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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6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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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18년 |
대표작 | 《홍길동전》, 시 선집 《국조시산》, 비평집 《성수시화》 등 |
우리나라에서는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시작으로 17세기 초 허균의 《홍길동전》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국문소설 문학의 시대가 열렸다. 《홍길동전》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로 꼽히지만, 그전 시대에 이미 국문소설이 등장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허균은 1569년(선조 2) 영의정을 지낸 허엽과 강릉 김씨의 3남 3녀 중 막내아들로,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자랐다. 1594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세자시강원 설서, 황해도도서, 형조 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당대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시와 비평에도 뛰어나 시 선집 《국조시산》, 비평집 《성수시화》 등을 남겼다.
허균은 주자학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민중을 위한 실용적 학문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 중기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특정 사상이나 유파에 휩쓸리지 않고 두루 공부하여 유교, 불교, 천주교, 민속 종교 등 다양한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였다. 허균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이기도 한데, 1610년에는 명나라에서 천주교 12단(端)을 얻어 오기도 했다.
허균은 선조 시기 대북파의 한 사람으로 광해군 즉위 후 조정의 주요 집권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1617년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의 폐위를 주장한 폐모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폐모론에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을 비롯해 그때까지의 정치적 동지들과 사이가 벌어졌다. 이 일로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당하자 아들 기준격이 아버지를 구하고자 허균을 역모 혐의로 고발했다. 허균은 이에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1618년 남대문에 붙은 격문을 허균의 심복 현응민이 붙였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역모죄로 몰려 능지처참당했다.
허균을 떠올리면 대개 '홍길동'을 함께 떠올린다. 서출로 태어나 왕조 사회에 반기를 든 홍길동의 이미지를 허균 자신의 이미지로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허균은 명망 높은 집안의 적자로 태어나 역모죄로 참형되기 전까지 높은 관직을 역임하고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전도유망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사회 제도, 특히 계급 제도의 모순을 고발하는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유불도를 가리지 않고 다종다양한 학문을 접하고, 서자나 한미한 집안 출신이 주를 이루었던 실학파 학자들과 주로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홍길동전》은 서얼 출신으로 차별받던 스승 손곡 이달 등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 밖에도 허균은 이달에 관한 한문 전기소설인 〈손곡산인전〉을 비롯해 귀신을 부리는 방술을 지닌 장산인의 생애를 그린 〈장산인전〉, 비렁뱅이 행세를 하며 기생집을 들락거리며 재주를 보이는 장생의 일화를 다룬 〈장생전〉, 〈남궁선생전〉, 〈엄처사전〉 등 5편의 한문 소설을 남겼으며, 이 작품 모두 《홍길동전》에서와 같이 당대 사회 모순을 파헤치고 있다. 이 작품들은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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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시, 희곡, 수필 등 문학의 여러 장르를 막론하고 세계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 100인의 작가를 소개한다. 중세의 암흑을 깬 영혼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 사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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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허균 – 문학사를 움직인 100인, 이한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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