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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로마공화정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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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초에 세워진 로마의 테르미니 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혁신적인 역으로, 수백 년이 넘는 건물이 즐비한 로마에서 아주 보기 드문 현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역 앞 광장 오른쪽에는 길이 약 100미터에 달하는 돌무더기가 늘어서 있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성벽의 일부분이다. 이 성벽은 로마의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의 이름을 따서 보통 ‘무라 세르비아네(Mura serviane)’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공화정 시대인 기원전 378년에 세워진 것이다.
테르미니 역의 정면부는 이 성벽의 유적을 보호하기라도 하듯 병풍처럼 좌우로 길게 펼쳐져 있다. 검누런 회색의 부드러운 투포(tufo)라는 돌을 쌓아서 세운 세르비우스 왕의 성벽이 주는 질감과 하얀 트라베르티노 돌로 치장된 테르미니 역의 표면이 주는 느낌은 250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묘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이 성벽은 실은 세르비우스 왕이 세운 성벽 터 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총 길이는 원래 약 11킬로미터였고, 426헥타르에 해당하는 로마의 일곱 언덕 주변을 모두 둘러쌌다. 이는 로물루스가 확정한 포메리움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이 로마 시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성벽의 유적은 현재 로마 시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데 그중 가장 잘 보존된 부분이 바로 테르미니 역 앞이다.
허약한 로마공화정
공화정이 시작된 이후 로마의 국력은 예전 같지 않았으며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으로 국론은 분열될 대로 분열되어 있었다. 드디어 기원전 390년 7월 18일 로마에 엄청난 재앙이 찾아왔다. 로마가 건국된 지 공교롭게도 대략 365년이 되던 때로, 1년을 하루라 치면 ‘건국 1주년 기념일’이 되던 해였다.
켈트족은 지금의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유럽 중원 광대한 지역에 널리 퍼져 살고 있었는데, 거칠고 포악하면서도 용맹스러웠기 때문에 정규 훈련을 받은 이탈리아 반도의 군대들도 이들을 접하면 먼저 겁부터 먹을 정도였다. 그런데 켈트족의 여러 부족들 중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살던 부족들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에트루리아를 짓밟고 내려와 테베레 강 북쪽 지류를 수비하던 로마군을 궤멸시킨 후에 로마로 침입해왔던 것이다. 로마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외적이 심장부까지 침입해오는 변을 당한 셈이다.
당시 집이란 집은 모두 불타 없어졌고, 유일하게 캄피돌리오 언덕만큼은 이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서 유피테르 신전이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하지만 일곱 달에 걸친 공방전 끝에 침략자들은 마침내 최후의 보루까지 쳐들어왔다. 적장 브렌누스가 원로원에 퇴각조건으로 막대한 양의 금을 요구하자 다급해진 원로원은 시민들로부터 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원로원이 금을 구하러 간 사이, 평민들의 모함으로 망명 갔던 명장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로마로 올라와 “나라를 구하는 것은 금이 아니라 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침략자들을 격퇴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철(ferrum)은 칼을 뜻한다. 이 말은 ‘적에게 굴복할 것이 아니라 칼을 들고 싸워야 한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용담과는 달리, 침략자들은 상당한 전리품을 챙겨 떠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로마는 이들로부터 수모를 당한 후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나라를 방어할 군대도 없었고 로마 주변에 살던 라틴인들과의 동맹도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로마는 현명한 정치와 애국심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로마는 푸리우스 카밀루스에게 나라를 다시 세우고 군대를 양성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를 모함했던 사람들도 그를 제2의 로마 창건자로 불렀다. 외적이 휩쓸고 간 후 완전히 수렁에 빠진 에트루리아나 다른 라틴 동맹의 도시와는 달리, 로마는 그를 중심으로 재기하기 시작했다. 또한 로마 근교의 베이오를 정복한 후 그곳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돌로 로마의 방어를 위해 포메리움을 둘러싸는 굳건한 성벽을 세웠다. 현재 테르미니 역 앞 광장에 있는 성벽 유적은 바로 그 당시의 일을 증언해주고 있다.
계획 없이 다시 세운 무질서한 도시
기원전 367년, 절정에 달하던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도 파국 직전에 이르러 평화롭게 끝났다. 계급 간의 격차가 줄어 사회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평민들도 국가의 요직을 맡을 수 있게 되어 로마는 모든 역량이 발휘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갔다. 그리고 주변의 도시들도 덕망 있는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지휘하는 로마의 영향권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로마는 서서히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고 개선하여, 결국에는 이탈리아 반도를 모두 평정하고 더 나아가서는 지중해 세계와 유럽의 상당 부분을 정복했다. 로마를 유린했던 켈트족의 본거지 갈리아 역시 로마의 정복지에 포함시켰다.
로마가 이렇게 정치 · 사회적으로 발전하고 국력도 강해졌지만, 로마라는 도시는 극히 무질서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사실,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초까지 로마의 도시 짜임새가 어떠했는지는 거의 알 수 없다. 아마 기록할 가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켈트족이 로마를 약탈했다는 것은 로마가 방어용 도시성벽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옛날 세르비우스 왕이 세운 기존의 성벽은 로마의 요충지만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기 때문에 로마 전체를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캄피돌리오 언덕만이 유일한 피신처였고, 이 언덕만이 방어용 성벽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켈트족이 떠난 다음 로마는 마치 폐허가 된 트로이아처럼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있었지만, 급속도로 복구되었다. 당시 로마의 인구는 15만에서 35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문제는 아무런 도시계획도 없이 너무 급속히 복구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그저 1년 내에 어떤 건물을 짓는다 하면 어디서나 누구든지 세울 수 있었으며, 석재도 아무 데서나 채취할 수 있었으며, 국가는 누구에게나 건축재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도시계획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왕정 때 만들어진 하수도망이 있는 곳과 아무 상관도 없는 곳에 시가지가 조성되었는가 하면, 지형이나 교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도로가 아무렇게나 급조되었다. 이리하여 로마는 빠른 시일 안에 다시 일어서기는 했지만, 완전히 무질서한 도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혼란스런 로마의 모습은 200년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도시계획법을 제정할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으며, 후세의 황제들이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었다. 이것은 애국심, 재건, 개발 등과 같은 구호 아래,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혈기를 너무 앞세운 결과였던 것이다.
불필요한 성벽
그 후 로마는 세력을 확장하여 북쪽으로는 아르노 강과 루비콘 강까지, 남쪽으로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모두 정복했다. 그다음, 바다로 눈을 돌린 로마는 강적 카르타고를 맞아 지중해 패권을 두고 세 차례의 전쟁을 벌이는데, 이것이 포에니 전쟁이다. 새로 세운 성벽은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중인 기원전 217년, 한니발의 로마 공략에 대비하여 보강되었다. 성벽의 두께는 4~10미터이고 높이는 10미터에 다다랐으며, 성벽 밖의 해자(垓字, 성 밖으로 둘러서 판 못)는 폭 30~40미터, 깊이 17미터에 달했다. 카르타고를 출발하여 히스파니아(스페인)를 거쳐 알프스 산맥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하하면서 로마를 떨게 하던 한니발 장군은 이 성벽을 보고는 로마 공략을 포기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성벽을 세웠다는 것은 외적의 침입이 예상되거나 아니면 침입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는 뜻이다. 로마제국 후기에 세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전자에 해당하고, 세르비우스 성벽은 후자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소도둑 맞고 외양간 고친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외양간을 나중에라도 고친 덕택에 한니발의 로마 침공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세르비우스 성벽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그것은 로마의 국력이 워낙 강해졌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성벽은 로마의 행정구역 경계선 정도로만 사용되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도시계획을 하면서 이 성벽을 아예 헐어내기까지 했다. 로마 시민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성벽이란 것이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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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의 건국 이야기가 깃든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의 집부터 기원후 4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이전하기 직전에 세워지는 콘스탄티누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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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세르비우스 성벽 –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정태남,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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