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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로마제국 전성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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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국경을 최대로 넓힌 트라야누스 황제를 뒤이은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국경을 넓히는 것보다는 내실을 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가 치세하는 동안 로마제국은 평화와 복지를 누렸다.
서기 76년 히스파니아(스페인) 남단에서 태어난 하드리아누스는 선제 트라야누스의 먼 친척이다. 하드리아누스는 황제로 지명 받은 트라야누스가 로마에 그를 데리고 갈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고, 트라야누스의 일족과 결혼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타계하자,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황후 플로티나의 총애를 받고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이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군단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정통성에 대한 시비는 거의 없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자 탁월한 정치가였고, 박식하고 재기가 넘쳤으며, 미술, 음악, 건축, 문학 등 거의 모든 예술 분야에 조예가 깊었으며, 또한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는 치세 21년 중 자그마치 12년 동안 로마제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고 하니 1주일에 4일은 여행을 한 셈이다. 물론 이 여행은 로마제국 국경 내부를 굳게 다지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을 띠고 있었지만 말이다. 여행을 많이 한 그는 세상을 보는 시야가 매우 넓은 통치자였으나 그의 성격은 변덕스럽고 무자비한 면도 없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후에 원로원은 그의 모든 업적과 기록을 없애버리는 ‘담나티오 메모라이’ 형벌을 내리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후계자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안토니누스는 선황에 대한 충성이 지극하여 ‘충성스런’이란 뜻의 ‘피우스(Pius)’라는 말이 이름에 덧붙여져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라고 불리었다.
이중 성격의 박학다식한 황제
선제 트라야누스가 건축가 아폴로도로스에게 건축을 모두 일임한 것과는 정반대로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건축 설계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판테온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했고, 콜로세움 바로 앞 벨리아 언덕에 ‘베누스와 로마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독특한 모습으로 세웠으며, 123년경에 로마 근교 티볼리에 광대한 별장을 착공했다. 하드리아누스를 이탈리아어로는 아드리아노(Adriano)라고 하기 때문에 티볼리의 별장은 보통 빌라 아드리아나(Villa Adriana)라 불린다. 그런데 말이 빌라이지 이곳에는 신전, 경마장, 도서관, 박물관 등 웬만한 시설과 여러 가지 기능을 갖춘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 건축 단지였다. 말하자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환상적인 착상으로 세워진 하나의 작은 도시였다. 이 ‘작은 도시’의 배치도를 보면, 시대를 앞질러갔다고 할 만큼 현대적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광대한 로마제국의 여러 속주를 여행하면서 고대 이집트의 웅장한 건축에서 섬세한 그리스 건축에 이르기까지, 그가 본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기이하면서도 인상 깊은 것들을 이곳에 재현했다고 하는데, 일부 사학자들에 의하면 황제 자신이 모든 건물을 설계하고 공사감독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빌라가 완공될 무렵 그는 병에 걸리면서 성격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원로원과 적지 않은 마찰을 초래하기도 했다.
친자식이 없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30대 초반의 젊은 원로원 의원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양자로 받아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하지만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는 곧 요절했고, 안토니누스를 후계자로 지목했지만, 그를 잃은 슬픔은 병든 황제의 마음을 짓눌렀다. 병이 악화되자 그는 아름다웠던 추억을 생생하게 재현한 그의 별장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안토니누스의 권고에 따라 바다가 보이는 나폴리 근교에서 요양하다가, 서기 138년 7월 10일,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골은 다음해에 테베레 강변에 자신이 세운 영묘에 묻혔다.
아우구스투스 영묘와 다른 참신한 형태
아우구스투스가 캄푸스 마르티우스 지역에 자신의 영묘를 세운 지 약 150년이 지난 다음, 하드리아누스는 자신과 후세 황제들의 묘소로 쓸 거대한 영묘를 계획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의 영묘에는 서기 98년 네르바 황제가 묻힌 이후 더 이상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테베레 강 건너편 바티칸 언덕 언저리에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개인 정원이 있던 곳에 터를 잡았는데, 이곳은 아우구스투스 영묘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영묘를 세울 무렵, 그는 황후 사비나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관능적인 미소년 안티노우스에게 완전히 반해 있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 영묘에 관해서는 사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서기 130년경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며,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지 1년이 지난 서기 139년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에 의해 완성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시조 아우구스투스 영묘와 비교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캄푸스 마르티우스 지역이 아닌, 테베레 강 건너편에 조심스럽게 영묘 자리를 잡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건축에 조예가 깊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소 수수하게 세워진 아우구스투스의 영묘와는 다른 뭔가 새로운 영묘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우구스투스의 영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요절한 조카 마르켈루스가 가장 먼저 안장된 것처럼, 하드리아누스의 영묘에는 그가 아끼던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가장 먼저 묻혔다. 이어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황후 사비나부터 시작해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가족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가족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황후 율리아 돔나, 작은 아들 게타, 그리고 카라칼라 황제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동안 후세 황제들과 가족들의 묘소로 사용되었다.
6세기 비잔틴의 사학자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이 영묘는 대리석으로 장식된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지름이 64미터, 높이가 21미터나 되는 거대한 원통형의 단층 탑이 올려 있었으며 이 탑의 바깥벽은 도리아식 기둥과 대리석상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위에 흙으로 커다란 능(凌)이 세워져 있었으며, 그 윗부분에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금빛 청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영묘는 당시 로마 시에 있는 건축물 가운데 콜로세움 다음으로 웅장한 건축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거룩한 천사의 성’과 ‘천사의 다리’
캄푸스 마르티우스 지역에서 영묘로 진입하는 것을 수월하게 하고 강 건너 지역을 주택지로 개발할 목적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서기 130년에서 134년 사이 영묘 앞에 다리를 세웠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하드리아누스의 씨족명을 따서 이 다리를 폰스 아일리우스(Pons Aelius)라 불렀다. 캄푸스 마르티우스 지역에서 다리에 한 발을 내디디고 영묘를 바라보면, 시야가 영묘 쪽에 집중되기 때문에 기념비적인 성격이 매우 강해진다. ‘천사의 다리’라고 불리는 이 다리는 1800년 동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가 19세기말 테베레 강 양변에 제방이 세워지면서 다소 개축되었다. 이 다리를 지탱하는 다섯 개의 아치 가운데 중간의 세 개는, 축조된 원래의 형태 그대를 보존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타계한 후, 이 영묘는 격동하는 로마의 역사와 함께 그 기능도 바뀌어 3세기 후반에는 테베레 강 하류 지역을 방어하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일부가 되어 로마를 지키는 견고한 보루가 되었고, 10세기에는 바티칸 궁전을 방어하는 요새가 되었다. 또한 1527년 독일 용병에 의한 로마 약탈 기간 중에는 포위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곳에 피신해 있기도 했다. 그 후에는 정치범들이 수감되고 처형되는 악명 높은 감옥이 되기도 했는데, 프랑스의 극작가 빅토리앙 사르두가 서기 1800년의 로마를 배경으로 쓴 희극 〈라 토스카〉와 이를 각색한 풋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서도 이곳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오페라에서 화가 카바라도시는 그의 연인 토스카와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하면서 먼동이 트는 로마의 하늘을 배경으로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을 부른 뒤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토스카는 성 아래로 몸을 던져 연인의 뒤를 따른다.
하드리아누스 영묘는 12세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거룩한 천사의 성’이란 뜻의 카스텔 산탄젤로(Castel Sant’Angelo)라고 불리는데, 이 이름은 옛 전설에서 유래한다. 50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당시 로마를 황폐화하던 페스트를 퇴치하기 위해 기도하던 중에 천사의 환상을 보게 된다. 천사는 영묘의 꼭대기에 서서 칼집에 칼을 집어넣고 있었는데, 이는 신의 은총이 내린 것을 뜻했다. 그 후 이 천사를 기념하여 예배당이 세워졌고, 이어서 천사의 모습이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세워졌으며, 18세기 중엽에 청동상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이 성 안에는 교황의 방, 감옥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난날 격동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지만, 광대한 로마제국의 영토를 지키고 내실을 기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묘소가 후손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상징하는 곳으로 사용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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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의 건국 이야기가 깃든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의 집부터 기원후 4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이전하기 직전에 세워지는 콘스탄티누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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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하드리아누스 영묘 –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정태남,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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