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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 파치스와 해시계 오벨리스크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팍스 아우구스타’를 천명하는 평화의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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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로마제국 전기

1568년 아우구스투스 영묘에서 남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건물 지하에서 조각들로 새겨진 대리석판 아홉 개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59년에는 아이네아스가 제사를 지내는 모습과 군신 마르스의 머리가 조각된 대리석 파편이 발견되었지만 그래도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그 후 20년이 지난 어느 날 독일의 고고학자 폰 둔(von Duhn)은 이것이 다름 아닌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 아라 파치스의 파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1903년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해 제단의 본체뿐 아니라 다른 파편들도 찾아냈고 1937년과 1938년 사이에 모든 발굴 작업을 마쳤다.

평화의 제단 아라 파치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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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 파치스의 파편들이 발굴된 자리에는 이미 다른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영묘 옆 공터에 이 제단을 보존할 박물관 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서 마치 퍼즐 게임 하듯 부서진 조각들을 맞추었다. 이리하여 1938년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9월 23일, 평화의 제단 아라 파치스가 거의 2000년 만에 원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살점이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이 있기는 해도 말이다. 그리고 2006년 로마 시는 미국 건축가 리차드 마이어에게 기존의 박물관을 헐고 현대식 박물관을 세우도록 했다.

현대식의 아라 파치스 박물관

오른쪽에 아우구스투스 영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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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아우구스타

내란으로 점철되던 로마를 모두 평정한 아우구스투스는 방대한 로마의 영토 전역에 평화를 정착시킨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자신의 영묘 입구에 세운 청동기둥에다가 자신의 업적을 기록했는데, 그중에는 아라 파키스(Ara Pacis), 즉 평화의 제단을 만들었다는 문구가 있다. 현재 이탈리아에서는 후기 라틴어 발음을 따라 ‘아라 파치스’라고 한다. 또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업적을 기록한 ‘레스 게스타이(Res Gestae)’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내가 히스파니아(스페인)와 갈리아에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왔을 때, 원로원은 나의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팍스 아우구스타 제단을 세워 봉헌하기로 의결했다. 그리고 원로원은 이 제단에서 고관대신들과 사제들과 베스타 여사제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우리 조상들은 로마인들이 사는 모든 곳에 있는 야누스 신전 문이 가끔이나마 닫혀 있기를 기원했는데, 육지와 바다에서 승리를 쟁취한 다음에는 신전 문이 닫혔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기 이전, 그러니까 로마가 건국된 이래로 야누스 신전의 문은 단 두 번만 닫혀 있었다고 한다.”

야누스 신전의 문을 열어두었다는 것은 야누스 신이 로마군을 보호하러 나갔다는 뜻으로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였고, 반면에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혀 있다는 것은 평화가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처럼 팍스 아우구스타(Pax Augusta,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평화)를 상징하는 기념비가 바로 평화의 제단 ‘아라 파치스’이다. 이 제단은 어떻게 보면 평화란 구호나 협상이 아니라 오로지 힘으로 얻어진다는 것을 웅변해주는 듯하다. 어쨌든 이 평화의 제단은 아우구스투스가 오랜 내란을 종식하고 로마에 평화를 정착시킨 것을 경축하며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세운 것으로, 이제 로마는 내전의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해적들을 소탕하여 해로가 안전해졌으며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가 되었다.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는 아직 완전한 평화가 오지 않았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저항이 잠잠해졌으니, 이베리아 반도의 남단 카디스에서부터 게르마니아의 엘베 강 하구에 이르기까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에 의한 평화)가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아라 파치스 박물관 외벽을 장식하는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 ‘레스 게스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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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의 ‘가족사진’과 아그리파

아라 파치스는 아우구스투스 영묘 남쪽 대략 300미터 지점 플라미니아 가도 연변에 기원전 13년에 착공, 기원전 9년에 완공되었다. 벽체가 울타리처럼 둘러져 있고 한가운데에 제단이 있으며 제단은 계단을 통해 들어서게 되어 있고 지붕은 없다. 제단을 감싸고 있는 벽체의 높이는 6.1미터이고, 제단의 평면은 가로 11.6미터, 세로 10.6미터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대리석을 비롯하여 투포, 트라베르티노 등 이 제단에 사용된 석재들은 모두 이탈리아 산(産)이다. 대리석은 아우구스투스 시대 때 채굴하기 시작한 이탈리아 북서해안 카라라 산(産)이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리석은 주로 그리스나 오리엔트 지방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아우구스투스는 아라 파치스를 세우면서 ‘국산’을 ‘보란 듯이’ 철저히 애용했던 셈이다.

아라 파치스

이곳에 사용된 석재는 모두 이탈리아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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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 파치스의 벽면은 마치 광고판과 같아서 안쪽 면과 바깥쪽 면은 부조로 가득 장식되어 있다. 벽면은 가운데에 둘림띠를 이용해 상하로 나뉘어 있는데, 위에는 인물들의 행렬이, 아래에는 풍요한 자연을 상징하는 형상들이 채워져 있으며, 앞면과 뒷면은 신화가 묘사되어 있고, 양쪽 벽에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부조들은 모두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정치 이념을 표현하고 있으며,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에 평화와 풍요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아라 파치스의 정면을 보면, 오른쪽에는 이탈리아 땅에 발을 내디딘 아이네아스가 두 명의 젊은이로 표현된 가정의 신 파테나스에게 제사 지내는 장면이 있다. 정면의 왼쪽에는 군신 마르스의 얼굴이 있고, 늑대 젖을 빨고 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모습은 원판이 행방불명이기 때문에 그림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뒷벽면의 왼쪽 면에는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있는데, 이것은 평화를 의인화한 것이거나 땅의 여신 텔루스를 상징한다. 좌우에 있는 바람과 물의 여신은 모두 풍요를 상징하고, 텅 비어 있는 오른쪽 면은 아마도 로마를 상징하는 여신의 부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과 왼쪽 바깥벽 면에는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황제 가문의 인물들의 행렬이 보이는데, 자신의 가문 모두가 아이네아스와 로물루스의 후손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오른쪽 벽면은 아우구스투스를 중심으로 로마제국의 황제 가문들, 즉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주요 인물들과 제사에 관련된 자들을 직위 순서대로 모두 집합시켜, 마치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 포즈를 취하기 직전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중 주인공인 아우구스투스의 모습은 왼쪽에 얼굴만 조금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행렬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아그리파이다. 그는 어린 아들 카이우스 카이사르를 데리고 있다. 미술공부를 했던 사람이라면 아그리파의 석고 데생을 한번쯤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석고상에서 보는 아그리파의 얼굴은 힘이 넘쳐흐르는 건장한 모습이지만, 아라 파치스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마치 병자와 같은 인상을 주며 천하를 호령하던 장군의 기상은 전혀 보이지 않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우수가 서려 있는 듯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가족 행렬

왼쪽 끝 잘린 부분이 아우구스투스이고 가운데에 사제의 모습을 한 인물이 아그리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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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파는 기원전 56년에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나 군에 몸을 담았는데, 20세 때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격파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총애를 받다가 옥타비아누스의 단짝이 되었고, 그 후에는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이 되어 육지와 바다에서 연전연승하는 장군이 되었다. 그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 함대를 격파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어린 딸 율리아를 아그리파에게 시집보내어 그를 사위로 삼았으며, 그를 로마제국 제2대 황제로 삼을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아라 파치스가 세워지기 전인 기원전 12년, 불과 44세의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이미 죽은 사람을 산 사람들 사이에 등장시켰던 것이 아닐까?

아그리파의 모습

그는 아라 파치스가 세워지기 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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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벽면의 하단은 마치 기(氣)가 넘치는 땅에서 생성된 자연의 모습을 묘사한 듯한데, 그 한가운데 백조의 모습도 보인다. 백조는 죽기 직전에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여 음악의 신 아폴로에게 바쳐진 새이다. 아폴로는 아우구스투스가 수호신으로 받들던 신이다. 그런데 아라 파치스의 백조는 어쩐지 이미 유명을 달리한 아그리파를 상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라 파치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부조를 자세히 관찰하면 직위와 계급에 따라 인물들의 배치가 다르다. 중요한 인물은 전면에 등장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으면 저부조로 처리되어 뒤에 살짝 얼굴만 보이거나 크기가 축소되어 있다. 또 등장인물들은 근엄한 제사 행렬이지만 딱딱한 자세가 아니라 모두 각자 나름대로 자연스런 동작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누구에게서도 움직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동작을 취하고는 있지만 모두 매우 정적(靜的)이다. 그리고 빛이 비치면 음영은 매우 얕고 균일하다.

전체적인 장면은 정적이지만, 엄숙한 표정을 한 어른들 사이에서 지루하다는 듯 아버지를 보채는 듯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화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얼굴이 아무리 봐도 너무 어른스럽다. 아라 파치스의 조각가는 어린아이 얼굴을 조각하는 데에는 솜씨가 다소 미숙했던 것일까? 아니면 어린아이를 ‘작은 어른’으로 여겼기 때문일까?

어린아이의 모습

얼굴은 어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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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라 파치스의 위치도 우연히 정한 것이 아니다. 캄푸스 마르티우스는 문자 그대로 ‘군신 마르스의 들판’이란 뜻으로, 전쟁을 상징하는 곳이다. 바로 이 지역에 아라 파치스가 세워졌다는 것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심었다는 것을 상징하기에도 아주 적절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연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이케나스의 감독으로 아라 파치스 앞 광장 바닥에 가로 160미터, 세로 75미터의 거대한 해시계 판을 만들었다. 해시계의 중심축으로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를 세웠는데, 오벨리스크는 파라오 프삼미티쿠스 2세(기원전 595~589년)의 것으로 높이는 21.29미터이다. 이 해시계는 아라 파치스가 완성되기 1년 전인 기원전 10년에 세워졌고, 오벨리스크의 그림자는 1년 중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9월 23일 정오에 아라 파치스의 중심축에 정확히 떨어졌다. 이날은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일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태어났다는 의미가 된다.

아라 파치스의 벽의 높이가 6미터인데 반해 오벨리스크는 자그마치 21미터가 넘고 또 평지에 세워졌으니 멀리서도 사람들의 시야를 쉽게 이끌 수 있었다. 이 오벨리스크는 현재 원래의 위치보다 약 40미터 남쪽에 있는 몬테치토리오 광장(Piazza Montecitorio)의 이탈리아 의사당 건물 바로 앞에 세워져 있다.

몬테치토리오 광장에 세워진 해시계 오벨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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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 파치스와 해시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 찾아온 평화로운 시대에 대한 낙관적인 메시지를 던져주면서,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인물을 선전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자신의 치적을 선전하는 것이 로마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방법이 좀 색다르다. 왜냐하면 아라 파치스에서는 신화와 역사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우구스투스는 신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한 상징주의와 역사를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를 적당히 혼합하여 자신을 선전했던 것이다.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

1. 아우구스투스 영묘, 2. 평화의 제단 아라 파치스, 3. 해시계 오벨리스크, 4. 테베레 강, 5. 비아 플라미니아(현재의 비아 델 코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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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늘날의 천문학자들에 의하면, 평화의 제단이 세워진 지 몇 년이 지난 기원전 6년에서 기원전 4년 사이, 혹성 몇 개가 일렬로 겹쳐져서 땅에서 보면 아주 큰 별이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때 수도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속주 유데아(유대)에서 인류에게 새로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줄 아기가 태어났으니, 그의 이름은 예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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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 집필자 소개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도이, 로마대학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언어 등 ..펼쳐보기

출처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 저자정태남 | cp명21세기북스 도서 소개

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의 건국 이야기가 깃든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의 집부터 기원후 4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이전하기 직전에 세워지는 콘스탄티누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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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라 파치스와 해시계 오벨리스크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정태남,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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