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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출생 | 85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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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대표작 | 《계원필경》, 《계원필경》 20권, 《금체시》, 《오언칠언금체시》 등 |
우리나라에 한자가 전래된 이래로 한문 문학, 특히 한시(漢詩)는 7세기경 지배층에 의해 귀족 문화로 자리 잡은 후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상류층 문학의 주요 형태였다. 삼국 시대 대표적인 문장가는 통일 신라 시대 말기의 귀족이자 학자인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857년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났다. 학자를 많이 배출한 집안이었으나, 골품제에서는 귀족으로서 낮은 계층인 6두품이었다. 10세 때 사서삼경을 익혀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신분의 한계로 말미암아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한 지 7년 만에 당나라의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합격하고 벼슬 생활을 했으며,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벌 총사령관인 고변의 종사관으로 일했다. 이때 황소를 치기 위해 지은 〈토황소격문〉은 황소가 이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뛰어난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세운 공으로 비은어대, 자금어대 등을 하사받았으며,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고운, 나은 등 당나라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최치원은 결국 외국인으로서 신분의 한계를 느끼고, 28세 때인 885년 귀국했다. 17년간 당나라에서 지은 글은 시와 격문 등을 모두 합해 약 1만여 편에 이르며, 이 중 정선된 작품들은 귀국 후 펴낸 《계원필경》에 실려 있다. 《계원필경》은 현전하는 개인 문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우리나라 한문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신라로 돌아온 이후 최치원은 헌강왕 치세에서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신분의 한계 때문에 태인, 함양, 서산 등의 태수를 지내는 등 외직을 전전했다. 894년, 진성여왕에게 정치 개혁안인 〈시무 10조〉를 올려 6두품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에 올랐으나 그의 개혁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신라 왕실에 대한 실망과 벼슬 생활에 좌절을 느낀 최치원은 40세 때 관직을 내놓고 유랑길에 올랐으며, 이후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가야산 해인사에서 말년을 보내고 사망했다고도 하며,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020년에 고려 현종에 의해 내사령에 추증되었으며, 이듬해 문창후로 추시되어 유교의 성인을 모시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계원필경》 20권, 《금체시》, 《오언칠언금체시》, 《잡시부》, 《중산복궤집》, 《사륙집》, 기타 문집 30권을 비롯해 역사서 《제왕연대력》, 불교서적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 《석이정전》, 《석순응전》 등을 썼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뿐이다. 그 밖에 통일 신라 시대 학자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우리나라 역대 시문집인 《동문선》 등에 최치원에 관한 기록과 시문 일부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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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최치원 – 문학사를 움직인 100인, 이한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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