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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로마제국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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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칼라가 암살당한 후에 등장하는 황제들은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차례 모두 남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이 혼란기 중에 그래도 통치자의 자질을 갖고 군대의 규율을 회복한 데키우스 황제는 로마의 사회 규율도 제대로 잡는다는 구실로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지만, 재위 2년 만에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 재위한 발레리우스 황제 역시 기독교를 더욱더 박해하여 기독교도의 재산까지도 몰수했는데, 260년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1세의 간계에 빠져 포로가 되고 말았다. 로마 역사상 황제가 적에게 처음으로 생포되는 바람에 로마제국과 황제의 권위는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야만족들의 위협은 발레리우스 황제의 아들 갈리에누스 황제 때 더욱 심해졌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를 구해낼 엄두도 못 내고 국경방어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사이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는 갈리아 제국이, 오리엔트에는 팔미라 왕국이 성립되어 로마제국으로부터 떨어져나갔고, 군사적 능력이 부족했던 갈리에누스는 268년 측근 기병대장의 쿠데타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는 뛰어난 전략가로 고트족을 제압했지만 270년 재위 2년 만에 전염병으로 죽고 말았다. 원로원은 그의 동생 퀸틸리우스를 황제로 정했으나, 군대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의 기병대장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자 황제지명 결정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서기 214년 속주 일리리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군인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정치가로서의 안목도 있었다. 그는 기울어지는 로마제국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즉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쌓은 국경 방어용 요새방벽 리메스(limes)를 포기하고 로마제국 내의 주요 도시가 각자 알아서 스스로 방어하도록 한 것이다. 이 결정은 로마제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공식화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는 로마 시 둘레에 높고 긴 벽돌방벽을 세웠는데, 당시 공병들은 모두 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민간 건설업자들 중심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서기 271년 로마 시 주변에는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쌓은 성벽의 길이에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장장 19킬로미터의 성벽이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275년에는 어느 정도 방어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공이 된 것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프로부스 황제 때였다. 이 긴 성벽을 불과 4년 만에 세웠다는 것은 야만족의 침입이 임박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마에는 푸리우스 카밀루스 이래 600년 동안, 국력이 밖으로만 뻗어나가던 시대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도시성벽’이라는 새로운 건축이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서양에서 이와 같은 대규모의 도시방어용 성벽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런데 ‘서양에서 최대’라는 것에 로마 사람들은 자부심을 느꼈을까? 과거 엄청난 영토를 정복하여 도시를 방어하는 성벽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결코 자랑할 일이 못 된다. 이 방벽이 세워짐으로써 로마는 수세에 몰린데다가 도시로서 더 이상의 확장이 금지되는 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서양에서 가장 긴 도시성벽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이 성벽은 긴급한 상황에서 ‘방어’라는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하고 지형지물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전쟁시 최대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 공사기간을 단축하고 건축자재를 절약하기 위해 기존의 공공건축물, 개인 별장, 고가수로의 일부분, 심지어 케스티우스의 피라미드와 서민들이 사는 집들도 성벽의 일부로 편입되어 버렸는데,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이질적인 성벽’은 전체 성벽 길이의 10분의 1 정도가 된다. 성벽은 로마 시내에 있는 황제들의 사유지와 주요 공공시설을 최대한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예로 로마 외곽에 있는 카라칼라 목욕장과 같은 대규모의 건축물들도 성벽 안에 보호되도록 했는데, 이것은 로마가 포위되는 경우 대규모의 건축물이 적의 요새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성벽은 북쪽으로는 현재 포폴로 광장이 있는 핀치오 언덕까지, 서쪽으로는 테베레 강 너머 쟈니콜로 언덕까지 방어했다. 성벽은 높이 6~8미터, 두께 3.5미터이며, 30미터 간격마다 감시탑을 세웠다. 또 주요 도로가 통과하는 곳에는 성문을 만들었다.
방벽은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4세기 초, 막센티우스 황제는 기존의 방벽이 로마 방어에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하고 성벽 주위에 깊은 해자를 만들어 방어시설을 더욱 보강했으며, 5세기 초 호노리우스 황제는 고트족의 침입 위협이 점점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하자 방벽과 탑을 12미터로 높였다. 그리고 성문 입구는 하나로 줄였으며, 주요 성문의 안쪽에는 제2 방어선이 되는 성문을 이중으로 하나 더 만들었다. 이때 하드리아누스의 영묘가 테베레 강 건너편을 지키는 보루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6세기 기록에 의하면 아우렐리아누스의 방벽은 383개의 감시탑, 14개의 성문과 5개의 보조 이중 성문, 116군데의 초소, 2066개의 투석기 발사용 개구부를 갖추고 있었으며, 활을 쏘기 위한 흉벽은 2066개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물샐틈없는 방위망에도 불구하고 5세기 초 알라릭이 이끄는 고트족은 뚫린 북동쪽 성문을 통과해 성내로 들어와 로마를 완전히 유린하고 말았다.
그 후로 방벽은 원래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여러 번 복원되지만,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로마의 교통량을 해결하기 위해 방벽 곳곳이 헐려나갔다. 그래서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럼 잘려나간 부분도 많다. 또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군데군데에 커다란 ‘구멍들’을 뚫기도 했다.
신의 자리를 넘본 아우렐리아누스
태양교에 심취해 있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 숭배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화하고 로마 전통신보다 우선시 했다. 그는 태양신 숭배의 최고 사제로서 일 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가 지난 후 낮의 길이가 막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인 12월 25일을 태양신의 탄신일로 정했는데,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을 12월 25일로 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관습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편 275년 도나우 강변 전선시찰을 마치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기 위해 오리엔트 지방으로 향하던 중,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게 잘못을 저질러 처벌을 두려워한 비서 에로스가 몇몇 경호대 장교들에게 황제가 그들을 처벌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황제의 칼 같은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이들은 에로스가 한 거짓말을 곧이듣고 먼저 손을 썼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재위 4년 9개월 만에 침실에서 어이없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성벽만큼은 제대로 세우지 못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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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의 건국 이야기가 깃든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의 집부터 기원후 4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이전하기 직전에 세워지는 콘스탄티누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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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우렐리아누스 도시성벽 –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정태남,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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