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시대 | 로마공화정시대 |
---|
로마는 카르타고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을 차례차례 정복하여 지중해의 최강자가 되었으나 대내적으로는 기득권층과 무산계급 간의 사회적인 갈등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로마는 마리우스가 이끄는 포풀라레스(Populares, 민중파)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이끄는 옵티마테스(Optimates, 원로원 주도파) 간의 대립으로 인하여 피비린내 나는 내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이 혼란기를 평정하고 주도권을 잡은 술라는 종신독재관이 되어 반대파에 대해 무자비한 피의 복수극을 자행했다. 그는 기원전 80년 말, 종신독재관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바다가 보이는 나폴리 근교 쿠마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78년 세상을 떠났다. 그해 레피두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된 카툴루스는 포룸 로마눔이 아래로 보이는 캄피돌리오 언덕 중턱에 ‘타불라리움’이라고 하는 거대한 공공건물을 완공했다. 국가의 행정 및 사법 공문서, 국제협약 등을 새겨 넣은 청동판을 타불라이(tabulae)라고 했는데, ‘타불라리움’이란 이러한 타불라이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타불라리움은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흔적을 볼 수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공화정 시대의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이 건물이 세워진 연유에 관해서는 전해지는 자료가 거의 없지만, 돌에 새겨진 문구에 의하면 이 건물을 세운 건축가의 이름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라고 하는데, 그의 개인 이름과 성은 술라의 이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술라는 반대파 소탕전에 이용하기 위해 수많은 노예를 해방시키고 자신의 씨족 이름 코르넬리우스를 붙여주었다. 타불라리움의 건축가는 술라의 행동대원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러한 건축물을 설계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리스 출신의 해방노예가 아니었을까 싶다.
중세에 타불라리움의 유적 위에 콘세르바토리 궁이 세워지면서, 현재는 타불라리움 2층의 아치 3개와 아래층 벽체만 눈에 띈다. 타불라리움의 아치 모양을 보면 도리스 양식의 기둥과 아치가 틀을 이루며 좌우로 반복되고 내부의 통로는 천장이 둥근 볼트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후에 세워질 마르켈루스 극장이나 콜로세움의 외벽 구성과 내부통로에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후세에 세워질 서양 공공건물의 전형이 되었다.
타불라리움은 로마의 심장부 포룸 로마눔에서 우러러보는 위치에 세워져 있다. 술라는 로마뿐 아니라 프라이네스테(현재의 팔레스트리나), 티부르(현재의 티볼리), 테라치나 등지에도 거대한 신전을 세웠는데 그가 세운 건축물에서는 모두 헬레니즘의 영향이 물씬 느껴진다. 술라는 그리스에서 미트리다테스 6세의 난을 평정하면서 여러 헬레네즘 국가에 세워진 웅대한 건축물을 보고 나서 그와 비슷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세웠던 것 같다. 이 건물들은 한결같이 경관이 좋은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다시 말해 아래에서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다. 이것은 서슬이 퍼런 독재자 술라가 공화정 체제하에서는 누구도 왕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여 자신의 힘을 건축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의 건국 이야기가 깃든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의 집부터 기원후 4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이전하기 직전에 세워지는 콘스탄티누스..펼쳐보기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타불라리움 –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정태남, 21세기북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