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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로마왕정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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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토론회’라는 뜻으로 쓰이는 영어 ‘포럼(Forum)’은 따지고 보면 로마의 특정한 장소에서 유래된 말이다. 먼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나폴레옹 시대의 화가 쟈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사비니 여인들(Les Sabines)〉이라는 유명한 그림을 한번 보자. 그림을 보면 어떤 여인들은 서로 싸우려고 대치한 두 군대 사이에 서서 싸움을 말리고 있고, 또 어떤 여인들은 아기를 번쩍 들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팔라티노 언덕 위에 ‘로마’라고 하는 나라를 세운 로물루스는 인구가 너무 적은 것이 고민이었다. 그래서 그는 캄피돌리오 언덕 위에 아실룸(Asylum)이라는 성역을 만들어 외부에서 피신해온 도망자들이나 범죄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인구를 늘리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하는 것인데, 문제는 로물루스의 추종자들 중에 여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기가 막힌 묘수를 생각해냈다.
로물루스는 축제를 열어 로마 주변에 사는 사비니 부족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여동생이나 딸들을 꼭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사비니족의 왕 타티우스는 로물루스가 베푼 축제에 자기 백성을 데리고 참석했다. 축제가 절정에 이를 때쯤 사비니 사람들은 술에 완전히 곯아떨어졌던 모양이다. 바로 이때 로물루스의 ‘작전’대로 로마의 장정들은 사비니 여인들을 모조리 납치해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사비니 남자들은 모두 쫓겨나고, 납치된 사비니 여인들은 거칠기 짝이 없는 로마 장정들에게 강제로 ‘집단 결혼’을 당하고 말았다. 얼마 후, 사비니 남자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납치된 여인들을 구하러 로마로 쳐들어왔다. 로마군과 사비니군이 일전을 벌이려고 서로 대치하자, 이미 로마 장정들의 아내가 되어 자식까지 낳은 사비니 여인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왜냐하면 로마군이 지게 되면 과부가 되고, 사비니군이 지게 되면 고아가 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인들은 로마군과 사비니군 사이에 뛰어들어 태어난 아기들을 번쩍 들고 싸움을 말렸다. 로마군과 사비니군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손을 잡고 평화적으로 결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사비니인들이 민족적 자존심을 조장하기 위해 후세에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캄피돌리오 언덕의 아실룸 이야기는 타민족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매우 오래된 사실이고, 따라서 로마인들은 관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 만들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또 사비니 왕 타티우스도 전설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실존했던 인물인지 알 수 없다. 공화정 때는 왕 대신 두 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통치했는데, 왜 집정관이 둘이었는지를 암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일 수도 있다. 어쨌든 로마인과 사비니인의 결합만큼은 기정사실이다. 이리하여 로마는 다민족 국가로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으며, 적당한 인구를 확보한 다음부터는 팔라티노 언덕의 조그만 부락에서 강력하고 거대한 나라로 서서히 떠오르게 되었다.
무질서한 부락에서 세련된 도시로
납치당한 여인들을 구하러온 사비니군과 로마군이 대치했던 곳은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 그리고 퀴리날레 언덕과 비미날레 언덕이 서로 마주치는 습한 저지대였는데, 이 주변은 로마가 건국되기 이전인 기원전 9세기부터 주변 언덕에 살던 사람들의 묘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로물루스는 이곳을 흙으로 메워 백성들이 모이는 장소로 만들고 ‘바깥에 있는 곳’이란 뜻의 ‘포룸(Forum)’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주변 언덕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종교행사를 함께 치르기에 매우 이상적인 장소였다.
로마는 건국된 후 약 250년 동안 로물루스를 포함하여 일곱 명의 전설적인 왕들이 다스렸는데, 3대 왕까지는 라틴계와 사비니계였으나 4대 왕부터 7대 왕까지는 에트루리아계였다. 당시 최고의 선진국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은 로마처럼 무질서한 부락이 아니라 방어용 성벽과 포장도로와 하수도망도 갖춘 그야말로 당시의 기준으로는 ‘초현대식 계획도시’였다.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Tarquinius Priscus)가 통치하는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아 도시다운 도시로 발전하게 되고 그들의 앞선 기술과 문화를 별로 힘들이지 않고 습득하여 짧은 시간 안에 ‘촌놈’에서 ‘세련된 신사’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오히려 선진국 에트루리아를 압도할 수 있는 힘도 갖추게 되었다.
국가 경제라고는 농사밖에 모르던 이전의 왕들과 달리, 제5대 왕은 기원전 616년부터 장장 38년 동안 집권하면서 에트루리아에서 건축가, 공학자,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도로와 배수시설과 같은 도시의 인프라를 먼저 구축하고 움막집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던 달동네 같은 로마를 정돈된 도시로 바꾸어놓았다. 특히 그는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물이 고이고 테베레 강이 넘치면 완전히 물에 잠겨버리는 포룸에 배수시설과 하수시설을 구축하고 돌로 포장하여 널찍한 시장터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건설의 시초가 된다. 포룸 로마눔은 이탈리아어로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고 하는데, ‘로마 공회장(公會場)’쯤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포룸 로마눔은 세월이 흐르면서 단순히 열린 시장터가 아니라 도심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제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기원전 534~510년)는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라고 하는 커다란 하수도를 만들었는데, 그 높이와 폭이 짐을 가득 실은 마차가 한 대 지날 수 있을 정도였으며,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후 공공건물, 이어서 상점과 신전들이 이곳에 세워지면서 로마 중심가로서의 면모가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에는 날씨가 나쁠 때를 대비하여 옥외 공간의 기능을 일부 흡수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다목적 공공건물 바실리카(basilica)가 군데군데 세워졌다. 그리하여 포룸 로마눔은 로마의 종교, 경제, 정치, 행정, 사법기관이 집중되어 있는 중심가가 되었다.
로마 최고의 번화가
오늘날 대도시의 중심가처럼 항상 사람들로 붐비던 포룸 로마눔은 한마디로 소통의 장(場)이었다. 이곳에서 정치인은 장외연설을 했고, 법관은 법을 집행했으며, 사제는 종교행사에 전념했고, 시민들은 ‘쇼핑’을 즐기기도 했으며, 또 정가에 떠도는 소문, 새로 제정된 법이나 전투 현황 등에 귀 기울이기도 했으며, 여러 가지 문제를 주제로 공개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종종 시민들을 위한 축제가 밤늦게까지 열기기도 했는데, 특히 시민들의 눈길을 많이 끌었던 것은 개선행렬, 장례행렬, 종교행렬 등이었다. 이 행렬들은 포룸 로마눔 안에서 동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길 비아 사크라(Via Sacra, 신성한 길)를 따라 로마의 최고신 유피테르 신전이 있는 캄피돌리오 언덕 위를 향해 지나갔다.
공화정 말기 로마의 인구는 백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당시 로마를 찾는 외국인들도 수없이 많았는데, 이들은 이 포룸을 보고 로마의 위대함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로마의 국력이 점점 커져가자 기존의 시설만으로는 시민들의 공공생활을 수용하기에 부족했다. 그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이름을 딴 포룸 율리움을 따로 세웠고,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후세의 황제들도 포룸 로마눔 동쪽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포룸을 따로 건설했다.
로마의 중심지에 새로운 포룸들이 계속 만들어지자 포룸 로마눔의 기능은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치, 문화, 종교기능이 새로 세워진 포룸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기 80년 콜로세움이 완공된 다음부터는 포룸 로마눔에서 이루어지던 행사도 급격히 줄어들어서, 시민들의 공공생활을 수용하는 도시 공간으로서 별로 사용되는 일이 없었다. 그 후 이곳은 주로 역사적인 일을 기념하는 곳으로만 사용되었다. 후세의 황제들은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기념비들을 포룸 로마눔 안에 세우게 했다. 그래서 이미 중요한 건물들이 꽉 들어찬 이곳에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티투스 개선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황비 파우스티나 신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등이 기존 건물들 사이의 비좁은 틈이나 포룸 로마눔 변방에 세워졌다. 그리고 서기 608년에는 포룸 로마눔에 마침표를 찍듯이 동로마제국 황제 포카스를 기념하는 원기둥이 마지막으로 세워졌다. 물론 이때는 포룸 로마눔의 기능이 내리막길에 들어선 지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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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의 건국 이야기가 깃든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의 집부터 기원후 4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이전하기 직전에 세워지는 콘스탄티누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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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포룸 로마눔 –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정태남,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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