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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로마공화정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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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건국된 팔라티노 언덕은 정상부에 널찍하고 평탄한 땅이 있는데다가 평지에서 언덕으로 올라가기도 매우 좋고 양치기에도 알맞았으며, 또 언덕 위에서 바로 아래에 테베레 강이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주변 지역을 감시하기에도 매우 좋았다. 그리고 이곳은 내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강가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테베레 강의 섬 이졸라 티베리나(Isola Tiberina)는 하얀 모래밭이어서 강을 건너는 데 다리와 같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테베레 강을 따라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 내륙지방으로 들어가 물건을 사고파는 배들이 한번쯤 쉬어가던 곳이었다. 따라서 로마가 세워진 곳은 이미 교차로로서 지리적인 장점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교차로는 사람들이 가는 길을 멈추고 쉬는 곳이며, 다른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또 물건과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런데 시장이 강의 서쪽이 아닌 동쪽 강변에 형성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방어 때문이었다. 강의 서쪽 지역은 너무 열려 있어서 방어하기가 힘든 반면, 동쪽 지역은 캄피돌리오 언덕, 팔라티노 언덕, 아벤티노 언덕 등이 둘러싸고 있어서 유사시에 언덕 위로 대피하여 방어하기에도 좋았다. 더구나 팔라티노 언덕의 북쪽에 붙어 있는 캄피돌리오 언덕은 이 지역을 바로 내려다보며 감시하기에 알맞았다.
테베레 강의 섬 이졸라 티베리나의 동안(東岸)과 캄피돌리오, 팔라티노, 아벤티노 언덕으로 둘러싸인 강변 지역을 고대 로마인들은 포룸 보아리움(Forum Boarium)이라고 불렀다. 문자대로 해석하면 ‘소 시장’인데, 이 지역은 로마가 도시로서의 골격이 갖추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이 주변에 살고 있었던 라틴인, 사비니인, 에트루리아인들이 교역하던 곳이었다. 로물루스는 바로 이 지역을 관할하는 곳에 나라를 세웠으니까 길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셈이다. 그 후 로마가 주변의 땅을 정복하고 발전하면서 테베레 강 하구의 항구 오스티아(Ostia)에서 배로 운반되는 곡물, 올리브기름, 포도주 따위를 싣고 나르는 선착장이 생겼다. 또 포룸 보아리움 지역은 왕정 시대에 만든 하수도 클로아카 막시마가 테베레 강으로 흘러 들어가던 곳이기도 했다.
헤라클레스와 소도둑
포룸 보아리움 지역이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장이나 교역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신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옛날 옛적에, 이곳에서 헤라클레스는 소를 도둑맞았다고 한다. 소를 훔쳐간 도둑은 카쿠스(Cacus)라는 아주 교활한 목동인데(다른 전설에 의하면 카쿠스는 불을 뿜는 괴물이다), 헤라클레스가 잠든 사이 소의 꼬리를 잡고 자기 동굴 안으로 끌고 갔다. 소가 뒷걸음을 쳤으니 소의 발자국만 보고는 행방을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헤라클레스는 그의 잔꾀를 알아채고 그를 잡아 처단했다고 한다. 소를 도둑맞은 곳에 헤라클레스는 자신을 위하여 아라 막시마(Ara Maxima, 최고의 제단)를 세웠는데 이 제단은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곽을 쌓기 전에 이미 세워져 있었다.
사실 헤라클레스와 카쿠스의 이야기는 스페인이나 시칠리아와 같은 다른 지중해 연안지방에도 알려져 있었다. 이미 까마득한 옛날부터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상인들에 의해 전해 내려온 것으로, 그들은 배에 물건을 싣고 테베레 강을 타고 로마에 들어와 교역을 하면서 이 신화도 넘겨주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전해진 전설은 각 지방에 맞게 조금씩 각색되었다.
테베레 강의 수로 교통이 더욱 원활해지자, 포룸 보아리움에 커다란 생필품 비축 창고가 생겨났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이미 로마 건국 초기부터 모든 길이 떠나고 모이는 ‘국제물류센터’가 되었다. 로마는 상인들에게 보호세를 명목으로 헤라클레스 제단에 헌금하게 하여 짭짤한 수입을 올렸고 상인들은 보호세 덕택에 물건을 도둑맞지 않고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포룸 보아리움은 크게 발전할 수 있었고 신생 로마가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로마가 확장되면서 기존의 포룸 보아리움으로는 부족하여 기원전 2세기에 포룸 보아리움 남쪽 아벤티노 언덕 아래의 테베레 강변에 새로운 선착장과 거대한 물류센터인 엠포리움이 세워졌는데, 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기능을 발휘했다.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이 이 지역에서 즐겨 찾는 것은 영화 〈로마의 휴일〉을 통해서 잘 알려진 ‘진실의 입’이라고 하는 강의 신 플루비우스의 얼굴 모습을 한 둥근 대리석판이다. ‘진실의 입’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그곳에 손을 넣으면 그 손을 삼켜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이 ‘진실의 입’이 있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은 바로 헤라클레스의 제단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길목 좋은 곳에 세워진 그리스식 신전
포룸 보아리움에는 현재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그리스식 신전이 두 개 남아 있다. 북쪽의 신전은 포룸 보아리움 지역이 선착장을 갖추게 되자 기원전 6세기에 항구의 신 포르투누스에게 바치기 위해 세워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우리가 보는 이 신전은 기원전 2세기 후반에 복원된 것으로 이오니아식 기둥이 매우 인상적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건축에서 건축의 분위기는 기둥의 양식과 기둥 간격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고대 건축에서 기둥 중심축 간의 간격은 아무렇게나 적당히 정한 것이 아니고, 기둥 지름의 1.5배, 2배, 2.25배, 3배, 3.5배로 표준화되어 있다. 이 신전의 기둥 간격을 보면 기둥과 기둥 사이에 두 개의 기둥이 꼭 끼어 들 수 있다. 즉, 기둥 중심축 사이의 간격은 기둥 지름의 세 배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비율로 배치된 열주(列柱)를 ‘디아스틸루스’라고 하는데, 기둥 간격이 다소 떨어져 있어 어떻게 보면 느긋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포르투누스 신전 바로 남쪽에 있는 원통형 신전은 로마에 현존하는 대리석 건축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신전은 포룸 로마눔 안에 있는 베스타 신전과 모양이 매우 비슷해서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보통 베스타 신전이라고 불렸지만, 사실 베스타 여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헤라클레스 신전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 179년에서 142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나서 그리스와 시리아의 일부를 손아귀에 넣은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국가가 되었을 때이다.
이 신전은 올리브기름 무역으로 거부가 된 헤렌누스라는 로마의 상인이 기부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라클레스는 이탈리아 무역업자들의 수호신이기 때문에 헤라클레스 경배는 상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을 뿐더러, 헤라클레스는 올리브기름 제조업자조합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따라서 테베레 강 선착장 가까이에 헤라클레스 신전이 있는 것은 그리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그 당시 그리스의 델로스에서는 하루에 노예 1만 명이 매매될 정도로 노예매매가 성행하고 있었는데, 노예무역으로 크게 돈을 벌던 로마 및 이탈리아 반도 출신 상인들은 델로스에 ‘이탈리아인의 아고라’를 세웠다. 올리브기름 무역을 통해 번 돈으로 로마에 대리석 신전 하나쯤 세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이 신전은 당시 지중해를 누비던 로마 상인들의 막강한 경제력을 말해준다.
이 신전을 두르고 있는 20개의 화려한 코린토스 양식의 원기둥을 한번 살펴보자. 기원전 1세기 초반에 『건축론』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쓴 비트루비우스는 기둥의 양식을 인격화하여 보았다. 즉, 도리스 양식은 균형 잡힌 남성의 신체에서 느껴지는 비례와 힘과 고상함으로 보았고, 이오니아 양식은 여성적인 가냘픔으로 보았으며, 코린토스 양식은 연약한 소녀의 섬세함으로 보았다. 그의 눈을 빌면, 이 신전은 옆에 있는 이오니아 양식의 포르투누스 신전에 비해 훨씬 더 여성적이고 섬세해 보여 힘센 ‘헤라클레스’라는 이름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던져준다. 만약 도리스 양식이나 이오니아 양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신전이 주는 인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 두 신전의 규모는 작다. 규모가 작으니 내부 공간도 상대적으로 작다. 내부 공간이 작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한 건축이 아니라는 뜻이다. 조각과 건축을 비교해볼 때, 일반적으로 조각은 그 주변을 돌아보면서 감상할 수 있는 형상으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건축은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서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드넓은 내부 공간을 갖춘 판테온과 같은 로마의 신전 건축과 비교하면, 이러한 그리스 신전 건축은 내부 공간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밖에서 보고 느끼게 하는 면이 강하다. 즉 건축적인 성격보다 조각적인 성격이 오히려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로마에 르네상스의 바람이 불던 1502년 건축가 브라만테는 헤라클레스 신전에서 영감을 얻어 베드로가 순교한 곳으로 추정되는 자니콜로 언덕 기슭 위에 작은 신전 템피엣토(Tempietto)를 세웠는데, 그는 화려한 코린토스 양식이 아닌 장식이 없는 도리스 양식의 기둥을 사용했다. 아마 베드로의 강인했던 성격과 세상 물욕과 등진 그의 삶을 건축으로 상징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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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의 건국 이야기가 깃든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의 집부터 기원후 4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이전하기 직전에 세워지는 콘스탄티누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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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포룸 보아리움 –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정태남,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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