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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상징에 대한 비방이나 모독은 안 되는가?
국기 소각
미국에선 국기인 성조기의 소각이나 기타 훼손을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60년대엔 구멍 난 청바지를 성조기로 꿰매 입었던 사람이 6개월간 징역살이를 한 일도 있지만, 이제 성조기 패션 · 액세서리는 인기 품목으로 등장했다.
특히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로서 자신에게 놀라운 성공의 기회를 준 미국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패션 디자이너 랠프 로런(Ralph Lauren, 1939~)은 성조기를 자기 브랜드의 상징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그는 토미 힐피거(Tommy Hilfiger, 1951~)와 치열한 접전 끝에 1998년 7월 1,300만 달러를 내고 성조기의 이용권을 따냈다. 그런 뒤 스웨터는 물론 향수와 수건, 심지어 머그잔에도 성조기를 인쇄해 팔았고, 급기야 빌클린턴 전 대통령이 "힐러리와 나를 포함해 대다수의 미국인이 성조기가 들어간 멋진 폴로 스웨터를 갖고 있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각주1)
그러나 모두 다 랠프 로런처럼 성조기를 이용한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가 디자이너의 미적 감각이고 어디부터가 아닌지, 그 경계를 법적으로 판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노골적인 성조기 훼손이 난무했던 1960년대는 그런 고민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성조기보호법이 연방법으로 제정된 것은 월남전 반대 데모가 심하던 1967년이었다. 당시 반전(反戰)을 외치는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성조기나 징집 카드를 불태우는 것에 대응해 성조기 보호법은 공개적으로 성조기를 훼손하거나 태우거나 짓밟는 등 고의로 모욕하는 자는 1,000달러이하의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성조기를 깔고 앉는 것도 논란이 되었다. 1974년 연방대법원은 성조기를 바지 엉덩이 부분에 부착해 앉을 때마다 성조기를 깔고 앉음으로써 미국의 국가 정책에 대한 경멸을 표시하려 한 것은 정치적 표현의 한 방법이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각주2)
그 후 성조기 소각이 크게 부각된 사건은 1984년 8월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전당대회가 열린 텍사스주의 댈러스시에서 일어났다. 댈러스 시내에서 벌어진 공화당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한 빌딩의 국기 게양대에 걸린 성조기를 끌어내려 석유를 뿌리고 불태우며 "우리는 미국에게 침을 뱉는다"고 외친 사건이다. 100여 명의 시위 군중 가운데 유일하게 구속 · 기소된 공산당 활동가 그레고리 존슨(Gregory L. Johnson, 1956~)은텍사스주 지방법원에서 1년의 징역형과 2,0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텍사스주 고등법원 항소심에서 존슨은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텍사스 검찰의 상고로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에서 다뤄지게 되었다.각주3)
미 연방대법원은 1989년 6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국기를 불태워도 무방하다"며 5대 4로 합헌 판결을 내렸다. (텍사스대 존슨, Texas v. Johnson) 다수 의견(윌리엄 브레넌 2세 대법관)은 "국기 모독을 처벌하는 것이 국기를 신성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국기 모독을 처벌하는 것은 이 소중한 상징(곧 국기)이 대표하는 자유를 약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반면 소수 의견(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분명히 민주주의 사회의 고귀한 목적 중의 하나는 다수의 국민에게 사악하고 매우 불쾌감을 주는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를-그것이 살인이든, 횡령 · 공해든 또는 국기 소각이든-규제하는 법을 제정하는 데 있다"고했다.각주4)
언론사들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들은 압도적으로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정서에 편승한 상원은 존슨 사건의 판결이 내려진 바로 다음 날 97대 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연방대법원 판결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또 그 해 10월엔 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새로운 성조기 보호법이 제정되어 미국의 국기나 그 일부를 고의로 훼손하거나 불태우거나 짓밟는 행위를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했다. 1990년 6월, 연방대법원은 성조기 소각을 금지하는 법은 위헌이라고 재차 선언했다. 이번에도 표결 결과는 5대 4로 나타났다.각주5)
의회는 헌법 개정으로 맞섰다. 1990년 6월 21일 연방 하원은 성조기 훼손을 금하는 헌법 수정안을 표결에 붙였으나 헌법 수정안 상정에 필요한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내지 못했으며, 며칠 후 연방 상원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즉, 의회는 분노한 민심을 의식해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성조기의 훼손을 막는 것이 헌법을 수정해야 할 만큼 중대한 문제라고 보지는 않은 것이다.각주6)
미국에서 성조기 훼손 논쟁은 미국 내셔널리즘이라고 하는 파도에 따라 춤을 춘다. 1995년 12월, 미 상원에선 '국기 모독 금지'조항을 삽입한 헌법 개정안이 또 표결에 붙여졌지만 의결정족수인 재적 3분의 2 이상을 채우지 못해 부결되었다.
헌법 개정을 위한 시도는 1999년 6월에 다시 이루어졌다. 미 하원은 6월 24일 자국기의 훼손을 금지시키는 헌법 수정안을 찬성 305대 반대124로 통과시킴으로써 이에 대한 뜨거운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헌법은 상하원 의원 3분의 2 지지와 50개 주 가운데 38개 주가 승인하면 개정할 수 있는데, 국기보호법 수정안 채택 시도는 지난 1989년 하원이 통과시킨 뒤 연방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린 이후 모두 3번째였으며, 이전 2번의 헌법 수정 시도는 모두 상원에서 의결정족수 67표에 미달, 부결되었다.
수정안 찬성론자인 하원의원 크놀렌버그(미시간주)는 "국기는 미국의 가치와 투쟁,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라며 상원 통과를 촉구했다. 그러나 같은 주 출신 존 코니어스는 "이 법안을 통과시킬 경우 단지 우리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언론과 행동의 자유에 더 많은 제한이 가해지는 선례가 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국기 모독 문제는 의회 내뿐만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서도 찬반양론이 엇갈렸는데, '국기를 불태우는 행위(Flag Burning)'란 제목의 웹사이트도 여럿 등장해 온라인으로 열띤 찬반 논쟁이 벌어지는가 하면 대학에서는 관련 강좌가 개설되었다.각주7)
헌법 수정안은 2000년 미 상원이 찬성 63, 반대 37로 부결시켰다. 2001년 9 · 11 테러 사건이 일어나면서 미국엔 애국주의 물결이 흘러넘쳤다. 미 하원은 2005년 6월 22일 또 한 번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찬성 286표, 반대 130표였다. 공화당은 찬성 209 반대 12였으며, 민주당은 찬성 77 반대 117이었다.각주8) 이 또한 결국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날로 고조되는 미국인들의 애국주의 물결을 타고 언젠가는 통과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선 국기를 태운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논란이 거의 없다. 한국에서 국기에 관한 죄엔 형법 제105조(국기, 국장의 모독)와 제106조(국기, 국장의 비방)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05조(국기, 국장의 모독)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 또는 국장(國章)을 손상, 제거 또는 모욕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10년 이하의 자격 정지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개정 95.12.29)
제106조(국기, 국장의 비방)
전조(前條)의 목적으로 국기 또는 국장을 비방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5년 이하의 자격 정지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개정 95.12.29)
국기, 국장의 '모독'과 '비방'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김일수에 따르면, "모독의 죄가 주로 물질적 내지 물리적 행위임에 반하여, '비방'이란 언어나 거동, 문장이나 회화 등으로 모욕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국기에 대하여 욕설을 퍼붓거나 국기 문양을 가진 쓰레기통이나 팬티 등을 제작 · 사용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비방이 예술 작품의 형식을 빌려서 행하여졌을 때에는, 예술의 자유에 관한 기본권 보장은 이 형법 규범과 충돌하는 한에서 제한된다." 각주9)
『한겨레21』은 2006년 1월 17일자 표지 기사로 '국기에 대한 맹세'를 다뤘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없애자」는 제하의 메인 기사에는 댓글이 4,500개 이상 붙었는데, 그 중 4,400여 개는 악플이나 욕풀이었다. "북한에 가서 살아라", "니들은 월드컵도 보지 말라" 등과 같은 식의 비난이었다.각주10) 한국에서 태극기를 모독했다간 공권력 이전에 네티즌들에 의해 호되게 응징 당할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하겠다.
그러나 언제까지 '태극기 신성화'가 계속될 수 있겠는가. 2015년 4월 김 모(23) 씨는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진행된 세월호 범국민 추모 집회에 참석해 소지하고 있던 태극기에 불을 붙여 태운 혐의(국기모독)로 기소되었다. 김 씨는 경찰의 조사를 받기 전 "공권력을 남용하는 일부 권력자들에게 태극기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 국가나 국기를 모욕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2015년 1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김윤선 판사로 진행된 첫 번째 공판에서 김 씨 측 변호인은 "형법 제105호 국기 모독죄 규정과 관련해서 다음 재판 전까지 위헌 법률 심판 제청을 신청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김 씨 측 변호인은 국기 모독죄 조항이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라는 주장을 신청서에 담을 예정이라며,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를 손상, 제거, 오욕할 때'처벌하고 있는데) '모욕할 목적'이라는 부분이 헌법상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각주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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