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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로마제국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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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75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피살당한 후, 원로원은 역사가 타키투스의 후손인 75세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를 황제로 천거했으나, 그는 재위 6개월 만에 노환으로 죽고 말았다. 그 후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플로리아누스, 프로부스, 카루스, 카리누스, 누메리아누스 등 이름도 외우기 힘들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황제 자리에 잠깐 올라섰다가는 모두 제명대로 못 살고 사라졌다. 로마의 역사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는데, 그래도 이를 다시 한 번 일으켜보려는 인물이 등장했다.
로마제국의 분할 통치
누메리아누스 황제의 경호대장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발칸 반도 달마티아 지방 해방노예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강직한 성격과 결단력이 있는 야심가였다. 졸병 시절 갈리아 지방에서 근무하던 중, 어느 여관집 여주인이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당신은 멧돼지를 죽이고 나서 황제가 될 것이요”라고 했다. 그는 평소에 멧돼지 사냥을 즐겼기 때문에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세월이 지난 후, 누메리아누스 황제가 근위대장 아페르의 손에 살해당하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를 체포하여 처형했는데, ‘아페르’의 뜻은 공교롭게도 ‘멧돼지’였다. 서기 284년, 군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여관집 여주인의 말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를 예언한 여관집 여주인은 다름 아닌 갈리아의 토속종교 드루이드교의 여사제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영토가 너무 넓어 한 사람이 효율적으로 통치하기가 힘들 뿐 아니라, 방대한 로마제국의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서 먼 거리에 있는 로마에서 명령을 하달한다는 것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로마제국의 수도를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로 옮겼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황제들이 제명에 못 살고 살해당하는 로마에 발을 디디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로마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자신은 동부를 맡아 통치하고, 서부는 같은 고향 출신인 막시미아누스 장군을 서기 286년에 황제로 내세워 통치하도록 하고, 서부의 수도는 로마가 아니라 밀라노로 정했다. 이리하여 로마는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의 지위를 잃어버렸다.
그는 황제의 임기를 20년으로 못 박고, 황제가 죽거나 퇴위할 때를 대비해서 부황제를 선출했다.(황제는 ‘아우구스투스’, 부황제는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붙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를 부황제로 미리 지명해두었다. 이리하여 실제로는 네 명이 로마제국을 분할 통치하는 이른바 ‘테트라르키아(Tetrarchia)’ 체제가 성립되어, 황제가 죽으면 로마제국이 더 이상 무정부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게다가 서로 정략결혼을 하여 유대관계를 강하게 했다.
한편 콘스탄티우스는 헬레나라고 하는 여관집 딸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콘스탄티누스였다. 콘스탄티우스는 부황제에 걸맞는 지체 높은 여자와 결혼하라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압력에 못 이겨 헬레나를 버리고 막시미아누스의 양녀 테오도라와 정략결혼하고 말았다.
네 명의 황제 중에 최고 권력자는 물론 디오클레티아누스였다. 그는 50만 명이 넘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으며, 계획경제를 엄격하게 실행하여 로마제국 전체를 마치 철의 장막으로 통제된 국가처럼 탈바꿈시켰다. 게다가 자신은 유피테르의 화신이고 막시미아누스는 헤라클레스의 화신이라고 하며 자신들을 신으로 받들도록 했다. 또한 초창기에는 기독교에 대해 관대하다가 후에는 부황제 갈레리우스의 사주를 받고 기독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서슬이 퍼렇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 임기 20년을 채운 다음 아무런 미련 없이 스스로 물러났다. 그는 스팔라툼(오늘날의 크로아티아 남서해안의 스플리트)에 거대한 궁전을 짓고, 퇴위한 다음에는 정치에는 코끝도 안 내밀고 꽃과 채소를 가꾸면서 살다가 313년에 눈을 감았다.
건설 욕망이 컸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건설욕망이 매우 컸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서부황제 막시미아누스의 관할지역인 로마에 관심을 쏟아 포룸 율리움, 원로원 건물 등 로마 중심부의 역사적 건물을 모두 새롭게 복구하도록 했는가 하면 로마의 인구 밀집 지역에 로마제국 최대의 목욕장을 건설하도록 했는데, 이 공사를 위해 기독교 신자 1만 명을 동원하여 강제노동 시켰다고 한다. 이 목욕장은 390미터×370미터의 대지 위에 235미터×150미터, 그러니까 거의 1만 평에 가까운 규모였다.
이곳에서 발견된 대리석판에 새겨진 기록을 보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공동황제 막시미아누스가 298년 로마를 방문했을 때 목욕장 건립 부지를 구입해 8년 동안 공사하여, 서기 305년 5월 1일과 306년 7월 25일 사이에 문을 연 것으로 보인다. 이 목욕장은 한꺼번에 3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니 카라칼라 목욕장의 두 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수용능력을 갖춘 규모였다. 목욕장의 중앙 홀을 차지하는 프리기다리움(냉탕)의 면적은 66미터×48미터나 되고 높이는 거의 30미터나 되며 벽면과 바닥은 화려한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하니 이 엄청난 내부 공간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운명이 기울어지고 있는 판국에 어째서 예전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화려한 공공건물을 세웠을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신을 다른 신도 아닌 로마의 최고신 유피테르의 화신이라고 한 것은 로마의 전통을 다시 되살려보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웅장한 건물을 세우는 것도 로마 시민들에게 위대한 로마 제국의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르네상스의 노장 미켈란젤로의 손길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은 6세기까지 사용되고 이후에는 폐허로 방치되었다. 이 목욕장의 마지막 물방울이 마른지 거의 1000년이 지난 1561년, 교황 피우스 4세는 이곳에서 강제노동으로 순교한 기독교 신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86세의 노인 미켈란젤로를 불러 목욕장 폐허를 성당으로 개축하도록 했다. 1563년 두 르네상스의 노인, 즉 교황과 미켈란젤로는 폐허로 변한 고대 로마의 경이로운 건축물을 3년 만에 거룩한 기독교 성전으로 탈바꿈시켰다.
200여 년이 지난 1749년, 건축가 반비텔리는 로마의 달라진 도로망에 맞추어 성당 입구를 테피다리움(온탕)이 있던 서쪽 면으로 바꾸었다. 오늘날 지름이 20미터가 되는 원통형 공간 테피다리움을 지나 성당 안에 들어서면 십자형으로 교차하는 엄청나게 거대한 공간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의 핵심부에 해당하던 프리기다리움(냉탕실)이었다. 지금도 당시 목욕장의 웅대한 내부 공간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목욕장 바깥의 서쪽 외부 공간에 해당하던 엑세드라(에제드라) 부분은 1896년에서 1902년 사이에 커다란 광장으로 변모되어 에제드라 광장(Piazza Esedra)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레푸블리카 광장(Piazza Repubblica)이다. 이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20세기 초에 세워진 매력적인 ‘요정들의 분수’에서 뿜어나오는 물보라가 높이 흩날리고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을 개조하여 만든 성당의 이름은 ‘천사들과 순교자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e dei Martiri)’이다. 순교자들이란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박해받은 기독교 신자들을 말한다. 오늘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기간 중에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참여하는 성대한 종교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1700년 전 목욕 인파들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리던 거대한 실내 공간에는 이제 거룩한 음악이 마치 천사의 선율처럼 구석구석 울려 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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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의 건국 이야기가 깃든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의 집부터 기원후 4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이전하기 직전에 세워지는 콘스탄티누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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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 –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정태남,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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