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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인간의 심리에 천착한 사실주의자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출생 | 1821년 11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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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81년 02월 09일 |
국적 | 러시아 |
대표작 |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 |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간 내면의 심리에 주목하며 현대소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스토옙스키를 낳았다는 것만으로도 러시아 민족의 존재는 정당화될 수 있다.
러시아의 존경받는 사상가 니콜라이 베르자예프는 이렇게 말했다. 또한 니체는 도스토옙스키를 일컬어 자신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라고 칭했으며, 헨리 밀러는 "사실상 신을 창조했다."라고 말했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19세기의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는 청년 시절부터 '인간이라는 비밀'을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문학적 과제라고 표명하면서 인간 내면의 심리를 천착함으로써 현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비단 문학이나 예술뿐만이 아닌 사상가와 정신분석학자, 과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며 20세기 사상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1월 11일(러시아 구력 10월 30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는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으나 빈민 구제 병원에서 의사로 일했고, 엄격하고 가부장적이며 종교적인 인물이었다.
16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표도르는 형 미하일과 함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육군 공병학교에 지원했다. 그러나 형 미하일은 신체검사에서 탈락하여 표도르 혼자서만 기숙학교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 미하일은 그 후 의사를 그만두고 딸들과 함께 영지인 다로보예 마을로 내려가 살다가 표도르가 18세 때 농노들에게 살해당했다. 표도르는 19세 때 하사관으로 임명되었지만, 공병학교 시절부터 군 생활과 잘 맞지 않아 당구를 치러 다니고 발레 공연을 보러 가곤 했으며, 빅토르 위고, 라신, 괴테 등의 책을 읽으며 보냈다. 습작도 틈틈이 해서 당시 미완성 희곡 〈메리 스튜어트〉와 〈보리스 고두노프〉를 썼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 시기에 이미 아버지의 영지에서 나오는 돈과 배당금으로 수입이 충분했음에도 무절제한 생활로 빚을 많이 지고 있었다. 그는 평생 낭비벽으로 고생했지만 이런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21세 때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부터 공병국 제도실에서 근무했는데, 이때 돈에 쪼들려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를 번역하기도 한다. 이듬해에는 재정 상태가 악화된 나머지 토지와 농노에 대한 유산 상속권을 일시금을 받고 팔아 버렸다. 그해 도스토옙스키는 소설가가 되기로 하고 제대하여 《가난한 사람들》 집필을 시작했다. 원제인 'Бедные люди'은 '가난한', '가엾은', '불행한'이라는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한 단어이며, 도시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사회적 비극과 내면적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친구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친구를 통해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니콜라이 네크라소프가 보게 되었고, 네크라소프는 밤새 원고를 읽고 감동하여 새벽녘에 도스토옙스키의 집으로 왔다고 한다. 이후 네크라소프가 당대 유망한 사상가였던 벨린스키에게 이 작품을 보여 주었고, 도스토옙스키는 '새로운 고골'이 등장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화려하게 문학계에 등장했다. 그리고 곧바로 몇 건의 계약을 맺고 《분신》, 《여주인》,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등을 잇달아 집필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빈곤층과 관련한 사회적 불평등 및 제반 문제들을 보여 주기보다는 가난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즉 환경적 요건으로 인한 인간의 심리를 그려 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평생 다양한 극적 상황을 중심으로 인간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탐구했으며, 스스로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사실주의자'라고 일컬었다. 즉 그에게 있어 사실주의는 외부 환경에 대한 객관적 묘사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탐구하고 묘사하는 것이었다.
1848년, 도스토옙스키는 미하일 페트라솁스키의 집에서 사회주의자 F. M. 푸리에의 강연을 듣고 흥미를 느낀다. 이후 페트라솁스키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문학 모임에 참석했는데, 이 때문에 1849년 4월 23일 체포되었다. 그는 총살형을 선고받고 사형장까지 끌려갔으나 형 집행 직전에 황제의 특별사면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다. 그는 4년간 시베리아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강제 노역을 했고, 이후 4년간은 몽골 국경선 근처 시베리아 변경 초소에서 사병으로 복무했다.
1857년,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 중에 만난 마리아 이사예바와 결혼했다. 시베리아 유형을 온 정치범 남편을 따라온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도스토옙스키와 다른 젊은 교사를 놓고 저울질하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장교이며 소설가로서의 성공이 보장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결혼에 성공했으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생활은 가난했고, 정치범인 그가 소설을 출간하려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여기에다 어렵게 결혼한 만큼 늘 아내에 대해 전전긍긍하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1857년 12월, 도스토옙스키는 간질 증세로 복무가 어렵다는 진단을 받고, 1859년에 제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서 형 미하일과 함께 문예 잡지 〈시대〉를 창간하고, 편집자 모임을 결성하여 당대 지식인, 문학가 들과 교류했다. 그리고 〈시대〉 지에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바탕으로 한 《죽음의 집의 기록》, 상트페테르부르크 상류 사회의 이중적 삶과 하층민의 고통스런 삶을 그린 《학대받은 사람들》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복귀했다.
1861년, 러시아에서는 농노 해방령이 시행되고, 이후 수년간 정치적 반동의 시대가 이어졌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런 일들과 관계없이 그해 6월 서유럽 여행길에 올라 베를린, 드레스덴, 프랑크푸르트, 쾰른, 파리, 런던, 피렌체 등지를 여행했다. 그러나 여행에서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한 그는 피렌체에서 우피치 미술관도 들르지 않고 숙소에 틀어박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었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아내는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죽음이 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폴리나 수슬로바라는 20세의 작가 지망생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고는 당국으로부터 〈시대〉 지의 발행 금지 처분을 받자 이와 간질병 요양을 빌미로 다시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수슬로바와의 연애 역시 그녀가 바람을 피우면서 파탄 났고, 여행길에 도박 빚까지 졌다.
그는 돈을 융통하려고 《지하생활자의 수기》, 《노름꾼》, 《죄와 벌》 등을 집필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6개월 후 아내가 죽었으며, 그로부터 한 달 후 사랑하고 의지했던 형 미하일까지 사망했다. 형과 함께 재창간했던 〈세기(에포하)〉 지도 완전히 실패하여 폐간했고, 노름으로 거액의 빚을 지는 등 생활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결국 도스토옙스키는 출판업자 스첼롭스키에게 3천 루블을 받고 모든 작품의 저작권을 팔았다.
1867년, 《노름꾼》을 정서해 준 속기사 안나 그레고리예브나와 재혼했으나, 빚쟁이들의 시달림을 피해 해외로 도피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도스토옙스키는 도박과 사치에서 벗어나지 못해 또 빚을 졌고, 허영심과 오만한 기질 역시 수그러들지 않았다. 제네바에서 아이가 태어나자 생활비 때문에 선인세를 받고 《백치》, 《악령》 등을 집필했다. 그는 《악령》 2회 분량을 연재했을 때 원고를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출판업자의 도움으로 마침내 1871년 5년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악령》은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새로 창간된 〈시민〉 지의 편집 일을 맡으면서 다소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헌신적이었던 아내 안나 덕이기도 했다. 안나는 《악령》부터 남편의 작품을 직접 출간하고, 그로 인한 수입을 관리했다. 이 때문에 도스토옙스키는 별다른 풍파를 겪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여러 편의 에세이를 모은 《작가 일기》를 발표하면서부터는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어 인생의 멘토 역할을 하는 작가로서의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1880년, 작가 생활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발표하면서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작가로 일컬어졌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듬해 1월 말부터 몇 차례 각혈을 하다 2월 9일(러시아 구력 1월 28일) 갑작스레 숨을 거두었다. 시신은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장례식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례없을 만큼 대중들의 슬픔이 두드러진 의식'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애도 행렬을 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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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문학사를 움직인 100인, 이한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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