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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에 들어와 이탈리아 문학은 황금시대를 맞게 되었다.
방언으로 쓰기를 기피했던 산문문학이 하나씩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종교적 색채가 짙은 익명의 작가에 의해 〈성 프란키스쿠스의 작은 꽃들〉이 나왔으며, 파사반티, 카타리나 다 시에나, 콤파니, 빌라니 등의 주옥 같은 산문들에 이어 문학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케티의 〈300편의 이야기 Trecentonovelle〉가 발표되었다. 콤파니와 빌라니는 '연대기'를 각각 집필하여 당대의 갖가지 사회상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들의 연대기는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이면에서 사라지기 쉬운 사건들에 대해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일종의 에세이 같은 것이었다. 사케티의 〈300편의 이야기〉는 전승되어오던 민담들과 이야기들을 재구성 작업을 통해 집대성하면서 때로는 작가 자신이 직접 창작한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이 작품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Decameron〉과 더불어 이 시대가 낳은 최대의 산문문학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단테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최고의 시성이다.
그에 의해 이탈리아 문학은 물론 라틴 문학에서 독립된 유럽의 방언 문학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었던 우고 포스콜로는 단테를 가리켜 전인류의 시성이라고 했다. 단테는 생애 동안(1265~1321) 수없이 많은 글을 썼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유명한 〈신곡 La divina commedia〉(1310경~21)이다. 사후의 세계를 편력하는 일종의 환상여행기 같은 성격을 띠고 있는 이 작품의 저작 연대는 신비의 베일 속에 감춰져 있지만, 대략 1300년 이후로 추정된다.
인간의 선과 악, 그에 따른 은총과 벌의 갖가지 양상들이 작품 구석구석에 배어 있으며 환상과 역사, 신화와 종교, 온갖 학문과 예술 등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신곡〉은 죄와 벌의 세계를 다룬 〈지옥편 Inferno〉, 전생의 죄를 말끔히 씻어내는 정화의 〈연옥편 Purgatorio〉, 환희와 은총, 그리고 하느님의 축복만이 존재하는 천상의 세계 〈천국편 Paradiso〉 등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테가 정치적인 이유로 고국을 등지고 정처없는 유랑생활을 하면서 집필했던 〈신곡〉은 모두 100곡으로 구성되어 있고 11음절 3연체의 정형시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기조에 깔고 시를 썼으며 시에 시인 자신이 산문으로 해설을 붙여 〈신생 La vita nuova〉(1293)을 내놓았다. 이 작품은 사실상 〈신곡〉의 전편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이탈리아어로 쓴 또하나의 중요한 작품은 〈향연 Il convivio〉(1304경~07)이라는 철학적 수필집으로, 이 작품은 라틴어 시대에 보이티우스가 썼던 〈철학의 위안 De Consolatione Philosophiae〉(5권, 1473)과 형식·내용이 비슷하다.
단테는 〈향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법론으로 중세의 문화와 철학을 재점검하고 그 핵심을 정리하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 이 작품을 통해 마침내 고양된 방언 산문을 완성한 셈이다. 그는 〈신생〉에서 시도했던 산문정신을 〈향연〉에서 발전시키려고 했는데, 〈신곡〉에 나타나 있는 시정신이 그러하듯 단테는 중세의 시학과 수사학에 바탕을 둔 방언의 개발이라는 근대정신을 태동시켰다. 단테를 일컬어 중세의 막내, 근대의 맏형이라고 하는데, 이는 곧 중세문화에 뿌리를 내려 그 뿌리에서 영양을 취해 새로운 시기의 기운을 꽃피웠다는 뜻이다.
이것은 〈신곡〉·〈신생〉·〈향연〉이 라틴어가 아닌 방언으로 씌어져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단테가 언어를 중요하게 여긴 사실은 그의 언어학 논문 〈속어론 De vulgari eloquentia〉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는 유럽에서의 문어(방언)를 체계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로망스계 언어들을 깊이 연구한 결과이다. 그외 단테의 작품으로 중요한 것들은 정치학에 관한 논문 〈제정론 De monarchia〉(1313경)과 그의 인생과 사상을 전달하는 〈서간문 Epistole〉 등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전환기의 위대한 선각자의 일생을 짐작할 수 있다.
시성 단테와 더불어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페트라르카를 들 수 있다. 단테와 겨우 4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활동했던 동시대인이었지만, 그의 문학세계는 훨씬 더 근대성을 띠고 있다. 고양되고 숭고한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시의 주제를 발견함으로써 예술세계의 폭을 넓혔다.
페트라르카는 철두철미한 인문주의자였다.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학에 심취했으며, 그것에서 참다운 문학의 가치 및 전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절대적인 것은 오직 시뿐이었다.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지도 않았으며, 철학을 단순히 살아가는 데 지혜를 주는 기술로 간주했지만 시에 대해서만은 절대적이었다.
페트라르카의 인문주의에 대한 열정은 언어에 대한 태도에서 잘 파악할 수 있다.
고전이 지닌 내용적인 가치뿐 아니라 그 언어의 중요성까지 인정해 모든 글을 고전 라틴어로 써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것은 분명 단테에 비해 시대역행적인 태도였다. 그는 문학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글은 모두 라틴어로 썼다. 〈아프리카 Africa〉(1338년경 집필시작, 1396년 출판)·〈승리 Trionfi〉(1351~74) 등 방대한 작품들이 이에 포함되며, 〈칸초니에레 Canzoniere〉만 이탈리아어로 썼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의 명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칸초니에레〉이다. 〈칸초니에레〉는 중세의 탈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인간 중심의 사상과 태도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이탈리아에서 문예부흥이 태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페트라르카에 의해 제창되고 주도되었던 인문주의 정신과 운동은 곧바로 당대 또하나의 거장 보카치오에게 전승되었다. 보카치오의 문학은 시보다 산문에서 그 진가가 돋보인다. 단테의 세계가 천상에 펼쳐져 있다면, 페트라르카의 세계는 하늘과 땅 사이를 왕래했고 보카치오의 세계는 철저하게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시에서보다 산문에서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보카치오는 아버지의 권유로 나폴리에서 법률을 공부하게 되었으나, 법률 공부를 위한 라틴어 습득 과정에서 오히려 문학 쪽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한 소녀를 사랑하면서 더욱더 문학에 심취했고, 마침내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사랑의 고통 Il filocolo〉(1336경)·〈사랑의 환상 L'amorosa visione〉(1342~43경)·〈피에졸레의 요정이야기 Il ninfale fiesolano〉(1344~45) 등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 피암메타에게 헌정한 많은 시를 썼으며, 〈코르바초 Il Corbaccio〉와 〈데카메론〉(1348~53) 같은 산문을 남겨 유럽에서의 산문문학을 확립시켰다. 그의 대표작 〈데카메론〉은 세계 문학사에서 이 작품만큼 번안과 표절이 많았던 작품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세계문학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데카메론〉은 100편의 이야기와 10편의 발라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10명의 남녀가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피해 피에솔레 언덕으로 가서 무료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각각 하루 1편씩 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의 이야기에는 그때까지 전해내려오던 것도 있고 보카치오 자신이 창작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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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14세기 이탈리아 문학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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