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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로마제국 전성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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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피살당하자 원로원은 곧바로 나이가 지긋한 원로의원 네르바를 황제로 추대했다. 네르바는 1년 6개월 동안 재위하고 노환으로 사망하기 세 달 전, 출신지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능력과 가능성을 보고 게르마니아에서 군단을 지휘하던 40세의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장군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선택했다. 트라야누스는 서기 53년 히스파니아(현재의 스페인)의 남부 세비야 근처 이탈리카에서 로마의 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군인으로 입신출세하여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이탈리아 본토가 아닌 속주 출신으로서 로마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인물인 셈이다.
황제로 추대 받은 트라야누스는 먼저 게르마니아에서 라인 강 방어망을 확고히 구축하고, 다키아와 경계를 이루는 도나우 강 방어선을 점검하고 나서 로마로 내려왔는데, 자그마치 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로마 외곽에 도착한 그는 호위병도 없이 마주치는 시민들과 얘기도 나누면서 로마 시내 중심부로 걸어서 들어왔으며 자기 앞에서 어느 누구도 무릎을 꿇지 않도록 했다.
로마에 매우 겸허하게 ‘데뷔’한 트라야누스 황제는 일하는 데 지칠 줄 몰랐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일할 것을 요구하는 타입이었으며, 로마제국 최고 통치자로서 오점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는 정치가로서는 계몽군주였고 대대적인 개혁보다는 좋은 행정을 펴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 무력을 배격했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과감히 사용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아마 다키아(Dacia) 전쟁일 것이다.
서기 1세기 후반 다키아에서 강성대국의 야망을 품은 지도자 데케발루스가 등장했다. 그는 서기 85년에 로마제국 국경을 넘어 모에시아를 공격하여 그곳의 로마 총독을 살해하고, 그곳에 주둔하던 로마 군단을 궤멸시켰으며, 이어 다키아를 공격해온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군대를 한번 패주시켰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다키아에 기술지원을 해주고 포로로 잡힌 로마군을 돈을 조금 주고 돌려받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 로마인들에게 로마제국이 다키아에 굽실거리는 것으로 비쳐졌다.
신임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이런 상황은 로마제국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서기 101년 군대를 끌고 도나우 강을 따라 직접 다키아 원정길에 올랐다. 무서운 상대가 오자 기겁을 한 데케발루스는 로마가 요구한 강화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트라야누스는 그의 목숨과 왕위를 그대로 보존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데케발루스는 강화조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이를 구실 삼아 105년에 다시 다키아를 공략했는데, 그가 내심 노리고 있던 것은 다키아의 무궁무진한 금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데케발루스는 필사적인 항쟁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모든 것을 잃은 그는 로마 기병대가 추격해오자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 주변에 사는 여러 지방의 주민들과 수많은 로마인들을 이주시켜 다키아를 완전히 로마화했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루마니아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루마니아어는 이탈리아어와 매우 비슷하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의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금광을 모조리 파헤친 다음 수많은 전리품과 5만 명에 이르는 포로를 이끌고 로마에 개선했고, 승리를 기념하여 로마제국의 위용에 걸맞는 거대하고 화려한 포룸을 계획했다. 이리하여 아우구스투스 포룸 북서쪽 퀴리날레 언덕 아랫부분에 ‘팍스 로마나’를 만방에 천명하는 로마 최대의 포룸이 건축가 아폴로도로스에 의하여 세워지게 되었다.
길이 300미터, 폭 190미터에 달하는 이 포룸은 107년에 착공하여 5년 만에 완공했는데, 포룸을 세울 때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부지였다. 왜냐하면 로마의 중심가에는 이미 전임 황제들의 포룸들이 세워져 있어서 평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보통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던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했다. 즉 충분한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캄피돌리오와 퀴리날레 언덕 사이에 말안장과 같은 언덕을 모두 깎아 내렸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세워진 건물과 길이 철거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는 세르비우스 성벽도 일부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언덕이 깎임으로써 포룸 지역과 북서쪽 평지가 통하게 되어 캄푸스 마르티우스 지역은 로마의 신시가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100년 전 아우구스투스가 숙원했던 사업이기도 하다.
트라야누스 포룸은 개선문, 회랑, 바실리카 울피아, 라틴어 및 그리스어 도서관, 다키아 전승기념 원기둥, 신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기본 틀은 아우구스투스 포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장방형 광장 양변에는 기다란 회랑이 있었으며, 회랑의 주축을 중심으로 양쪽에 커다란 반원형의 공간 엑세드라가 세워져 있었다. 광장의 한쪽 면에는 트라야누스의 씨족 이름인 ‘울피우스’를 딴 거대한 바실리카 울피아가 세워져 있었고, 그 뒤쪽에는 그리스어 도서관, 라틴어 도서관이 맞붙어 있었다.
돌에 새겨진 전쟁 다큐멘터리
지금 트라야누스 포룸의 유적터를 보면, 바실리카 울피아의 지붕을 지탱하던 돌기둥만 부서진 채로 4열로 서 있고 나머지는 그 흔적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다키아 전쟁 전승기념 원기둥만큼은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한 채 서 있다. 이탈리아어로 콜론나 트라야나(Colonna Traiana)라고 불리는 이 원기둥은 서기 113년 5월 12일 기공식을 가진 후, 거의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우아하고 장려한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채 역사적인 면뿐 아니라, 예술적인 면으로 볼 때 매우 귀중한 자료를 후세 사람들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이 원기둥을 받치는 기단의 한가운데에는 내부로 통하는 문이 있고, 문 바로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SENATUS POPULUSQUE ROMANUS/IMP(eratori) CAESARI DIVI NERVAE F(ilio) NERVAE/ TRAIANO AUG(usto) GERM(anico) DACICO PONTIF(ici) MAXIMO TRIB(unica) POT(estate) XVII, IMP(erator) VI, CO(n)S(ul) VI, P(ater) P(atriae)/AD DECLARANDUM QUANTAE ALTITUDINIS/ MONS ET LUCUS TANT(is oper)IBUS SIT EGESTUS.”
이 문구를 간략히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이 신격 네르바의 아들이며, 존엄자이며, 게르마니아의 정복자이며, 다키아의 정복자이며, 대제사장이며, 열일곱 번째 호민관이며, 여섯 번째 임페라토르이며, 여섯 번째 집정관인 조국의 아버지 트라야누스에게 이 공사를 위해 허물어버린 원래 언덕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 글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공적을 찬양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고, 후세의 환경보호주의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듯, 포룸과 전승기념 원기둥을 세우기 위해 할 수 없이 언덕을 깎아내야 했음을 매우 미안해하는 듯한 말만 보인다. 왜 황제를 찬양하는 문구가 없을까? 겸허했던 트라야누스가 그런 문구를 새겨 넣는 것을 완강히 사양했던 것은 아닐까?
이 원기둥은 단순히 언덕의 원래 높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것만은 물론 아니다. 주된 목적은 다키아 전쟁기록 외에도, 트라야누스 황제의 묘소를 위함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거대한 영묘에 네르바 황제가 묻힌 다음부터는 후세의 황제들이 묻힐 자리가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이미 공화정 시대에도 원기둥을 만들어 묘소를 만든 예가 있었으니 트라야누스 원기둥은 묘소로서 기발한 착상은 아니었다. 또 예로부터 포메리움 내부에 해당하는 로마 시내에는 매장이 허용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묘소가 가능했던 것은 옛 관습에 따라 로마 시내에서 개선식을 올린 경우는 시내에 묻힐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 원기둥은 ‘100(로마식 피트)의 원기둥’이란 뜻으로 콜룸나 켄테나리아(Columna centenaria)라고도 불렸다. 일반적으로 로마식 1피트는 29.4에서 29.65센티미터 사이이다. 그런데 실제 원기둥만의 높이는 29.76미터이니 실제로는 ‘101로마식 피트의 원기둥’인 셈이다. 이 사실은 건물마다 적용하는 피트의 기준이 달랐음을 말해준다. 한편 기단까지 포함한 원기둥의 총 높이는 39.83미터가 되는데 이것은 트라야누스 포룸을 세우기 위하여 깎아낸 언덕의 높이와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둥 아랫부분의 지름은 3.7미터이고 기둥 높이의 1/3지점부터는 좁아들기 시작하여 윗부분의 지름은 3.2미터가 된다. 원기둥의 내부에는 185개의 나선형 계단이 원주의 정상까지 이르고 있고, 원기둥 표면에 뚫려진 43개의 창이 내부를 밝히고 있다. 이 원기둥은 35톤이나 되는 높이 1.5미터의 카라라 산 대리석 원통형 블록을 18개 쌓아올린 다음 원기둥의 표면에 나선형으로 감아 올라가면서 조각을 했다.
원기둥 표면 조각은 두 차례에 걸친 다키아 전쟁(101~102년, 105~106년) 상황과 로마인과 다키아인들의 풍습을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돌에 새겨진 전쟁기록인 셈이다. 그런데 이 조각들은 승리를 축하하는 예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나선형 띠를 모두 풀어보면 길이가 200미터가 넘는다. 원기둥 표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그마치 2500여 명에 달하는데, 트라야누스 황제의 모습은 예순 번 이상 보인다. 그리고 로마군은 질서 정연한 가운데 강인하면서도 평온한 모습으로 묘사된 반면, 다키아인들은 혼란에 빠진 채 겁에 질려 자비를 구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부조들은 얼핏 보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라 파치스의 부조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지만 아파 파치스의 부조에서 보이는 고전적인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예전에 볼 수 없던 아주 새로운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이 원기둥을 설계한 건축가는 아폴로도로스로 알려져 있지만, 원기둥 표면에 수많은 부조를 조각한 작가는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다키아 전쟁 이야기는 기둥 밑부분, 즉 로마군이 도나우 강에 부교를 만들어 진격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위로 전개된다. 그리고 전쟁 이야기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기둥 윗부분에는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의 최후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로마 기병대의 추격을 받던 데케발루스가 나무 아래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자결하기 위해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찌르려고 하는 그의 최후는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작가는 전쟁 이야기를 사건별로 나누어서 하고 있지 않다. 장면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작가가 하는 얘기를 잘 ‘들으려면’ 조각의 세부묘사에 시선을 멈출 수가 없다. 작가는 전쟁의 상황이 고조될 때에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래서 전쟁 이야기가 단조롭지 않게, 마치 음악처럼 굴곡을 이루며 흘러가고 있다. 즉 사건의 진행이 빨랐다 느렸다가 하면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또 작가는 자기가 본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것 내지는 남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화면에 풍경은 없고 단지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정확한 비례나 원근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데, 가령 성벽의 높이는 난간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고, 전투 장면에서 군인들의 크기는 성벽보다도 훨씬 더 크다. 즉 작가는 전쟁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더 중요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사실을 사진처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해들은 이야기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원기둥에서 정확히 중간이 되는 지점에는 날개를 단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방패 위에 전쟁사를 기록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제1차와 2차 다키아 전쟁을 구분하고 있다. 날개 달린 같은 승리의 여신이라도, 그리스의 니케(Nike) 여신은 신들의 가호를 하늘에서 가져오는 수호신이지만, 로마의 빅토리아 여신은 다른 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기록한다. 즉 빅토리아 여신은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기록하는 ‘역사’ 그 자체의 상징인 것이다.
햇빛도 전쟁을 이야기하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로마와 같이 햇빛이 많은 곳에서는 음영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에, 상세한 부분들까지 감상하기에 좋다. 작가는 이러한 자연 조건도 염두에 두었을지 모른다. 햇빛이 원기둥 표면에 떨어지는 각도와 강도에 따라 부조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세심하게 생각했는지, 부조의 높낮이를 조율하면서 원기둥의 평면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로마의 책은 파피루스나 양피지를 둘둘 말아서 만들었는데, 이러한 두루마리 책을 ‘볼루멘(volumen)’이라고 불렀다. 영어의 ‘volume’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원기둥의 좌우에는 라틴어 도서관과 그리스어 도서관이 있었으니, 원기둥이 두루마리 책 볼루멘을 상징하는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원기둥 높은 부분에 있는 부조들은 제대로 볼 재간이 없으니 ‘다큐멘터리 영화’를 어떻게 감상할 수 있을까? 당시 바실리카 울피아와 도서관의 테라스에서는 원기둥의 부조를 가까이 볼 수 있었겠지만, 띠를 따라 나선형으로 돌아 올라가면서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제대로 보지도 못할 부조들을 왜 힘들여 만들었을까? 이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기』를 썼던 것처럼, 트라야누스 황제도 제1, 2차 다키아 전쟁기를 시적인 낭독체로 표현한 『다키아 전쟁기』를 남겼다고 하는데 혹시 도서관 안에 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다른 식으로 전시했던 것은 아닐까? 다키아 전쟁은 로마제국 역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다키아 전쟁기』를 비롯해 이에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분실되어 상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현재의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기록이라면 바로 이 원기둥이다. 즉 이 원기둥의 부조는 『다키아 전쟁기』를 형상화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단, 승리자의 시각으로만 일방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얼마나 객관적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파르티아 원정 중에 갑자기 병이 드는 바람에 총사령관에 하드리아누스를 임명하고 로마에 돌아오다가, 64세 생일을 한 달 앞둔 117년 8월 9일, 눈을 감고 말았다. 개선마차를 타고 로마에 입성한 것은 그의 유골함이었다. 유골함은 그의 유언에 따라 원기둥을 받치는 기단부분에 안치되었다. 원기둥 꼭대기에는 트라야누스가 신격화된 것을 상징하듯 그의 청동상이 하늘을 배경으로 세워졌다. 높은 곳에서 왼손에 창을 들고 서서 지평선 너머 멀리 시선을 던지던 그의 모습은 중세에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델라포르타가 1587년에 제작한 베드로의 청동상이 세워져 바티칸 언덕을 바라보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명을 받은 사도였고, 트라야누스는 로마제국의 영토를 땅 끝까지 넓히려던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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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의 건국 이야기가 깃든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의 집부터 기원후 4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이전하기 직전에 세워지는 콘스탄티누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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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트라야누스포룸과 원기둥 –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정태남,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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