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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학의 대표자
조반니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출생 | 1313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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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75년 12월 21일 |
국적 | 이탈리아 |
대표작 | 《데카메론》, 《일 필로스트라토》, 《일 필로콜로》, 《테세이다》 등 |
단테, 페트라르카와 함께 이탈리아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중세의 신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문학 양식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에 근거한 인간의 희노애락을 다뤘다.
보카치오는 단테, 페트라르카와 함께 이탈리아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인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한다. 이들 세 사람은 중세와 근대 사이를 잇는 시점, 즉 르네상스 시대로 전환되던 시기에 활동하면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페트라르카가 이탈리아어 서정시집 《칸초니에레》로 불멸의 시인이 되었다면, 보카치오는 설화 문학의 대가로 라틴어 방언과 이탈리아어를 구사한 작품을 남기면서 유럽 근대 문학의 발현을 이끌었다. 그가 쓴 《데카메론》은 오랫동안 산문의 본보기로 일컬어졌으며, 이 작품의 사실주의는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 문학을 새로이 정의하게 만들면서 근대소설의 선구로 칭해진다.
조반니 보카치오는 1313년경 상인이자 은행가인 보카치노 디 켈리노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에 대해서는 아버지 켈리노의 당시 행적에 따라 피렌체, 혹은 집안의 영지였던 피렌체 근교 체르탈도, 프랑스 파리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버지가 파리에 있을 때 만난 한 지방 영주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서자였음에도 부유한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자랐으며, 그가 7세 때 계모로 들어온 마르게리타 데 마르돌리에게도 사랑받고 컸다. 그는 마르게리타를 일컬어 자신의 삶에서 '믿을 만한 존재'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가정교사로부터 고전을 배웠으며, 14세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고자 아버지의 기반 중 하나였던 나폴리의 바르디 가(13, 14세기 피렌체의 대표적인 금융 가문) 은행에서 금융과 교역 일을 배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 단테에 심취해 있던 가정교사의 영향으로 그는 단테 같은 위대한 문인이 되고자 했으며, 평생토록 단테의 영향 아래 글을 썼다. 그는 만년에 단테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하고, 피렌체의 교회에서 《신곡》을 강의하기도 할 정도였다.
때문에 보카치오는 금융이나 회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나폴리에서 조토, 마르티니 등 화가와 작가, 학자들과 어울리며 사교 생활에만 몰두했다. 후일 보카치오는 이 시기에 금융 일을 배운 데 대해 "그 6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아버지 역시 그런 아들에게 실망하여 "저놈은 일은커녕 책만 사들인다."라고 불평했다고 한다.
아들이 상업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버지는 이번에는 법률을 공부시키고자 나폴리 대학에 보냈다. 이곳에서도 그는 법률 공부만 제외하고 다른 모든 일에 열중했는데, 특히 라틴어 고전과 프로방스 문학 연구에 심취했다. 또한 나폴리 왕 로베르토의 왕궁에 드나들면서 14세기 이탈리아 궁정 문화 및 궁정 문학 양식을 습득했다. 이때 페트라르카의 시를 접하고 이후 일생 그를 자신의 문학적 스승으로 삼는다.
20세 무렵 그는 로베르토 왕의 서녀였던 유부녀 마리아를 만났다. '피암메타(Fiammetta, 작은 불꽃)'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그녀는 이후 보카치오의 일생과 작품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보카치오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몇 차례의 연애를 통해 다섯 자녀를 얻었고, 이들을 모두 자신이 거둬들여 길렀다.
1340년, 바르디 은행이 파산하면서 보카치오는 피렌체로 돌아왔다. 나폴리 시절부터 시와 산문을 집필했던 보카치오는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진 뒤에야 아버지의 후원 없이 궁정 생활을 누리고 문인으로서의 경력을 쌓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여러 후원자를 찾아다니며 몇몇 가문에서 일하면서 글을 쓰고 사교 생활을 했다. 초기에는 《디아나의 사냥》, 《일 필로스트라토》, 《일 필로콜로》, 《테세이다》, 《피암메타 부인의 비가(悲歌)》 등 그리스 신화의 모티프를 바탕으로 하여 기사도나 연애를 다룬 서사시와 (단편소설이라 불릴 만한) 산문 작품을 주로 썼다. 하지만 보카치오는 고전학자로서는 뛰어났으나 언어를 아름답게 사용한다는 측면에서는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다. 이때의 작품들은 그저 그런 통속연애 작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 양식은 대중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다소 투박하고 어설퍼도 이때 이미 현대적인 사실주의 기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예컨대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14세기 이탈리아 여성의 실물 모습 그대로였다(이런 부분을 인정하면서 후대의 많은 문학사가들은 이에 대해 '사실주의적 불협화음'이라고 칭했다).
이 시기는 피렌체 역사상 가장 질곡이 많은 시기였다. 1346년에는 대기근, 1348년에는 페스트가 창궐한 것이다. 10만이었던 피렌체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할 만큼 페스트는 중세 유럽에서 악명 높은 질병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보카치오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수많은 친구들을 잃었으며, 그 자신도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기사와 숙녀의 연애담이 아닌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창작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한다.
단테의 《신곡(神曲)》에 비견되며 '인곡(人曲)'으로도 일컬어지는 《데카메론》각주1) 은 페스트 창궐 이듬해부터 집필을 시작해 1353년에 완성했다. 《데카메론》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탄에 빠진 사람들을 동정할 줄 알아야 한다'라며 페스트가 퍼진 피렌체 풍경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이 작품은 1348년 피렌체에 페스트가 만연하자 이를 피하고자 피에솔레 언덕으로 피난 간 사람 10명이 열흘간 매일 돌아가며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총 100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이야기 대부분이 보카치오의 순수 창작이 아니라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많은 나라에서 떠돌던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보카치오식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사랑과 욕망, 행복, 운명과 같은 인간의 삶을 일상적인 풍경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매우 세속적이면서 조잡하고 음탕하리만큼 솔직하다. 문체 역시 이에 맞추어 격조 높은 산문체가 아니라 사실적이고 평범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
19세기 이탈리아 문예 평론가 프란체스코 데 상크티스는 《데카메론》을 일컬어 '문학적 대이변'이라고 일컬었다. 복잡한 운문 형식으로 신의 거대한 세계를 쌓아올린 단테와 달리, 보카치오는 사실적 언어로 현실 세계에 근거한 인간의 희노애락을 다루며 중세의 신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문학 양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데카메론》은 문학의 주제를 인간과 사회로 전환시킨 일대 전환점이었으며, 이에 맞추어 일상 언어로 현실 세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산문소설의 형식까지 바꾸었다. 즉 근대소설이 탄생될 장을 마련한 것이다. 또한 많은 문학 작품들이 라틴어로 쓰이고 이탈리아어는 속어로 폄하되던 시기에, 그는 이 작품을 이탈리아어로 쓰면서 이탈리아 문학의 지평을 열었다.
《데카메론》은 인문주의의 이상이 만연하던 당시에 저속성으로 말미암아 냉담한 평가를 받았지만, 일반 서민에게는 큰 인기를 끌었다. 인쇄술이 등장하기 전, 종이도 귀했던 시대에 거리의 사람들이 둘 이상만 모여도 이 이야기를 했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어땠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보카치오는 《데카메론》 이후 소설이나 시는 거의 쓰지 않고 학술적 연구 저작들을 쓰는 데 몰두했다. 여기에는 라틴 고전 문학에 정통한 학자이자 시인이었던 페트라르카와의 만남이 큰 영향을 미쳤다. 《단테의 생애》, 《이교 신들의 계보》, 《유명인들의 운명에 관하며》, 《산, 숲, 새, 호수, 강, 늪, 습지, 바다의 이름에 대하여》 등 그가 남긴 연구 저작들 역시 이탈리아 인문주의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한편 1350년경부터 피렌체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약 10년간 피렌체의 외교 사절로서 로마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제후들을 방문했으며, 피렌체 시의원으로 일하고, 롬바르디아 대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1360년 피렌체 혁명이 일어나면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고 친구들이 처형되자 보카치오는 체르탈도, 라벤나 등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1363년에야 체르탈도로 돌아와 다시 피렌체 외교 대사로 활동했다. 1370년부터는 건강이 악화되어 정치 생활 및 사교 생활을 그만두고, 체르탈도에서 은거하다가 1375년 12월 21일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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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시, 희곡, 수필 등 문학의 여러 장르를 막론하고 세계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 100인의 작가를 소개한다. 중세의 암흑을 깬 영혼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 사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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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조반니 보카치오 – 문학사를 움직인 100인, 이한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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