게 중요한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의 종교적·애국적인 일체성은 평온하고 안정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통치기간중에 커다란 진전을 이룩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당시의 이야기처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치는 크로노스의 시대, 곧 황금시대를 구가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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