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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칠리아 메텔라의 묘소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로마 최대 재벌가문 귀부인의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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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로마공화정시대

공화정 시대 후반, 로마에서는 ‘부동산 투기’가 극에 달했다. 당시 부동산 투기의 제1인자를 꼽으라면 단연 이재(理財)에 밝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일 것이다.

독재관 술라의 심복이던 그는 살생부에 오른 반대파 인사들의 재산이 몰수되어 헐값에 경매처분 될 때, 이를 사들여 짭짤한 재미를 봤다. 그리고 당시 로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화재가 발생했는데, 그는 목수, 미장이 등 자그마치 500명이 넘는 노예를 사서 거느리고 있다가 불난 집이 있으면 잽싸게 달려가서 불난 집뿐 아니라 옆집까지도 흥정하여 헐값으로 구입하고는 수리하여 비싸게 되팔거나 비싸게 세를 놓았다. 그래서 당시 로마에서는 크라수스가 부하들을 시켜 일부러 몰래 불을 지른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남의 불행 덕택에 그는 서서히 로마의 엄청난 부동산을 소유한 거부가 되었으며, 부동산 외에도 노예매매, 요즘으로 말하면 건설, 금융, 유통, 은광 등 여러 사업체를 운영하는 로마 최고의 재벌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사업을 도맡아 운영하면서 그에게 막대한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은 모두 노예들이었다.

체칠리아 메텔라의 거대한 원통형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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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최대 갑부 크라수스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잡고 나서 로마에는 수많은 이민족 출신 노예들이 끌려 왔는데, 그들 중에는 검투사로 풀려나간 사람도 있었다. 검투사 시합은 당시 최고의 볼거리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곳곳에 검투사 전문양성소가 있었다.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검투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71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로마의 집권층은 크라수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그의 지휘하에 대대적인 노예반란군 토벌작전에 나섰는데, 이때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하여 반란군 6만 명이 전사하고 북쪽으로 도망치던 5000명은 히스파니아(스페인)에서 마리우스 잔당을 토벌하고 돌아온 폼페이우스에 의해 도살되었고 6000명은 생포되었다. 크라수스는 이 포로들을 비아 아피아에 몇 킬로미터씩 늘어 세워놓고 모두 십자가형에 처했는데, 그가 이들을 극형에 처한 이유는 사회기강을 바로 잡기 위한 것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가 거느린 수많은 노예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크라수스는 기원전 70년, 35세의 개선장군으로 로마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폼페이우스와 짜고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어, 부와 권력을 한꺼번에 거머쥐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60년에는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했고, 기원전 55년에는 폼페이우스와 다시 한 번 집정관이 되어 시리아 총독도 겸임했다. 하지만 기원전 53년에 그는 파르티아(현재의 이라크와 이란)에 원정을 갔다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자 총사령관이 생포되는 것을 두려워한 부하에게 찔렸다.

로마군은 전멸당하고 크라수스의 머리는 잘려서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에게 보내졌다. 오로데스는 크라수스의 입을 열어젖히고 그 안으로 금을 녹여 쏟아부으면서 “자, 기분이 어떤지 말해봐, 네놈이 살았을 때 그렇게도 탐내던 금을 이제 잔뜩 마셨으니 말이야”라고 빈정댔다고 한다.

귀부인 체칠리아 메텔라

크라수스가 죽은 지 3년쯤 지난 다음, 비아 아피아의 도로 언저리에 지체 높은 한 귀부인을 위해 커다란 묘소가 하나 세워졌다. 약 20년 전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군의 시체가 십자가에 매달려 늘어서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묘소는 기원전 5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지대가 높은 곳에 세워져 있어서 보통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하며 기념비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다. 또 이 묘소는 탑이나 작은 요새와 같은 인상을 준다.

이 묘소는 둥근 능을 세우던 에트루리아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고 할 수 있다. 묘소의 높이는 11미터이고, 정사각형 기단 위에 지름이 약 30미터나 되는 원통형 벽체를 올려놓았고 그 위에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을 심었다. 사이프러스는 무덤에 사용하던 가장 고급스러운 나무였다. 이 묘소의 형태는 어떻게 보면 후세에 세워질 거대한 아우구스투스의 영묘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의 등장을 예고하는 듯 보인다.

체칠리아 메텔라 묘소의 원래 모습 상상도와 내부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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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소의 주인공인 귀부인의 이름은 당시 발음으로는 카이킬리아 메텔라인데, 여기서는 이탈리아식으로 간단히 체칠리아 메텔라라고 하자. 체칠리아 메텔라라고 하면 술라의 첫 번째 아내이지만, 이 묘소의 비문(碑文)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이 귀부인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의 딸이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내였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로마에서 대대로 높은 관직을 지낸 귀족가문 출신으로 크레타를 정복한 장군이었으며,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을 지낸 다음해인 기원전 69년에 집정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로마 최대 재벌 크라수스가 아니라 그의 아들로 여겨지는데, 아버지와 이름이 똑같은 것을 보면 장남이었던 것 같다. 장남이 맞다면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서 장군을 지냈다고 전해지며 아버지와 함께 파르티아에 원정 갔다가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 보이는 체칠리아 메텔라의 이름

그녀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의 딸이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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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칠리아 메텔라의 묘소는 비아 아피아에 흩어져 있는 묘소들 가운데 현재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서, 고대 로마의 폐허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비아 아피아 주변 풍경의 시각적 구심점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묘소 주변의 분위기는 말로 무언가 꼭 집어서 표현할 없는 비감(悲感)이 젖어 흐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화가들이나 사진작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기도 하고, 시인들의 시심(詩心)을 자극하기도 한다. 체칠리아 메텔라의 삶에 관해서는 사실 아무런 얘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그의 작품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 4장에서 이 묘소를 보고 감상적인 시를 읊었지만, 체칠리아 메텔라라는 여인에 관해서는 시인의 상상력을 조금도 동원하고 있지 않다.

비아 아피아 연변에 지대가 높은 곳에 세워진 체칠리아 메텔라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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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 집필자 소개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도이, 로마대학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언어 등 ..펼쳐보기

출처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 저자정태남 | cp명21세기북스 도서 소개

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의 건국 이야기가 깃든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의 집부터 기원후 4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이전하기 직전에 세워지는 콘스탄티누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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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체칠리아 메텔라의 묘소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정태남,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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