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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로마제국 전성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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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대화재를 수습하고 난 네로는 66년,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그리스로 건너가 1년을 보내고 있었는데 유데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현장으로 급파했다. 이후 네로는 로마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서둘러 귀환해 사태를 수습했다. 하지만 귀족층이 보기에 황제답지 못한 행동을 계속하자 갈리아의 빈딕스 총독이 네로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빈딕스의 난이 진압된 후에는 히스파니아(스페인)에서 원로원과 황제 근위대와 내통하던 부호 갈바 총독이 반란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상황을 저울질해보던 원로원이 전격적으로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자 근위대는 갈바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68년 6월, 순식간에 몰락해버린 갓 서른의 네로는 결국 자살의 길을 택하고 말았다. 그 후 로마는 대혼란기를 맞게 된다.
새로운 황제가 된 갈바는 근위대와 밀약했던 하사금 기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재위 일곱 달을 넘기지 못하고 살해당했고, 이후 근위대가 옹립하여 황제가 된 오토는 로마제국 최전방의 게르만 군단 사령관 비텔리우스가 이탈리아로 진군해 내려오자 재위 석 달 만에 자살하고 말았다. 한편, 비텔리우스가 황제가 된 것을 꺼려한 오리엔트 군단과 도나우 군단은 덕망 있는 60세의 노장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도나우 군단은 이탈리아로 진군해 들어와 로마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비텔리우스 황제를 살해하고, 69년 12월 21일 수도를 완전히 접수, 베스파시아누스의 로마 입성의 길을 터놓았다. 이리하여 로마제국 사상 처음으로 황족이나 원로원 가문 출신이 아닌 ‘신참자’가 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플라비우스 왕조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두 아들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대내적으로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고, 대외적으로는 로마제국의 건재함을 만방에 알릴 수 있는 대규모 공공건축물 건립을 계획했다. 먼저 플라비우스 왕가에 의한 평화를 상징하는 ‘평화의 포룸’을 건립했고, 네로의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를 헐어내고 시민들을 위한 공공시설 티투스 목욕장을 세웠으며, 도무스 아우레아의 인공호수 자리에는 배수시설을 하여 원형극장을 세웠다. 이 거대한 원형극장은 플라비우스 가문에 의해 세어졌다고 하여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Amphitheatrum Flavium)’이라고 한다. 여기서 암피(amphi-)라는 말은 ‘양쪽’이란 뜻이다. 로마인들은 ‘두 개의 테아트룸’, 즉 ‘두 개의 반원형극장’을 마주보게 하여 붙인 원형극장을 만들고 이것을 암피테아트룸(amphitheatrum)이라고 불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을 세우면서 그 옆에 있던 높이 35미터나 되는 네로 황제의 거대한 황금동상 콜로수스(Colossus)는 헐지 않고 얼굴을 태양신으로 바꾼 채 세워두었다. 이 ‘원형극장’은 중세에 ‘콜로세움(Colosseum)’으로 불려졌는데, 이 명칭은 ‘콜로수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서기 72년에 콜로세움 축조공사를 시작하고 나서 2층까지 올라가는 것만 보고 79년 타계하고 말았다. 그는 임종석에서 “아, 이제 나는 신이 되어 가는 모양이다”라고 농담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으며, “황제는 누워서 죽을 수 없다”면서 서서 죽기를 고집했다고 한다.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 그의 장남 티투스는 다음해에 콜로세움을 3층까지 완성한 후, 죽은 아버지를 기리며 개막기념행사를 100일 동안 성대하게 열었고, 또 이에 맞추어 티투스 목욕장도 개장했다.
이것은 79년 여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한 재앙과 80년 봄 로마의 중심부를 초토화한 대화재로 인해 침체되어 있던 시민들의 기분을 돋워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개막행사 중 하나인 맹수사냥 시합에서 5000마리가 넘는 진귀한 맹수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콜로세움이 4층까지 완성된 것은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사기간이 10년 정도 걸린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대규모의 건축물을 이렇게 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간결한 설계와 공사 현장의 효율적인 조직과 뛰어난 시공기술과 수많은 유데아 전쟁포로를 이용한 노예 노동력 덕택으로 볼 수 있겠다.
콜로세움의 바깥벽 높이는 거의 50미터이고, 타원형 평면의 장축과 단축은 각각 188미터와 156미터, 둘레가 527미터이다. 아레나(경기장)의 장축과 단축은 각각 약 86미터와 54미터(280×168로마식 피트)로 장축 대 단축의 비율이 당시 가장 이상적으로 여겨지던 5:3이었다. 또 콜로세움의 기초의 두께는 하중이 큰 바깥벽 쪽은 12~13미터, 하중이 작은 안쪽 관객석은 4미터가 되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가라앉거나 금 간 곳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호수 자리에다가 이런 거대한 경기장을 세웠을까? 소박한 가문 출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가계를 까마득한 신화와 연결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을 뿐더러, 서민적인 성격상 그럴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늪지를 흙으로 메우고 백성들이 모이는 포룸을 만든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처럼, 비만 오면 물이 괴는 저지대에 백성들이 모이는 장소를 만들어 자신도 새로운 왕조의 창건자임을 은근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또 그는 ‘새로운 시대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세워진 고전적인 건축을 많이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콜로세움의 경우 아우구스투스가 완공한 마르켈루스 극장 외관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콜로세움의 외관을 보면, 마르켈루스 극장에서처럼 아치와 아치 사이의 기둥은 하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장식을 위해 사용되었는데, 1층은 두터운 느낌을 주는 도리아 양식과 토스카나 양식을 혼합한 반원기둥, 2층은 다소 여성적인 느낌을 주는 이오니아식 반원기둥, 3층은 마치 소녀를 연상하듯 가볍고 날렵한 느낌을 주는 코린토스식 반원기둥으로 되어 있는 반면, 4층은 코린토스식을 변형한 복합 양식인 듯한 벽기둥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원기둥에 비하면 훨씬 가볍게 느껴진다. 마르켈루스 극장에서처럼 위로 갈수록 건물의 하중이 줄어들기 때문에, 서로 다른 느낌을 주는 양식의 기둥들을 이와 같은 순서로 수직으로 배치한 것은 매우 논리적이다.
한편 직사각형 창문이 있는 벽체로 된 4층은 아치로 뚫려 있는 1, 2, 3층과 강한 음영 대비를 이루면서 콜로세움의 외관을 전체적으로 마무리하는 듯하며, 마치 거대한 개선문인 것처럼 보여 콜로세움 외관에 중후한 느낌이 들게 한다.
콜로세움은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입석까지 포함하면 7만 명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웬만한 도시의 인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는데도, 관중들이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15분이 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사실 1층의 80개의 아치 중에서 타원의 장축과 단축 선상에 있는 4개의 주입구를 제외한 76개는 출입구477 I(1)부터 LXXVI(76)까지 새겨져 있고 입장권에는 출입구477 쓰여 있어서 출입통제가 수월했다.
네 개의 층으로 나뉜 관중석은 신분에 따라 자리가 달랐고, 시야를 좋게 하기 위해 2, 3층 관중석 경사도를 37도나 되게 했으며, 이보다 더 가파르게 설계된 4층 관중석은 외벽을 바깥으로 미는 힘을 줄이기 위해 목재로 만들었다. 이밖에도 비가 오거나 햇빛이 강할 때 돛과 같은 천막 벨라리움(Velarium)을 쳤는데, 이것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나폴리 만 미세눔 항의 해군기지에서 올라온 특수요원들이 담당했다. 벨라리움을 고정하던 장치는 바깥벽 윗부분에 남아 있다.
콜로세움이 세워진 곳은 주변의 언덕이 마주치는 저지대이어서 물이 빠지기 힘든 곳인데도 불구하고 초창기에는 ‘나우마키아’라고 불리던 모의 해전도 즐길 정도로 배수시설을 완벽하게 했다. 하지만 물을 넣고 빼는 번거로움 때문에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이를 없애고 경기장 아래에 미로와 같은 지하시설을 만들어 검투사의 대기실, 맹수 우리, 무대장치 보관실 등으로 사용했다. 이밖에도 콜로세움의 건축가들은 경기장 세트와 장비, 사람과 맹수들을 적시에 또는 동시에 아레나에 올려놓을 수 있는 엘리베이터 장치를 고안하기도 했다.
검투사 시합
콜로세움에서 로마 시민들은 맹수 사냥이나 검투사 시합을 즐겼다. 경기장 바닥에는 모래를 깔았는데, ‘모래’를 뜻하는 아레나(arena)는 ‘원형경기장’이란 뜻으로 굳어져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열리던 여러 행사 가운데 최고의 인기 종목은 단연 검투사 시합이었다.
검투사 시합은 주로 노예들이 도맡아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검투사들이 양성되었다. 제정 시대의 지식층들은 검투사 시합을 교훈적 가치가 있는 오락으로 여겼으며 로마인의 기상을 높인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예를 들어 소(少) 플리니우스는 “노예와 범죄자들도 검투사 시합을 통해 영광에 대한 집념과 승리를 쟁취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라고 했다. 그런데 검투사 시합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잔인해졌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검투사 시합을 금지하려고 했지만, 검투사 시합에 대한 시민들의 열광을 황제들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5세기에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콜로세움에서 검투사 시합이 한창일 때 텔레마코스라는 동방에서 온 수도승이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 관중들을 향해 이런 비인간적인 경기를 그만두자고 호소하자 격노한 관중들은 야유를 퍼붓고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이상하게도 그다음부터는 검투사 시합이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콜로세움에서 마지막으로 벌어졌던 행사는 서기 523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콜로세움은 거의 450년 동안 사용되었던 셈이다. 굳건하게 서 있던 콜로세움은 중세 때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서서히 파괴되기 시작했다. 무너져내린 돌들은 건축자재로 다른 곳에 사용되었고, 돌과 돌 사이를 연결하는 이음쇠를 빼내기 위해 곳곳에 구멍을 뚫기도 했다.
콜로세움은 로마에 르네상스의 바람이 불 때 최악의 운명을 맞이했다. 한마디로 채석장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콜로세움은 기독교 신자들이 순교한 성지(聖地)로 여겨졌기 때문에, 베드로 대성당과 같은 기독교 성전을 새로 짓는 데에 성지의 돌을 사용한 것은 나름대로 종교적인 의미도 있었다. 어쨌든 만신창이가 된 콜로세움은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되어 잡초만 무성히 자랐고, 그 후에는 소와 양을 먹이는 방목장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1790년,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콜로세움에 순교지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여 복원할 수 있는 데까지 복원하고 이곳에 십자가를 세웠다. 엄밀히 따지면, 콜로세움은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던 곳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 성지(聖地)는 아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피를 흘리고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콜로세움의 십자가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콜로세움은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굳건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원래 모습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뼈대만 남은 폐허의 모습은 묘한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보름달이 떠 있는 밤이면 더욱더 그렇다. 낭만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거추장스러운 옷을 다 벗어 던진 ‘나체’가 되었다고나 할까? 영국 시인 바이런이 말했듯이 ‘마력(魔力)의 원’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콜로세움은 그러나 건축적인 면에서 엄밀하게 따지면 이러한 낭만적인 면과는 본질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다. 물론, ‘황제는 누워서 죽을 수 없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마지막 한마디처럼 고대 로마의 기상을 가장 웅변적으로 상징하는 기념비임에는 틀림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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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의 건국 이야기가 깃든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의 집부터 기원후 4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수도가 비잔티움으로 이전하기 직전에 세워지는 콘스탄티누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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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콜로세움 –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정태남,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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